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성폭력 사회

(2012년 9월 20일)

 

- 만나는 여자가 있기는 해. 그런데 유부녀야. 불쌍한 사람이지. 미인이야, 임마!


놈은 내 고등학교 친구 중에서도 요즘 말로 절친이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그랬던 것 처럼, 가난하고 별로 화목하지도 않은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는 공통점이 많았고, 학창시절에는 늘 붙어다녔다. 이류 고등학교에서 공부 외에는 별 재주가 없던 나와는 달리, 이 친구는 운동이면 운동, 기타나 노래까지 재주가 많은 탓에 친구들 사이에서는 꽤나 인기가 있던 친구였다.


우여곡절 끝에 1980년에 원주의 하사관 학교에서 제대 후 이민을 떠났었다.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1.5세를 만나 결혼했지만, 6개월만에 끝나고 말았다. 놈의 변명은 중학교 때 이민온 젊은 여자는 한국의 나쁜 점과 미국의 나쁜 점만을 고루 갖고 있었다고 했다. 당시 CPA로 경제력이 있었던 여자는 대학원에 다니고 있던 놈을 경제력으로 치졸하게 압박했다는 거다.


지금은 결혼해서 어린 아들을 두고 있지만, 15년 전에는 40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정부에 속한 연구소 프로그래머로 혼자 살고 있었다. 뉴저지 가는 길에 콜로라도에 사는 놈을 방문한 자리였다. 1.7 리터 '크라운 로얄' 한 병이 반도 안 남게 비어갔다. 야, 이 자식아! 어떻게든 결혼해서 살아야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떻게 지내냐? 먹고 사는 것은 그렇다 쳐도 본능은 해결해야 할 것 아냐! 맨날 손가락 신세만 지냐, 이 새꺄!


술이 오르자 말투는 거칠어지기 시작했고,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가 반가운 녀석은 대답하고 있었다.


- 백인하고 사는 여자야. 아이가 둘이지. 기구한 운명을 가진 여자야. 고등학생 때 강간을 당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그 상대가 누구였는지 아니? 큰집 사촌 오빠라는 거야.


- 아버지가 어릴 때, 사고로 일찍 돌아가셨다더군. 해마다 제사를 지내는데, 제삿날에는 큰집에서 왔었나봐. 그 날도 제삿날인데 큰아버지와 대학에 갓 입학한 사촌오빠가 같이 왔었데. 제사는 보통 자정에 지내잖아. 자기 엄마와 같이 제사상에 올릴 음식도 준비했겠다, 제사가 끝난 뒤 얼마나 피곤했겠어. 깊이 잠들었는데, 가슴이 답답해서 눈을 떠보니 오빠라는 놈이 덮치고 있었던 거야.


- 오빠라는 그 새끼는 공부도 잘해서 Y대에 다니고 있었데. 지금도 잘 나간다고 하더라. 세상에서 딱 세 사람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군. 자기와 그 놈, 그리고 자기 엄마. 자기 엄마가 울면서 이야기 했다고 하더라. 미친 개에 물린 셈 쳐라. 너는 죽어도 한국놈 만나지 마라. 한국에서 살지도 말라, 어떻게든 미국사람 만나 결혼해서 미국에서 살아라, 그랬다는 거지, 에휴.


충격적인 이야기에 평소보다 많이 마셨지만 술이 깨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엄마의 뜻대로 그렇게 미국에서 살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친구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촛점없이 허공을 응시하며, 친구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 야, 이런 일도 있었다! 언젠가 같이 저녁을 먹고 들어와서 같이 잤어. 잠시 누워있었는데, 가야겠다고 일어나서 옷을 입는 거야. 그래서 내가 물었어. 샤워 안 하냐고? 그랬더니 뭐라고 하는 줄 알어! 그냥 가겠다는 거야. 언제 또 만날지 모르는데 샤워하면 내 체취가 지워질 거 아니냐면서. 기가 막히지 않니?


- 한국사람이잖아! 한국사람이 그리운 거야. 그런 걸 느껴. 우리는 알아, 얼마 가지 못할 관계라는 거. 그래서 서로 부담은 없어. 야, 쓸데없는 이야기 그만 하고 술이나 마시자! 모처럼 만났는데 분위기 이상해진다.


자기 엄마의 뜻대로 살고 있지만, 불행한 과거를 지닌 그 여성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어디선가 읽은 기사가 생각났다. 한국이 세계적으로 성폭력이 많은 나라라고 기사였는데, 한국의 정서상, 피해자가 감추는 바람에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알게 모르게 성폭력이 심하다고 기사는 주장했다. 그것도 대부분 친인척 등 지인에 의해서 발생하기 때문에 더 감추어지고 있다고 기사는 전했다.


<후기>

최근에 성폭행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어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제주의 올렛길을 찾았다가 참변을 당한 30대 주부부터 7살 어린아이까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불행한 이웃이 당하는 참혹한 사건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생각해 봅니다. 창피하고 수치스럽기 때문에 감추고, 친인척 관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감추고, 그래서 짐승같은 인간들이 활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시사잡지에서 읽었습니다. 지난 군사독재 시절에 정책적으로 술과 성(性)에 대해서는 관대한 문화를 형성했다는 겁니다. 사회를 억압하는 대신 탈출구를 만들어야 했다는 거지요. 고등학교 동기 중에 하나는 평소에는 얌전하지만, 술만 취하면 황소가 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1970년대 대학 근처에 있는 파출소를 몇 번 때려 부셨는데도 멀쩡하게 풀려 나오곤 했습니다. 유신시절에 대학생은 데모만 하지 않으면 대충 용서가 되는, 술에 관대한 문화 때문이었겠지요.


최근까지도 술김이라고 이야기하면, 죄를 가볍게 처벌 받았다고 합니다. 폭행을 하고 심지어는 강간이라는 짐승 짓을 했어도. 군사독재에서 물려받은 문화가 인간의 모습을 한 그런 짐승들을 같은 공기를 마시고 숨쉴 수 있도록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 폐지를 잔뜩 실은 손수레를 밀고가는 노인의 뒷모습에 삶의 고달픔이 그대로 전해져 옵니다.


- 이곳은 언덕길입니다. 이 사진을 찍고 얼른 쫓아가서 뒤에서 밀어주었습니다. 조금 올라가다 옆골목으로 들어서면서 손수레 손잡이에 앉아 쉬더군요. 이제는 평지라 괜찮다고 하면서. 헐떡이는 왜소한 노인의 손에 몇푼을 꺼내 쥐어주었습니다. 손사레를 치는 노인에게 연신 미안하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왜 그렇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