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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이민자의 직업 (2)

(2012년 9월 1일)

 

- 한인들이 지난 20년 동안 네일가게로 잘 벌어먹고 살았는데, 그것도 이젠 끝났어. 경쟁도 경쟁이지만, 중국사람 월남사람들을 당해낼 수가 없어. 월남사람들은 손재주도 얼마나 좋은지 몰라. 지금은 고급화로 겨우겨우 지탱해 나가고 있긴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가겠어!


- 무언가 다른 비즈니스를 개척해야 하는데. 앞으로 10년, 20년 한인들이 먹고 살만한 것 없을까?


- 시체 화장 어때? 여기 장례식에 가면 뷰잉을 하잖아! 그때 보면 송장들을 살아있는 것 처럼 예쁘게 화장 시키잖아! 한국사람들 손재주로 그걸 하면 미국사람들 따라올 수 없을 거야. 그쪽에 진출한 한인들도 별로 없잖아!


- 아이, 그래도 그렇지! 무서워서 어떻게 시체를 만지냐? 아무리 돈 많이 준다고 해도 그건 못하겠다.


자매님들도 모이면 자기들 직업 이야기 수다로 시끌벅썩하다. 남자들 틈에서 소주잔이나 빨며, 관심도 없는 세탁소 이야기, 골프이야기를 듣다가 지겨워, 자매님들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본다.


나는 세탁소도 모르지만, 네일가게는 더 모른다. 그저 손톱을 다듬는다는 것 정도이었는데, 이민 초창기 와이프가 심심풀이 한다고 이웃의 소개로 네일가게를 나간 적이 있었다. 3일 정도 나가더니 죽어도 그짓은 못하겠다고 그만 두었다. 화학약품 냄새에다가, 그라인더로 손톱을 갈아대니 손톱가루가 눈앞에서 날리기도 하지만, 발을 닦아주는 일은 정말 못하겠다는 거다.


내가 아는 많은 한인들이 네일가게로 가정을 꾸리기도 하고, 부인이 종업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한 친구는 자기 와이프가 하루에 일당이 백 불이고 팁이 오십 불로 $150불을 가져온다고 했다. 일주일에 5일 일하니까 한 달에 캐쉬로 3천 불을 버니까 월급쟁이로 치면 연봉 6만 불의 수입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화학약품 알러지로 고생하면서도 캐쉬 만지는 재미에 그만 두지 못하다가 몇 년 전에는 결국 알러지가 너무 심해져 그만 두고 말았다.


한국에 살았을 때는 네일가게라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지만, 지금은 한국에도 강남같은 곳에는 네일가게가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 들어온 모양인데, 미국에서 네일가게는 한국인이 시작했다는 설도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주한 미군과 결혼해서 온 여자 분들이 미국에서 이혼 당하자, 먹고 살기 위해서 네일가게를 시작했다는 것이 기원이라고 누군가에게서 들은 기억이 있다. 그 분들이 한국에서 했던 게 손톱 다듬는 일이었으니 그것 밖에 할 게 없었을 거라고 누가 상상하여, 낭설을 지어냈을 수도 있을 거다.


그곳에 살면서 알게 된 어떤 친구는 2천 년 초반, 부인이 네일가게로 돈을 많이 벌어 아예 가게가 있는 건물을 사고 '샷더맨' 노릇을 한다. 아침에 샷더를 올려 문을 열고, 영업준비를 해 준 후, 골프 치러가거나 인터넷으로 주식 데이 트레이딩을 한다고 들었다. 뉴저지를 떠나기 전에 들었던 소문으로는 골프가 싱글 실력으로 내기골프 아니면 안 친다고도 했다. 그 친구는 옛날에 나와 비슷하게 세자리 수를 넘나들던 실력이었는데......


- 발 닦아요! 아빠, 미국사람들 발이 얼마나 지저분한지 아세요? 어떤 흑인들은 발에 허옇게 곰팡이 같은 것도 있어요! 발가락도 짓뭉게져 있기도 해요. 큰 몸집에 높은 하이힐을 신고 다니잖아요.


딸 아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용돈을 번다며 네일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주인 여자가 데려가고 데려오고 했지만, 가끔 내게 라이드를 부탁하곤 했는데 아이를 태워다 주면서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왔지만, 꾹 눌러 참았다. '천사같은 내 아이들이 얘네들 발이나 닦아주고 있다니! 그러나 이 험한 세상 살아가려면, 그런 일 해보는 것도 네 인생에 나쁘지만은 않을 거다!'


네일가게 창업에는 돈이 별로 들지 않았다. 90년 대 까지만 해도 3~4만 불 정도 들었다고 한다. 그러니 기술만 있으면 누구나 차릴 수 있던 비즈니스였다. 사촌이 땅 사면 배가 아픈 한인들의 속성상, 잘 되는 가게가 있으면 바로 옆에 누군가가 차리고, 더 좋은 설비 더 좋은 서비스로 무장하여 경쟁을 한다. '너 죽고 나 살자'가 '너도 죽고 나도 죽자'가 된다. 가게에서 일하던 매니저가 손님 리스트를 빼내서 2~30 야드 근방에 차려서 큰싸움이 나기도 한다. 한때 살았던 46번 도로와 53번 도로가 만나는 근방에는 몇 백 야드 안에 네일가게 6곳과 세탁소 5곳이 있었다. 슬픈 현실이지만 다 한인들이 하는 가게다.


이웃에 살아 알게 된 친구 하나는 자기가 하는 세탁소 옆 가게가 비자, 임대를 내 네일가게를 차렸다. 자기 와이프가 다른 네일가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주인으로 앉힌 것이다. 바로 길 건너에는 다른 아줌마가 하는 네일가게가 있었다. 8만 불이나 들여, 의자 하나에 천 불이 넘는 최신식 설비를 들여 놓았다. 앞집보다 훨씬 좋아야 기존의 손님을 뺏어올 테니까. 일 년 쯤 후에 그 가게를 15만 불에 팔아 치웠고, 쉽게 돈 벌었다고 내게 자랑을 늘어 놓았었다.


어떤 세탁소 주인은 길 건너 가게가 비어 렌트로 나오자, 자기가 임대해서 또 다른 세탁소를 차렸다. 다른 사람이 그곳에 세탁소를 차릴까 겁이 난 것이었다. 한 달에 몇 만 불씩 벌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들어와 세탁소를 차리면 자기 수입은 반토막이 날 게 틀림없으니, 차라리 임대료를 더 내는 게 낫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한 것이다. 한인들이 같은 한인들을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다.


한때, 나도 열심히 비즈니스를 알아 본 적이 있었다. 언어문제 등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한인들이 모여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질 수록 비즈니스 가격도 싸고 장사도 잘 되는 것으로 보였다. 즉, 뉴저지에서는 한인들이 많이 사는 팔리세이드 팍에서 출퇴근 거리에 해당하는 지역은 비즈니스를 찾기도 힘들었고, 있어도 비쌌다.


경제위기로 가장 타격을 받은 것이 한인들이 주로 하는 비즈니스인 것은 쉽게 상상이 간다. 개스 값이나 모기지나 먹는 것을 줄이는 것은 쉽지 않다. 내가 직접 세탁하고 내가 직접 손톱 다듬는 것은 쉽다.


<후기>

틀리는 이야기도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냥 내 눈으로 목격하고 주워들은 풍월을 글로 옮겨보고 있습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냉철하게 분석하는 것도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입니다만, 왜곡된 내용이 있을까봐 살짝 걱정이 되긴 합니다.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면 서슴치 마시고 의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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