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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Better Life를 찾아서 Ⅳ

(2012년 3월 19일) 

 

- 감히 누구 앞에서 땡깡이야, 기껏 과장이었던 주제에!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난다는 것은 현재의 삶에 만족할 수 없다는 의미다. 내 스스로가 그랬다. 다니던 정부기업 자회사에 사장이 바뀌자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권위적인 새 사장님은 결재받으러 찾아가면 만나기도 힘들었지만, 이야기하는 것은 더 어려웠다.

 

모회사에서 부사장을 하다가 낙하산으로 사장으로 내려오신 높고 귀하신 어른은, 모회사에서 기껏 과장으로 있다가 - 과장 신분으로 높으신 부사장을 업무상 만날 일은 전혀 없다. - 자회사에 와서야 겨우 부장 노릇을 하는 젊은 친구가 자신의 뜻을 거슬리려하자 호통을 친 것이다.


결재판을 들고 사장실을 나서며 암담하고 처량한 마음이 되었다.

과장 하나, 대리 둘이 전부인 부서를 처음 담당하면서 지난 3년 동안 물불 가리지 않고 정말 열심히 일했었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당시에 30명이 넘는 부서가 되었고, 매출도 회사 내에서 탑 3에 들었고, 신생회사이었던 그 회사 어느 부서보다도 장밋빛이었다.


부서가 커지고 이런 저런 권한이 생기자 끊임없이 청탁과 압력이 들어와 머리가 아프고 괴롭던 시절이었다. 회사에서 인정하지 않는 영업비를 스스로 만들어 뇌물도 주고 고급술집에도 드나들어야 일이 돌아가던 때였으니까, 걸리지만 않으면 죄(?)가 되지 않는 불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묵살하는 청탁들도 있었지만,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의 부탁도 있었으나, 묵살하면 온갖 더러운 소문이 돌았고, 들어주다보면 그게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사장이란 사람은 직원이 마음대로 일할 수 있도록 뒤를 받춰 줘야 하는데, 사장이 자신의 권위만 생각하고 부하직원의 안위에 관심이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스트레스로 잠 못 이루는 밤들이 많아졌고, 밤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세계로부터의 탈출을 꿈꿨다.


- 이 회사에 나갈 사람이 많아. 하지만 당신은 아냐!


사표를 냈을 때 사장이 나를 불러 한 말이었지만, 사장으로부터 들은 마지막 말이기도 했다.


내 결정은 옳았었다.

 

떠난지 얼마되지 않아 한국은 외환위기로 나라가 망할 것 처럼 시끄럽더니, 단어도 생소한 디폴트, IMF, 구제금융과 같은 경제적 용어가 노상 매스컴에 올랐고, 800원 하던 환율은 1,600원을 넘어섰으며, 2억을 넘게 받고 팔았던 분당의 아파트는 1억 3~4천으로 떨어졌다. 미국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많이 위축되고 망가지기도 하고 어려웠지만, 그런대로 살 만했다. 항상 중고차만 사 쓰던 내가 1999년에는 생전 처음으로 새 차를 샀다. 그해 추수 감사절에는 혼다 오디세이를 1,200 마일 운전하여 플로리다 올랜도로 가족여행을 떠났고, 십 수년 전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켰다.


1983년, 같이 연수갔던 동료와 함께 올랜도 디즈니 월드에서 줄 서있을 때, 다소 창피함을 느꼈다. 젊은 연인들이거나 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 뿐인 줄에 동양인 남자 둘은 어색하기만 했다. 다음에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들에게 이곳을 반드시 보여주겠다고 나 자신에게 다짐했던 약속이었다.


- 장부장, 자네 잘 갔어. 여기는 개판이야. 이상한 놈이 사장으로 와서 개판 만들어 놨어. 아태재단에 줄이 있는 놈인데, 쳐먹는 것 밖에 몰라. 사장이 해외출장을 가는데, 다들 봉투를 갖다 주는 거야. 나보고도 갖다주라고 하는데 난 안 갔거든. 어쩔 수가 없어서 하루 전날, 봉투를 품고 사장실에 갔었는데 뭐라는 줄 알아. 네가 마지막으로 왔다는 거야. 그냥 놓고 나가라는 거야, 하하하. 뭐 이런 개자식이 있는 거야. 난 듣도 보도 못했어.


DJ가 대통령이 되고 난 후, 처음 방문한 한국에서 친하게 지냈던 B부장에게 들었던 이야기다. DJ가 이사장으로 있던 아태재단은 그가 대통령이 되고나자 무소불위의 존재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이 희호 여사의 사촌오빠(DJ 정부 말년에 구속된다.) 되는 사람이 재단이사로 있었는데 그 처조카(DJ 정부가 끝나자 바로 바뀐다.) 되는 사람이 A 전자의 전무로 있다가 사장으로 왔다고 하는데, 그 악행은 듣기에도 대단했다.


내가 그 회사에 계속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 아! 그래, 나는 Better Life를 사는 셈이구나. 그냥 이곳에 있었다면 그런 놈하고 치고받고 싸우고 나갔을 거야. 틀림없이 그랬을 거야, 내 성격에.


<후기>

인간을 수학으로 표현하면 y = f(t)·f(E) 라고 생각합니다. 즉, 변수 시간(t)과 환경(E)의 함수라는 거지요.

시간과 처한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생각하고 변하는 존재입니다. 한순간도 같은 모습으로 있지 않는 강물에 인간을 비유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 때는 조폭 두목 전두환을 '구국의 영웅'으로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군 복무를 할 때, 최전방에서 10·26과 12·12 사태를 맞이했는데, 당시 유일한 읽을 거리였던 전우신문에는 온통 그의 찬양기사 뿐이었습니다. 당연히 광주사태도 빨갱이 김대중이 간첩들과 책동하여 일으켰는지 알았지요, 하하하.


MB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도 굉장히 좋아했었습니다. '맞아,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한 사람이 되어야 배고프고 힘없는 백성을 위할 줄 알거야. 한일협정에 반대해 감옥에도 갔던 분이니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도 알겠지.' 하고 생각한 것이지요. 또 당시 미국에서 인터넷으로 즐겨읽던 조선 중앙일보에는 온통 그의 찬양기사 일색이기도 했습니다. 2008년 한국에서 '미국 소고기 수입반대'로 촛불집회를 할 때도 MB의 진심을 몰라주는 것 같아 측은한 생각도 했었습니다.


제주에 왔을 때, '7대 자연경관'의 문제는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지만, 해군기지 문제는 왜 반대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성당에서 반대하는 신부님의 강론을 들을 때도 '참,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구나!'고 생각했었지요.


그러나, 진실을 알고나면 생각이 바뀝니다. 그리고 뉴스에는 진실이 없습니다. 전해지는 뉴스에는 작위된 진실만이 전해져 일방적이고 불리하다고 판단되는 사실들은 대부분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가진 자나 기득권이 어리석은 대중의 여론을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어가기 위해 각색하는 거지요.


MB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있고, 제주 해군기지에는 가려진 이야기가 너무 많습니다.


이탈리아의 전총리 베를루스코니가 그렇게 했습니다. 말도 안되는 인종주의자에, 탐욕과 호색 밖에 모르는 그런 인간이 장시간 정권을 유지하게 한 힘이었습니다.


미국도 유대인이 장악한 매스컴이 미국에 불리하고 세계를 불모로 삼는 여론을 만들어 가고 있고, 우리 모두는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피해자인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