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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단풍회상

(2012년 10월 31일에 작성한 글)

 

한국에서는 설악의 단풍을 최고로 쳐도 될 것이다. 내장산의 단풍도 유명하고 지리산의 단풍도 좋지만, 내가 본 것 중에서는 설악의 단풍이 최고였다. 몇 년 전인지 기억도 없지만, 20년도 훨씬 더 되었을 것 같다. 내가 다니던 회사의 산악회에서 1박 2일 설악산 가을 산행을 갔었다. 토요일도 일하던 시절이었으니까 토요일 오후에 대절한 관광버스를 타고 오색약수에 도착해서 1박을 한 후, 새벽 4시도 전에 일어나, 간밤에 여직원들이 만든 김밥을 배급받아 출발했다.


컴컴한 새벽에 후래쉬 하나 들고 대청봉을 향해 좁은 산길을 오르는데, 그 시간에도 이미 얼마나 사람이 많은지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밀려서 올라가고 있었다. 설악폭포에 이르렀을 때쯤 되서야 날이 밝기 시작했고, 대청봉에 올랐을 때도 아직 오전이었다. 거기서 백담사로 향하는 도중에 봉정암이라는 암자를 만났는데, 그곳에서 바라본 설악산 단풍은 그야말로 인간의 세상이 아닌 듯 보였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붉고 노란 색뿐이었다. 갈 길이 멀다고 재촉하는 동료들의 말도 무시한 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눈 아래 펼쳐진 장관을 마냥 바라보고 있었다.


- 이 사진은 인터넷에서 찾은 것이지만, 인터넷에서 본 어떤 사진도 그 때 본 황홀함을 표현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필설로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답다!'고 하는 표현은 아마 그럴 때 사용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황홀한 광경은 너무나 강렬해서 항상 기억에 남았고, 단풍이야기가 나올 때는 언제나 그 때의 광경을 떠올렸다. 그 강렬했던 경험을 잊지 못해 그 후에도 두어 번 설악을 찾았지만, 다시는 그 때의 절경을 다시 감상하지는 못했다.


한 번은 회사의 높은 분과 식사를 하다가, 대화 중에 설악산 단풍을 이야기 했더니 그 분은 미국 동북부의 단풍에 비하면 설악산 단풍은 아무 것도 아니란 식으로 이야기했다. 버몬트에서 뉴햄프셔로 이어지는 단풍이야말로 그 규모나 화려함에 있어 대단하다고 하니 가보지 못한 나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가보리라고 생각했다.


뉴저지에 살면서 가을에 버몬트와 뉴햄프셔를 가보겠다고 별렀던 것도 그 이야기의 진위를 내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서였다. '아니 내가 본 설악산 단풍보다 더 멋있는 곳이 있단 말이지……'


9월 말 아니면 10월 초이었던 것 같다, 혼다 오딧세이에 여행가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억지로 싣고 버몬트로 향했던 것이. 물론 뉴스에서 전하는 Foliage 소식을 참고했다. 버몬트 산 속을 이리저리 누비고, 투덜거리는 아이들을 달래서 트레일도 했지만, 설악산 단풍에 버금가는 것도 보지 못했다. 뉴햄프셔에서는 미 동북부 최고봉이라는 마운틴 워싱턴까지 차로 올라갔지만 실망만 안고 돌아왔었다.


황홀한 지경의 단풍을 본 곳은 의외의 장소였다. 뉴저지 브릿지워터에 살 땐데, 토요일에 가끔 가는 산이 있었다. 서머셋 카운티의 카운티 팍인 Sourland Mountain Park 이었다. 가장 긴 코스로 하이킹을 하면 걷는 속도에 따라 2~3시간 정도 걸리는 산이었다. 한적한 가을 날 아무 생각없이 홀로 하이킹을 시작했는데, 산에 오르기 시작하자 이곳 저곳에서 삼각대에 카메라를 꽂고 렌즈를 들여다 사람들이 눈에 뜨였다. 물론 붉고 노란색 - 주로 노란색 - 단풍들이 산에 가득하긴 했지만, 그리 놀라운 광경은 아니었기에, 무얼 찍겠다고 저러나 싶었다.


그런데, 순간, 바람이 한 줄기 숲속을 휘돌았다. 그 순간, 눈 앞에는 절경이 펼쳐졌다. 그리 굵지 않은 온갖 나무들이 나무잎을 떨궈내기 시작하는 것이었고, 그 순간 눈에 들어오는 허공은 온통 노란색으로 가득 찼다. 수 초 사이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온 세상이 정지하고 있는 느낌이었고, 온몸의 감각을 전율케하는 오르가즘이었다.


기대가 크면 만족하기 힘들다고 한다. 법정은 마음을 비우라고 가르쳤다. 모든 중생에게 생각을 버리면 행복하다고 말했다. 남의 말에 현혹되지 말고 스스로의 경험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행복을 느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스님의 법문을 털 끝만큼이라도 이해할 것 같다.


이 가을이 다하기 전에 한라산이라도 올라 볼까! 

그리고 내년에는 아무 생각하지 말고 설악이나 다시 한 번 찾아가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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