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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한바탕 잘 놀았습니다!

(2012년 11월 17일에 쓴 글)

 

○ 옛날 직장동료나 내 친구들을 봐도 그냥 한 자리에 계속 있었던 사람들이 다 잘 된 것 같아요, 우리 세대는. 제주를 떠난 사람들도 마찬가지라, 그냥 제주 토박이로 산 분들은 고향에서 터잡고 웬만큼 잘 사는데, 외지로 가서 사업한답시고 떠났던 사람들은, 잘 안 되서 제주로 다시 돌아오는 분들이 많아요. 년 전에 옛 직장동료를 만났더니 그러더군요, 내가 그냥 있었다면 최소 처장은 하지 않았겠냐고. 물론 나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겠지만.


30년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오겠다는 말을 사촌매제로부터 들었을 때, 위로의 말이라도 하고 싶어서 한 말이었다.


- 형님이나 나나 한바탕 잘 놀았다고 생각하면 되지요! 제주에서 태어나 미국이라는 넓은 땅에 가서 실컷 잘 놀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요. 후회는 없습니다. 이제 돌아와서 살 생각이나 해야지요.


처음에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비즈니스가 잘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은 있으니까 생활비는 벌 수 있다고 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몇 백 불씩 생활비가 빵꾸나다 보니까, 또 판단 미스로 그게 몇 년 계속 되다 보니까 많이 까먹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맞춰 살면 된다고 했다. 그러다 보면 다시 경기가 좋아지지 않겠느냐는 말도 했다. 페인트만 했으면 괜찮았는데, 종합건축면허를 갖고 크게 벌인 것이 경제위기와 맞물리면서 패인이 되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동문시장에서 그의 모친을 보았을 때, 모친의 표정이 무척 밝았다. 비록 부친상을 당해 온 아들이지만, 당신의 아들이 곁에 두고 있는 것이 행복한 모양이었다. 냉장고에 술이 있으니 손님을 데리고 가서 마시라고 했다. 저녁도 차려놓았다고 했다. 노모의 간곡한 당부가 쉰 여섯 살의 아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 30년이나 제주를 떠나 있었으니, 저는 외지인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내년에 돌아와서 조용히 살면서 친구들을 만날 생각입니다. 무조건 미안하다고 해야겠지요. 제주에서 태어난 제주사람이지만 제주를 위해서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최소 1년 동안은 그러고 지내야 할 겁니다. 그리고 나서 무슨 일이라도 해야겠지요.


고향을 떠난 것이 '죄'라는 생각이다. 물론 나도 모르는 그만의 사정이 있겠지만. 재혼으로 늦게 본 딸이 열 두살로 이제 중학생이 되었다. 자식들이 다 성장한 나와는 달리, 돌보아야 할 어린 아이가 있으니 형제들이 있는 제주로 돌아온다 해도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자신이 손해를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착한 심성(?)의 소유자다. 그간의 마음고생과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상한 이를 다 뽑고 틀니를 하고는, 지난 주말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내년 봄에는 아주 돌아올 것이다, 30년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그나 나나 다시 미국에 돌아가 살게 될지는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운명이 시키는 대로 할 뿐.


다시 찾게 되는 고향에서 영혼이 평안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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