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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딸과의 대화

(2012년 4월 6일)

 

- 아빠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이만하면 저희들도 자랐잖아요. 저희 모두 비뚜로 나간 아이도 없고, 다들 착하게 열심히 살고 있으니 저희들 걱정은 마세요.

 

- 사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세요. 반듯하게 자란 저를 보면 아빠가 어떤 분인지 보지 않고도 알겠대요. 아빠 덕분에 저희들이 컸고, 감사하고 있어요.

 

- 저희들은 미국이 좋은 같아요. 미국에서 있게 해주셔서 고마워요.

 

아이가 이야기 하는 것을 아린 가슴으로 듣고만 있었다. 나도 생각이 없었지만, 아이도 속이 좋지 않아서 식사 하나만 시켜서 같이 한술을 뜨고 그릇을 앞에 놓고 사람이 거의 없는 푸드코트에 앉아 있었다. 딸 아이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 제 친구 S는 자기 아빠가 아빠같았으면 하더라구요. 나는 자식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걔 아빠가 부러운데... 사람들은 서로 자기가 갖지 않은 것을 부러워하는 건가 봐요. 저는 무서운 아빠가 너무 싫었는데...


- 왜 공부해야 되는지 확신이 없었어요. 그냥 아무 생각없이 대학에 갔고, 쉬운 과목만 골라서 들었어요. 아빠는 제가 영어는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고등학교까지는 그냥 그랬어요. 학교는 듣기만 해도 웬만큼 따라갈 수 있거든요. 제대로 된 영어는 대학에 가서 하게 되었어요.


- 저만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지면 되요. 이제 미국에 돌아가면 본격적으로 찾아볼 거에요. 지금 다니는 곳도 비젼이 전혀 없는 곳은 아니지만, 너무 작은 회사라 월급을 많이 줄 수 없는 곳이에요. 사장님도 알고 있어요. 제가 다른 곳에 갈 거라는 거. 그렇지만 시간을 제가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으니까 편하긴 해요.


고등학교 졸업 이후 기숙사에 간 이후에는 거의 같이 살지 않은 아이였다.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상황이 겹쳐 떨어져 살았고, 대학에 다닐 때에도 내가 학비를 대준 것은 3년이 채 안 되었다. 자신의 용돈과 나머지 학비는 론을 얻거나 스스로 벌어서 다녔고, 자그마치 8년을 다닌 후에 끝냈다.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했고, 힘들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지만,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내게 하고 있었다. 아이의 눈에 물기가 내린다.


- 중학교 때는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미국 아이들 영어 잘 못하면 상대해주지 않아요. 진도도 따라가기도 힘든데 영어도 잘 못하고, 너무 학교에 가기 싫었어요.


뉴질랜드에 갔던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뉴질랜드에서 2년을 살다 오는 바람에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한국에서 바로 왔으면 아이들이 그렇게 고생하지는 않았을 텐데, 2년을 놀다시피하고 오는 바람에 수학같이 한국아이들이 자신하는 과목까지 쳐졌다. 뉴질랜드에 눌러 살거나, 아니면 한국에서 바로 왔어야했다. 이민도 어려운데 삼민을 했으니 아이들이 얼마나 감당하기 힘들었을까?


쌍동이인 다른 딸 아이는 제약회사에서 컨설턴트로 일하다가 다른 제약회사의 정식직원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연봉은 줄어 7만불을 받지만, 이제는 휴가와 보험, 승진 등 회사의 모든 베네핏을 받게 되었으니 잘 된 일이다.

아들 녀석은 삼성전자 USA에 취직했다고 한다. LG에 있을 때 눈치 보는 게 힘들어서 다시는 한국회사에는 안 다닌다고 하더니, 생각같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6만불로 시작한다니 다행이다.


- 걔가 뭐라는지 알아요? 자기는 1년 안에 승진할 수 있대요. 두고 보래요.


내 머리 속은 수많은 생각들이 뭉게구름처럼 일어나기도 하고 빗물이 되어 흘러내리듯 어떤 생각들은 말이 되어 입 밖으로 흐른다.


그래, 너희는 싹수가 있었다. 겉으로 표현은 안했지만, 어려서부터 '끼'가 있었거든. 더 좋은 부모를 만났다면 지금보다 훨씬 잘 되었을 충분한 자질을 가진 아이들이었지. 너희를은 하늘이 내게 준 가장 큰 축복이었단다.

이제 바라는 오직 한 가지는 너희들이 좋은 배우자를 만나 행복하게 사는 거란다.


내가 왜 너희들에게 엄하게 대했는지, 지금은 많이 후회하고 있다. 그러나 내게도 생각은 있었단다. 아이들은 엄하게 다루지 않으면 버르장머리가 없어진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 버릇은 서너살 때 잡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지. 왠지 아니? 어릴 때 혼나는 것은 크면 기억에 남지 않거든. 그 대신 사랑표현을 많이 하려고 생각했단다. 스킨쉽도 자주 하고.


- 하하하, 아빠! 그게 스킨쉽이에요. 아빠만 스킨쉽이지, 저희들에게는 괴로움이죠.


하하, 그랬구나. 그게 나만의 착각이었구나. 하여튼 나만의 사랑표현이었다. 그리고 너희들에게 어릴 때 추억을 많이 만들어주려고 노력했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어릴 때 추억은 살 수 있는 게 아니잖니? 한국에서는 설악산, 속리산, 태백산, 계룡산에도 아빠가 억지로 데리고 다녔지. 대전 엑스포에도 초창기에 다녀왔었고, 미국에서도 올랜도에 갔었고, 버지니아 비치, 윌리엄스 버그 미국 민속촌, 뉴햄프셔, 버몬트, 캐나다 등 아마 너희들처럼 어릴 때 그렇게 많이 다닌 아이들 많지 않을 거다.


- 맞아요. 제 남자친구도 뉴저지 외에는 어디 가본 적이 별로 없대요. 그런데 그 때는 왜 그렇게 다니는 게 싫었는지 몰라요. 근데, 지금은 좋아요. 뉴질랜드에서도 아빠 따라 가 본 곳이 생각 많이 나요. 거기는 자연이 정말 좋았어요. 땅 위에서 김이 나는 뜨거운 곳은 지금도 생각나요.


로토루아라는 곳이다. 미국에도 그런 곳이 있어. 엘로우 스톤인데, 로토루아 같지는 않지만 굉장히 넓은 곳이지. 언제 한 번 그곳도 가봐라. 미국에는 가볼만한 곳이 정말 많단다. 나중에 여유가 되면 여행을 많이 하거라. 여행만큼 좋은 교훈을 주는 것도 없단다. 항상 이야기 하지만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직업적인 여행가가 아니면 모든 곳을 다 돌아볼 수도 없고, 세상 그 복잡한 일을 다 경험할 수도 없잖니? 책을 많이 읽어서 책에서 간접경험을 얻어야 한다.


아빠처럼 바보같이 살지 말거라. 너는 전공도 그쪽이니 항상 경제에 신경을 두고 살아라. 미국에서는 돈 모으기기 쉽지 않다. 워낙 마켓팅이 뛰어나 돈 뺏어가는 기술이 대단하거든. 뉴저지에서 모게지내고 미들 클래스로 살려면 부부가 최소 십만불은 벌어야 한다. 어려울 때 생각해서 어떻게든 저축을 해야 한다. 401K는 최대로 내고 월페이먼트를 최소로 줄여야 한다. 그게 미국에서 사는 방법이란다.


한국부모들은 대부분 자식들 결혼까지 책임지지만, 아빠는 그럴 능력이 없구나. 너희들 결혼준비에 아빠가 큰 힘이 되어줄 수가 없다. 아빠 도울 생각은 하지 않아도 좋으니 부지런히 저축해서 너희들 힘으로 결혼하기 바란다.


- 하하하, 아빠! 우리는 그런 생각 해본 적도 없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해요. 아빠가 도와준다고 해도 우리가 싫어요. 아빠만 행복하시면 우리는 감사합니다.


- 결혼은 2년 후쯤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사귀고 있는 오빠와 할 것 같은데, 100%는 아니에요. 제대로 된 직장도 찾아야 하고, 공부도 더 하고 싶어요.


속이 편치않은 아이를 생각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를 끊고 일어섰다. 밖에는 여전히 봄바람이 세게 불고 있었지만, 느낌만큼은 훨씬 포근해져 있었다. 그 바람 속에서 소원을 빌고 또 빌었다.


얘들아, 정말 고맙구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라.


<후기>

개인사를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아이들에게 만큼은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일주일을 저와 같이 지내다가 친구들과 나머지 친척들을 만나겠다며 어제 목요일 아침 부산으로 갔습니다. 

어떤 일로 내게 따귀를 맞고는 '왜 때려! 이 새끼야!' 하고 고함을 칠만큼 다부졌던 아이. 

내 생명보다도 몇 배나 더 소중한 아이들이 이제 모두 어른이 되었지만, 내게는 어린애처럼 순진하게만 보여 걱정이었는데 저만의 기우이었던 것 같습니다. 건강한 정신으로 자란 아이들이 고맙기만 합니다.


다음 주에 돌아가는 아이가 공항에서 혼자 떠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않아서 가는 길을 배웅하러 내일 서울에 갑니다. 모처럼 올라가는 길에 가족도 만나고 친구들도 만나야겠지요.


아이를 보내고 광주행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를 거쳐 해남으로 갑니다. 댓글로만 연락을 주고받던 몇 분은 뵐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