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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이민자의 직업 (5)

(2012년 9월 11일)

 

(처음 글을 올릴 때도 언급했지만, 십 수 년에 불과한 일천한 이민경험으로 쓸 수 있는 주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민자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이기도 하고 과거와는 너무 많이 상황이 바뀌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의 참여를 바라면서 정한 논제입니다. 오랜 경험을 가지신 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K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사람으로 크게 성공했다. 옛 직장동료이기도 한 그가 만약 한국에 있었더라면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에 내 스스로의 답은 'I don't thing so' 이다. 그가 만든 회사는 'CSC(Computer Science Co.)'라는 포츈 500대 기업에 팔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회사가 되었지만, 1992년 건넌방에서 1인 회사로 출발하여 한 때는 연매출 4천만 불이 넘었고, 유럽, 중국, 한국에 브랜치를 두고 400명에 가까운 직원을 둔 컴퓨터 테크놀로지 회사로 성장했었다.


그가 어떻게 성공했는지는 논외이기 때문에 다룰 필요가 없겠고, 여기서는 어떻게 이민자의 직업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이야기 해 보려고 한다.


자본을 갖고 시작한 회사도 아니고, 순전히 아이디어와 기술만 갖고 시작한 회사이기 때문에 월급을 많이 주는 사람을 채용할 수가 없었던 그는, 다니던 교회에서 할 일이 없는 한인들에게 컴퓨터 사용법을 가르치면서 최소한의 급여를 주면서 시작했다. 종이문서를 스캔하여 컴퓨터에 입력하는 작업이 필요했던 일은 많은 인력이 필요했으나, 약간의 프로그램 사용법이 필요할 뿐 컴퓨터 지식은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와이프가 하는 네일가게에 샷더맨이었던 한 친구는, 컴퓨터나 배울 목적으로 일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회사는 성장했고 일이 많아지면서 그렇게 하나 둘 늘기 시작한 직원들은 대부분 영어도 짧기만한 한인 1세대들로 채워졌다. 시간당 10불에 불과한 직장이었지만 그들은 9투6로 정식으로 일하는 회사에 감사하며 정말 열심히 일했다. 보수는 작았지만 회사도 오버타임은 정확하게 계산해 주었고, 직원수가 10명 이상으로 늘어나자 산재보험, 의료보험도 적용했다. 그럴수록 직원들은 더 신이 났다.


회사가 커지고 매출이 올라가자, 간부들도 채용되었는데 대부분 1.5세로 교회나 주변사람들의 소개나 알음으로 연결되어 부사장이나 이사자격으로 들어왔다. 예일이나 컬럼비아를 나온 친구들도 있었는데, 한국말을 잘 하지는 못해도 알아들을 수는 있어서 한국말과 영어를 섞어 하면서도 의사소통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화이저나 노바티스 같은 제약회사가 고객인 미국회사에서 백인들을 채용하지 않을 수는 없었으므로 날이 갈수록 미국인들은 늘어났다. 물론 인도, 중국, 터키, 포루투갈 등 다른 이민자들도 있었다. 인력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분야는 다큐멘트 스페셜리스트라고 불리는 메디칼 서류를 다루는 부서이었지만, 시간당 12불로 시작하는 낮은 보수로 한인들이 과반을 넘었고 다른 인종은 이직이 잦았다. 영어가 짧은 데도 취업의 기회를 준 회사에게 고마워하며 한인들은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섞이면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비교가 되었던 것이다. 한인들은 보기에 일도 못하고 무능하기만 한 백인들을 무시했고, 백인들은 한인들이 특별대우를 받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회사는 미국에 있는 미국회사로 당연할 수 밖에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어가 딸리는 한인들이 설 자리는 능력과는 별개로 점점 좁아졌다. 그들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 즉 자신의 주위에 울타리를 치는 것이었다. 일을 하면서 알게 된 '노우하우'를 절대로 남과 공유하지 않았고, 동료들이 일을 하다 막혀도 못 본 체 했다.


소통이 끊긴 회사는 비능률, 비효율화 되었다. 하루에 최소 8천 장을 취급했던 생산성이 5천 장, 3천 장 이하로 떨어져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고, 책임지는 사람도 없었다. 컴퓨터로 하면 한 두 시간이면 끝날 일을 밤새워 하는 것도 본 적이 있었다. 일관성이 없이 피부색과 언어, 정실(favoritism)로 이루어지는 승진과 보수는 충성도를 떨어뜨리고, 새로 들어온 사람은 들어오자마자 다른 직장을 찾았다. 언어문제가 없는 1.5세들도 하나 둘 스스로 떠났고, 영어가 짧은 1세들만 요령만 배워 살아 남았다.


회사에서도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점심시간에 영어를 배울 수 있도록 강사를 초빙해 교육을 시키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장점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도 있었지만, 그 대신 사람들을 바꾸려고 했다. 초기에는 회사의 가장 큰 장점이었던 한인들이, 그 장점을 살리지 못하자 단점이 되었고 금융위기가 오자 급격히 동력을 잃어갔다. 회사가 적자를 내자 비용을 줄이기 위해 구조조정을 결정했고, 누군가에게는 평소 주인의식을 갖고 비판적인 발언을 했던 - 충성도가 없으면 비판도 없다 - 사람들을 내보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뛰어난 한 사람이 이민자들에게 많은 일자리 기회를 제공했고, 취업의 기회를 준 이민자들은 열성을 다해 일하므로써 그 은혜에 보답하여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었다. 몇 달간을 매일같이 하루에 15시간을 일했던 적도 있었다. 물론 다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1.5세들 몇몇은 눈치껏 요령도 부리고 농땡이도 쳤지만, 대부분 신이 나서 일했고 자기 일 처럼 주인의식을 갖고 죽고살기로 일했다. 10명이던 회사가 100명이 되고 200백명이 되었고, 연매출도 백만 불에서 천만 불이 넘어 승승장구했다. 일년에 세 배씩 성장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경제위기가 왔을 때, 그동안 회사를 성장시켰던 장점이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후기>

준비없이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쓰니, 원래 목적과는 다른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결론은 뛰어난 한 사람이 많은 이민자들에게 직업을 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일을 배운 1.5세들이 지금은 곳곳에 흩어져 많은 제약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제 딸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대학을 중도에 그만 둔 아이를 제가 그 회사에 넣었고, 거기서 일을 배우고 경력을 쌓아 지금은 세계적인 제약회사에 다니고 있으니까요.


회사에 다닐 때, 사무실에서 한국말을 쓰다가 부사장 직책의 보스에게 지적도 많이 당했습니다. 회사에서는 한국말 쓰지 말라는 거지요. 참 별 떨거지 같은 친구였지요. 영어보다는 한국말이 훨씬 편한 사람이 한국사람에게 이야기 하는 데도 한국말을 쓰지 말라니! ㅎㅎㅎ 결국 그 친구가 나를 짤랐지만 말입니다.


BA(Business Administration)에도 매니저가 한국 아주머니였습니다. 회사 초창기부터 참여했던 분으로 미국으로 동포에게 시집을 온 분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영어를 꽤 잘했습니다. 그러나 네이티브 스피커들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업무상 영업부서(대부분 백인)와 많은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데, 이들이 많은 불평을 한다고 하더군요. 말할 땐 '예스'라고 하고는 실제로는 다르게 한다는 겁니다. 즉 출장비용에 호텔에서 본 영화(Pay per view)를 포함해주기로 하고는 개인 엔터테인먼트라고 빼버린다는 거지요. 백인들 이런 것에 대단히 민감하거든요.


나중에 들으니 그 아주머니 쓰러져서 큰 심장수술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아마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영어 짧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써야 하는 그런 상황에서 얼마나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았겠습니까!


이제 팔렸으니 영어가 짧은 이민자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회사가 되어버렸겠지요. 하긴 영어가 안 되는 사람은 사실 뽑지 않은 건 훨씬 전부터 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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