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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한국이 좋으십니까? (2)

(2012년 10월 8일에 작상한 글)

 

대구 MBC 창사특집으로 지난 9월 27일과 28일에 방영한 '독일 경상도 사람들'이란 프로를 보았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14년 동안 광부로 또는 간호원으로 독일로 간 분들 중에 특히 경상도 출신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어느 분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박정희 정권때 일종의 특혜가 아니었나 하는 말씀이 있어서 속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웃고 말았다.)


단순하게 광부나 간호원의 일을 했다고 피상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고생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지하 천 미터를 내려간 갱도는 40℃ 이상에 95%의 습도이었다고 한다. 벌거벗고 일해도 장화에 땀이 가득차서 가끔씩 벗어서 거꾸로 들고 쏟았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간호사도 보통 알고 있는 간호사의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대소변 처리는 물론이고 목욕도 시켜주는 일까지 해야 했다고 전했다. 당시의 왜소했던 한국인으로서 서양인에 맞게 만들어진 공구를 다루고, 덩치 큰 환자를 다루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이 다큐는 6~70년대 한국의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달동네 판자촌을 흑백화면으로 보이며 시작한다. 대부분 70세 전후의 은퇴하신 분들의 이야기로, 고국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했다. 그중 한 분의 이야기가 실감이 난다.


- 나는 오랫동안 노인들 병원에서 근무했어요. 치매걸린 환자들이 많았는데, 그 분들은 옛날 기억만 남아 있어요. 노래도 어렸을 때나 젊었을 때 알았던 노래만 부르지요. 그래서 나는 치매가 걸리기 전에, 꼭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해요. 치매에 걸려 독일말은 다 까먹고, 병원에서 한국말만 해봐요! 어떻게 되겠어요?


처음 들어보는 내용이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모친도 치매로 몇 년을 앓았다. 목사님이었던 당신 친정조카가 욕심을 부려 교회를 짓는 일에 은행담보로 제공했다가, 때마침 닥친 IMF로 당신이 모은 평생재산이 날아가는 바람에 그 충격으로 치매가 왔다. 금쪽같았던 당신의 아들도 알아보지 못했다. 나를 한국전쟁 때 죽은 당신의 전남편 순경으로 착각하고 엉뚱한 말을 하곤 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지만, 부모가 부끄럽고 창피하다고 부모를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고국도 부모와 같은 의미가 아닐까!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갖가지 이유로 떠났던 고국으로 돌아오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떠났던 이유만큼 돌아오려는 이유는 많지 않아 보인다. 도저히 돌아올 이유가 없어 보이는 75세 박장로님의 말 한마디가 그 답일지 모른다. "난, 그냥 여기가 편해!"


라디오 코리아의 김 PD가 물었다. 한국에 살면서 장점은 무엇이라고 보나? 그리고 앞으로 꿈이 있다면?


- 미국에서의 단점이 여기서는 장점이다. 생활비가 적게 드는 것이 일단 내게는 가장 중요하다. 미국에서는 벌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 아니냐? 뉴저지에서 비슷한 크기의 콘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재산세가 $3,800 이었다. 여기는 $100 정도다. 까먹고 살아도 큰 부담은 없다. 그러니 마음이 편하다. 앞으로 살면서 럭비공같은 마음이 또 어디로 튈지는 모르겠지만, 최근에 지금처럼 마음이 편한 적이 없었다. 


- 아이들이 마음에 걸리지만, 어차피 나도 그 나이 때는 부모가 더 이상 필요 없었으니 그렇게 스스로 위안하고 있다. 또 언어로 인한 스트레스도 없다. 미국에서는 관공서나 공무원 상대할 일이 있을 때,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나? DMV에 가서 일보는 것도 하루종일 걸리고, 이곳에서는 웬만한 일이면 30분도 걸리지 않는다. 모든 곳이 가까워서 편리하고.


- 처음에 돌아올 때는 5년이나 10년 정도 살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었다. 401K를 페널티 없이 수령할 수 있는 나이가 되려면 5년, 소셜을 받을 수 있는 나이 65세까지 10년, 그렇게 꼼수를 부린 것이었는데, 현재로서는 다시 돌아갈 것 같지 않다. 2년에 한 번씩은 미국에도 들리려고 했었는데, 마음이 편해지니 몸이 게을러진 탓인지 그것도 귀찮아서 못하겠다. 다행히, 아이들이 돌아가며 내게 들려주고, 또 아이들이 결혼할 때는 어차피 가야할 것이니 그 때나 방문할 것 같다.


- 꿈이라……, 꿈이 있기는 있다.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지만 일단 머리 속으로 구상하는 계획은 있다. 세상에는 성공한 사람만 있지 않듯이, 이민자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유로 이민을 택했는지 모르지만, 고국을 떠나 남의 땅에까지 가서 어렵게 사시는 분들도 많다. LA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 우리를 부러운 눈초리로 보던 노인 분들의 눈길을 잊을 수가 없다. 돌아오고 싶어도 가진 게 없어서 돌아오지 못하는 분들, 단 10만불만 있어도 돌아오시겠다고 하는 분들...


- 웰페어를 받으시는 분들은 할 수 없지만, 소셜을 받으시는 분들은 가능할 수도 있다. 잘은 모르지만, 듣기에 소셜을 받는 분들의 대부분이 천 이삼 백 불이라고 들었다. 그 정도면 한국에서 여생을 보내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구상하고 있다. 내가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독지가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도청과 협의하여 기본계획서를 만들어 볼 생각이다.


- 즉, 교포를 위한 렌트타운을 생각하고 있다. 전에 은퇴에 관심이 있어서 자료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MSNBC에서 은퇴자금이 부족하면 서로 셰어하면 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자동차가 집집마다 필요한 것도 아니고, 여분의 방이 모두에게 필요한 것도 아니다.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땅값이 싼 곳을 구해서, 몇 백 가구의 렌트타운을 조성하는 것이다. 소일거리를 할 수 있게 과수원이나 농장을 곁들일 수도 있다. 1~20 가구 마다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마을회관도 운영할 수 있다.


- 한국의 지방자치단체는 인구를 유입시키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의왕시에서 추진하는 교포타운은 그린벨트까지 해제해서 진행한다고 하지 않느냐? 문제는 4~50만 불로 너무 비싸서 그렇지. 재정적으로 그렇게 여유가 있는 분들은 그곳으로 가면 되지만, 단 돈 십만불도 없는 분들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지금까지 여러 곳에서 해외동포를 유치하기 위한 사업을 했는데 다 실패했다고 들었다.


- 미국 시민권자가 수백명 모여사는 곳이 조성된다면, 여러모로 레버리지도 생길 수 있다. 아직은 실현 가능성은 없어, 머리 속으로 구상만 하고 있지만, 고국에 대한 향수로 가득한 그 애잔한 눈빛들이 떠오를 때면, 실현되었으면 좋겠다는 강렬한 욕구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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