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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역이민(역거주)에 꼭 필요한 정보모음

역이민에 적합한 사람들 - 하나

(2013년 3월 28일에 쓴 글)

 

내 경우는 무슨 계획을 하고 한국에 나온 것이 아니었다. 평생 직장생활만 한 사람으로서 경제위기 때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가 해고되고 당혹감 속에서 몇 차례 실패를 거듭한 이후, 이렇게 힘들게 사느니 차라리 한국에서 덜 쓰고 마음 편히 사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했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게 된 동기와 계기가 있긴 했지만, 거의 애드혹(ad hoc)에 가까운 결정이었다.

 

그렇게 돌아왔으니, 시행착오가 없을 수 없었다. 집을 구하는 문제부터 모든 것이 듣고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틀렸다. 어떤 동네에 사는 것이 좋은지 충분한 검토 없이, 정착자금으로 계획한 금액을 초과하지 않는 선에서 그것도 다급하게 - 이삿짐이 이미 부산항에 도착하였기에 - 구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마켓에 나온 집들도 별로 없어서 고르고 말고 할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예산을 훨씬 넘었지만 깔끔한 아파트가 나와서 계약을 하려고 복덕방에 갔으나 주인이 안 팔겠다고 거둬 들였다. - 한국은 이런 게 가능했다. 당시에는 집값이 오르고 있는 탓이 컷을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30분 늦게 본 사람과 경쟁이 붙는 바람에 입심 좋은 와이프가 기껏 깍아놓은 2백만 원을 도로 다 주고 구입했다. 한국 상도덕상 먼저 본 구매자가 구매의사를 보이면 나중 사람은 물러나는 게 정상이라는데, 내 경우는 미국이 좋은 것은 한국식으로, 한국이 좋은 것은 미국식이었으니 참 더럽게도(?) 운도 없었던 셈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지난 몇 년을 회상해 본다. 제주를 선택할 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윗 동서이었다. 49년생인 동서는 은퇴 후, 이미 5년 전에 대도시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에 내려와 살고 있었는데, 제주가 살기 좋다며 여러가지 장점을 언급했지만 조기은퇴하여 수입이 없었던 내게 가장 마음을 끄는 것은 생활비가 적게 든다는 것이었다. (제 글 '좋은 점, 나쁜 점' 참조. 한국살기, 3/2/2011)

 

그 전에 인간극장이라는 프로에서 '날마다 소풍, 적게 벌어 행복하게 사는 법(2010년 8월 2일 ~ 8월 6일 방송)'을 본 것이 귀국을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30대 젊은 부부가 대도시의 삶을 포기하고, 제주 서귀포의 한적한 동네에 정착해서 평화롭게 산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LA에서 참담한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었는데, 그 프로를 보고나서 마음을 고쳐 먹게 되었다. (혹 보고 싶은 분들은 http://www.youtube.com/watch?v=t_jM6b6-X1g, http://www.youtube.com/watch?v=yTHsO9syXV8에서 볼 수 있습니다.)

 

- 나는 지나친 욕심덩어리 아닌가? 저렇게 젊은 친구도 욕심을 다 버리고 최소한의 수입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선택한 가난을 살고 있는데, 내 욕심은 지나치지 않은가? 아이들도 다 성장해서 제 밥벌이를 하고 있고, 건강하고 빚도 없을 뿐더러 풍족할 수는 없어도 검소하게 산다면 별 걱정없이 살 만큼은 아직 가지고 있는데, 뭘 그리 낙담하고 내일을 걱정하고 있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며, 내가 가진 장점과 단점들을 종이에 죽 나열해 보니 장점도 꽤 있었다. 눈 딱 감고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앞에 언급했듯이 결정적인 요소는 적은 생활비였다. 생활(Living)이 아닌 생존(Survival)을 하기 위해 경험하지 않은 일을 새로 배워 고생을 하느니, 선택한 가난으로 소박한 행복을 즐기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 섰다. 물론 적게 벌고 생활비를 줄여 사는 것은 미국에서도 웬만큼 가능하다. 오레건 같은 시골에 가서 살면 되겠지만, 된장냄새 풀풀 나는 토종 한국인이 그런 곳에서의 생활은 솔직이 자신이 없었다.

 

또, 아직은 젊고 건강하니 일하고 싶었지만 지난 30년 세월 처럼 일에 얽매이고 싶지는 않았다. 일 년에 4~5 개월이나 일 주일에 3~4일만 일해서 용돈이나 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제주가 적격이었다. 밀감철이 되면 제주에는 일손이 많이 부족해서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일거리가 있다는 말도 들은 터였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 밖에 나오지 않지만, 그 때는 그렇게 쉽게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했었다. (제 글 '일자리 찾기 경험' 참조. 은퇴생활 11/3/2011)

 

하하, 쓰다보니 처음에 말했던 것 처럼 그렇게 애드혹으로 한 결정은 아닌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이곳에서 찾아오는 분들을 만나보면, 대부분 몇 년 동안 준비해서 오는 분들이니 그런 분들에 비하면 애드혹 결정이 맞기는 맞다.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을 겪으며 제주생활 2년 3개월이 되었다. 그동안 역이민 카페를 개설하고 운영한 탓에 아주 작은 유명세(?)도 탔고, 덕분에 많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고 숱한 사연들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나름대로 어떤 분들이 역이민에 적합한지 어렴풋이 감(?)이 잡힌다. 역이민도 이민과 마찬가지로 돈이 많은 분들이 좋다. 한국의 좋은 곳에 세컨드 하우스를 사놓는 셈 치고, 미국에서 6개월 한국에서 6개월, 왔다갔다 하며 양쪽의 즐거움을 다 누리겠다는 분으로, 이민 1세대로서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분이 있을까 싶다. 그러니 이런 능력을 가진 행복한 분들은 논외로 한다.

 

먼저, '연어의 귀환'족이 있다. 나는 동물적인 귀소본능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연어가 죽을 때가 되면 본능적으로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는 것 처럼, 타국에서 3~40년을 살았어도 한국에 돌아오면 웬지 마음이 푸근하고 이유없이 편안함을 느끼는 분들이다. 제가 만나 본 분으로는 박장로님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분들은 말릴 수 없다. (제 글 '룸메이트 이야기' 참조. 4/18/2012)

 

다음은, 나 같은 경우다. 연금을 수령하기에는 젊고, 그렇다고 미국에서 살려면 가진 게 많지 않으니 생활비를 벌지 않으면 살 수가 없지만, 편안한 월급쟁이로 살아와서 힘든 일을 해본 적이 없고 새로운 일을 찾기에는 나이도 많다. 한마디로 어중간하다. 아이들은 다 컷고, 몇 년만 있으면 연금수령 할 수도 있고, 얼마간의 돈도 있다. 검소한 생활에 따르는 약간의 불편을 기꺼이 감수한다면, 살아가는 데 지장은 없다. 이 약간의 불편(?)이 때로는 스트레스가 되기도 하지만, 그럴 때는 자기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 미국에서 힘들었던 때를 굳이 떠울리며, '난 행복하다'라는 자기암시를 끊임없이 되뇌어야 한다는 뜻이다.

 

일단 돌아온 이상, 여기서 나쁜 것과 거기서 좋은 것을 비교해서는 안 된다. 이곳의 좋은 점과 거기 살 때, 피곤했던 것을 굳이(?) 기억해내야 한다.

 

- 어딜 가도 음식 입에 맞잖아, 어디 가도 언어 문제 없잖아, 관공서에 일 보기가 얼마나 편해, 병원? 여기는 기다리는 일 없어, 병원에 가는 게 이웃에 가는 것 처럼 편해, 대중교통이 얼마나 편한데......

 

- 어디를 가더라도 몇 십 마일 운전해야 되잖아, DMV에 가서 간단한 일 보는데도 반나절은 걸려, 그 경찰 xx는 왜 안 봐주는 거야, 그 인도 여자 말은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네, 젠장, 예약을 하고 갔는데도 어제는 닥터 오피스에서 2시간이나 기다렸어, 어휴, 여기는 왜 이렇게 느려 터져......

 

가끔, 그곳의 좋았던 점과 이곳의 나쁜 점에만 집착하는 분들이 있는데, 참 불행한 분들이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경제생활을 하지 않으면 곤란한 분들에게 한국이 적합한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특히 45세 이상 되신 분들은 그렇다. 호텔에서 유지보수 종사자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이력서를 보냈더니, 나이가 너무 많다고 한다. '김씨', '이씨' 하고 불러야 하는데 나이 많은 사람은 그렇게 부를 수 없다는 게 그들의 말이었다. 듣고 보니 이곳이 한국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전문직이 아니라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그동안의 경험이다.

 

조리사나 목수 같은 기능직은 그래도 일자리가 있는 것 같다. 특히 대도시에 인구가 집중되는 한국의 특성상 변두리에서 찾기가 낫다. 그러나 제주 같은 시골은 보수가 적다. 허드렛 일은 아무래도 여자에게 일자리가 많다.

 

재산이 거의 없는 극빈자는 아무래도 미국이나 캐나다가 한국보다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복지가 빈약한 한국은 돈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곳이다. 국가의 복지 시스템에 의지해서 살아야 한다면 한국은 좋은 곳이 아니다.

 

글이 장황해졌지만, 역이민(혹은 역주거)에 적합한 분을 요약하면 이렇다. (50세 이상인 경우)

 

- 자식이 학교를 졸업해서 독립했거나 없으신 분.

 

- $1,500 이상 연금 수령자의 경우 10만불 이상 캐쉬가 있는 분. 아닌 경우 30만 불 이상 있으신 분으로 웰페어가 아니라 소셜시큐리티 해당자. (순전히 개인 의견임) 

 

<후기>

카페 초창기부터 제 글을 읽으신 분은 아시겠지만, 최근에 오신 분들을 위해 써보았습니다.

특히 최근에 '봄시냇가'님과 'Muse'님이 쓴 글을 보고 답글로 생각을 정리해 보았는데, 제가 지난 2년 살아본 경험을 근거했습니다.

일자리가 필요한 분들은 아무래도 서울 같은 대도시가 나을 테니, 기껏 제주에 살은 제 경험은 별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