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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한국이 좋으십니까? (2) (2012년 10월 8일에 작상한 글) 대구 MBC 창사특집으로 지난 9월 27일과 28일에 방영한 '독일 경상도 사람들'이란 프로를 보았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14년 동안 광부로 또는 간호원으로 독일로 간 분들 중에 특히 경상도 출신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어느 분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박정희 정권때 일종의 특혜가 아니었나 하는 말씀이 있어서 속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웃고 말았다.) 단순하게 광부나 간호원의 일을 했다고 피상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고생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지하 천 미터를 내려간 갱도는 40℃ 이상에 95%의 습도이었다고 한다. 벌거벗고 일해도 장화에 땀이 가득차서 가끔씩 벗어서 거꾸로 들고 쏟았다고 한다. 독일에서.. 더보기
한국이 좋으십니까? (1) (2012년 9월 22일에 작성한 글) (편의상 경어는 생략합니다.) - 한국이 좋은 게 있고, 미국도 좋은 게 많다. 개인적으로는 미국이 더 좋고 편한 게 많다고 생각한다. 아다시피 땅 덩어리도 넓고 자연도 좋지 않느냐? 아무리 경제위기라 해도 벌어먹고 살기도 미국이 훨씬 낫다. 그러나 이유가 어찌 되었던 한국에 돌아와서 살고 있다. 뭐하러 미국을 생각하나? 한국도 좋은 점 많다. 한국의 좋은 점만 생각하고, 그럴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 - 난, 이곳이 좋아. 여긴 TV 아무거나 틀어도 다 한국말 나오잖아! 아무 음식점이나 들어가도 되고. 불편한 게 하나도 없어. 손주들 보고프면 컴퓨터 틀고 화상으로 얼굴 보면 되고. 가끔 한 번씩 보면 되지 노상 붙어있으면 서로 불편해. (도치형님) 라이오 코리아.. 더보기
성폭력 사회 (2012년 9월 20일) - 만나는 여자가 있기는 해. 그런데 유부녀야. 불쌍한 사람이지. 미인이야, 임마! 놈은 내 고등학교 친구 중에서도 요즘 말로 절친이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그랬던 것 처럼, 가난하고 별로 화목하지도 않은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는 공통점이 많았고, 학창시절에는 늘 붙어다녔다. 이류 고등학교에서 공부 외에는 별 재주가 없던 나와는 달리, 이 친구는 운동이면 운동, 기타나 노래까지 재주가 많은 탓에 친구들 사이에서는 꽤나 인기가 있던 친구였다. 우여곡절 끝에 1980년에 원주의 하사관 학교에서 제대 후 이민을 떠났었다.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1.5세를 만나 결혼했지만, 6개월만에 끝나고 말았다. 놈의 변명은 중학교 때 이민온 젊은 여자는 한국의 나쁜 점과 미국의 나쁜 점만을.. 더보기
이민자의 직업 (6) (2012년 9월 17일) 지금까지 댓글을 주신 분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았다. - 30년 전에는 무엇을 내놓고 팔더라도 팔렸다. 심지어 돌맹이를 내놓아도 팔린다고 농담할 정도로 장사가 잘 되었다. 혼자 가게를 운영하면서 아이들을 사립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강도가 들면서 가게를 접었다. ('흘러가는 구름'님) - 아직도 미국에는 기회가 많다. 셰일가스로 인해 새로운 기회도 창출되고 있다. 선장이나 항해사로 어선을 타는 직업이나, 셰일가스 관련된 직종은 기회가 열려있고, 보수도 매우 좋다. 일본인이나 중국인들과 다르게 한인들은 자기들끼리 너무 경쟁이 심하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Zapata 님) - 캐나다에서는 컨비니언스 스토어를 운영하는 한인 이민자가 많은데, 대형 몰에 치여서 사양길인 탓에, 한인.. 더보기
이민자의 직업 (5) (2012년 9월 11일) (처음 글을 올릴 때도 언급했지만, 십 수 년에 불과한 일천한 이민경험으로 쓸 수 있는 주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민자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이기도 하고 과거와는 너무 많이 상황이 바뀌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의 참여를 바라면서 정한 논제입니다. 오랜 경험을 가지신 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K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사람으로 크게 성공했다. 옛 직장동료이기도 한 그가 만약 한국에 있었더라면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에 내 스스로의 답은 'I don't thing so' 이다. 그가 만든 회사는 'CSC(Computer Science Co.)'라는 포츈 500대 기업에 팔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 더보기
이민자의 직업 (4) (2012년 9월 6일) 10여 년 쯤 전에 UN에서 오피서로 일하는 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아다시피 UN 본부가 뉴욕에 그렇게 큰 빌딩을 가지고 있으니, 그곳에 종사하는 분들도 많을 수 밖에 없다. 연봉이 십 오만 불이라는 오피서 자리는 수입 보다는 세계평화에 이바지한다는 보람이 더 클 것 같았다. UN 사무총장 밑에 사무차장이 있고, 오피서들은 그 사무차장에 소속되어 일을 하는데 한인들이나 1.5세들이 도전해 볼만한 직업이라고 했다. UN에서 각 나라의 영향력은 분담금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한국은 1% 정도의 분담금을 내는데도 11위(당시 기준)에 해당한다고 했다. 20%가 넘게 분담금을 내는 미국이 당연 1위이고, 일본과 독일 순인데 미국을 싫어하는 제3세계 국가들의 저항 때문에 미.. 더보기
이민자의 직업 (3) (2012년 9월 5일) 세탁소는 보통 7 to 7 이다. 아침 7시에 문을 열고 저녁 7시에 문을 닫는데, 대부분 부부가 같이 일하기 때문에 아이들을 돌 볼 시간이 잘 없다. 아이들은 13세가 넘으면 대부분 스스로 학교에 가고, 텅빈 집으로 혼자 귀가한다. 세탁소는 얼룩(스테인)을 발견하고 제거하는 것이 기술이라고 들었다. 나이가 들어 노안에 돋보기를 걸치고 형광등 아래서 세탁물을 뒤적이며 얼룩을 찾는 주인의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경쟁이 심해지자 와이셔츠 한 장에 99센트를 받는 곳도 있다. 이윤을 보자는 것이 아니라 손님을 끌기위한 서비스다. 세탁물을 가져오고 갖다주는 델리버리 서비스도 무료다. 제살 파먹는 경쟁 때문에 수익은 줄어들고 일은 늘어나는 것이다. 거기다 스팀에 들어가는 세제.. 더보기
이민자의 직업 (2) (2012년 9월 1일) - 한인들이 지난 20년 동안 네일가게로 잘 벌어먹고 살았는데, 그것도 이젠 끝났어. 경쟁도 경쟁이지만, 중국사람 월남사람들을 당해낼 수가 없어. 월남사람들은 손재주도 얼마나 좋은지 몰라. 지금은 고급화로 겨우겨우 지탱해 나가고 있긴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가겠어! - 무언가 다른 비즈니스를 개척해야 하는데. 앞으로 10년, 20년 한인들이 먹고 살만한 것 없을까? - 시체 화장 어때? 여기 장례식에 가면 뷰잉을 하잖아! 그때 보면 송장들을 살아있는 것 처럼 예쁘게 화장 시키잖아! 한국사람들 손재주로 그걸 하면 미국사람들 따라올 수 없을 거야. 그쪽에 진출한 한인들도 별로 없잖아! - 아이, 그래도 그렇지! 무서워서 어떻게 시체를 만지냐? 아무리 돈 많이 준다고 해도 그건 못하겠다.. 더보기
이민자의 직업 (1) (2012년 8월 31일) - 사병은 공군, 장교는 육군이듯이 한국에서는 봉급쟁이, 미국에서는 비즈니스예요. 미국에서 월급쟁이 해서는 돈 못 모아요. 무조건 비즈니스를 해야 합니다. 십 수년 전, 미국에 이민하여 일 년 쯤 지나, 구역회라는 모임에 참석했을 때였다. 염불보다는 잿밥이라고, 구역모임 행사는 간단하게 끝나고 캐터링해서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 앞에서 몇 순배의 소주잔을 돌리고 난 떠들썩한 자리였다. 처음 참석하여 서먹서먹한 자리였는데, 옆자리에 있던 형제님 하나가 술잔과 함께 내게 말을 건네며, 직장에 다니고 있다는 말에 대꾸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분들은 대개 세탁소나 네일가게를 하는 분들이었다. 통관 사무실을 운영하는 분도 있었고, 1.5세로 국방성 산하 무기연구소에 근무하는 교우도 있.. 더보기
Better Life 를 찾아서 Ⅵ (2012년 7월 5일) 여행의 추억 3년 전 갑작스레 레이오프가 되고도 처음에는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주변에서 같이 일하자는 사람도 있었고, 걱정하지 말라고 격려해주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줄어들게 될 수입이 걱정되었을 뿐. 그러나 한 두 달이 지나면서, 돌아가는 상황이 점점 어려워지자 주변 사람들도 점차 말을 바꾸기 시작했고, 다시 잡을 구한다는 것은 요원해져 갔다. 그래서 떠난 여행이었다. 현실을 떠나 마음을 정리하며, 최선의 방안을 찾고 싶었다. 미국의 동쪽 끝으로만 다녔다. 뉴저지 남쪽 끝 Cape May에서 카페리를 타고 델라웨어 루이스로 갔고, 거기서 동쪽 해변을 따라 버지니아 비치로, 거기서 동쪽 끝으로 노스캐롤라이너 아우터 뱅크(Outer Bank)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