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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Better Life를 찾아서Ⅰ

(2012년 3월 7일)

- 1968년에 맹호부대로 월남전에 참전했어요. 군수품 담당 보급병으로 미군을 상대했었는데, 그들의 풍족한 물자를 보고 놀랐어. 실탄이든, 폭탄이든, 음식이든 달라는 대로 주는 거야. 그때 결심했어요. 제대만 하면 미국으로 가겠다고.

 

- 제대하고 1년 동안 준비해서, 결혼 3개월 만에 미국에 갔어. 혼자 가려니까 약혼이라도 하고 가라는 거야. 그런데 집에서는 약혼하고 갈 바에는 결혼하고 가라더군. 그래서 결혼만 하고 혼자 미국으로 간 거지. 집사람은 나중에 왔고.

 

- 40년을 살았어요. LA에서 15년, 그리고 시애틀에서 25년을 살았는데, 돈도 많이 벌어보았고, 지인에게 속아 다 날려도 보았지만, 쉴 새 없이 일한 덕분에 노후는 별 걱정이 없어요. 자식들도 다 성공해서 잘 살고 있고. 앞으로 2년 내로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여생을 보낼 거예요.

 

지난 1월 중순, 마중 나간 제주공항에서 처음 뵌 L 선생은 마른 체구로 청산유수처럼 언변이 좋았다. 1월에 비즈니스가 제일 한가하고 그 틈에 건강진단을 받을 겸 한국에 오곤 했는데, 이번에는 12월 말에 중앙일보에 나에 관한 기사를 보고 만나 보겠다는 생각으로 제주에 들렸다고 했다. 다음날 돌아가는 길에 들린 공항에서 남긴 말씀이다.

 

- 이제 돌아가면, 또 다시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야 해. 집이 바닷가에 있는데, 저녁 무렵 백야드에서 보면 노을이 정말 멋있어요. 그런데도 그걸 집에서 보는 날이 며칠 되지 않아요. 거의 해진 다음에 집에 들어가니까. 집은 그냥 잠만 자고 나오는 하숙집이나 다름이 없어.

 

미국에서 만난 대학 선후배들은 대부분 주재원으로 왔다가 영주권을 받고 눌러 앉으신 분들이 많았다. 간혹 가족이민으로 오신 분들도 있었지만, 주재원으로 왔다가 당시 한국 현실에 비하면 미국의 풍족하고 화려한 모습에 마음이 끌려 쉽게 결정하지 않았을까?

 

지난 11월 서울의 오프라인 모임에서 만난 분들 중 한 분은 이렇게 이야기 했다..

 

-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하기 위해 1972년 유신을 일으켰어요. 탱크가 대학에 들어서고, 군사독재로 자유가 없는 한국은 암울하기만 했었지요. 그래서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어요.

 

술 좋아하고 사람 좋은 4촌 매제 J는, 산호세의 그의 집에 들렀을 때 같이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했었다.

 

- 제주 촌놈이 유학으로 1983년 말, 처음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사람 사는 모습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냐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때는 한국도 못살았을 때였으니까, 제주는 어떠했겠어요? 하하하, 그런데 한국이 이렇게 잘 살게 되고 제주가 그렇게 좋아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미국이민을 결정했을 때 내가 들은 말이다.

 

- Best choice you've ever made in your life.

 

거대한 몸집의 유태인인 John은 당시 그 회사의 부사장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그와 이야기하며, 내가 이 회사를 다니며 미국에서 계속 살 거라고 하자 그가 한 말이었지만, 사실 내게도 미국은 꿈의 나라였다.

 

1983년 초, 회사에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뽑은 연수생에 선발된 덕분에 방문하게 된 곳은 플로리다의 동쪽 해변 멜번(Melbourne)이라는 작은 도시였다. 한 밤에 도착하여 그곳이 해변에 자리한 Ocean Front Hotel 인줄도 모르고 ‘쏴아아’ 하는 소리를 들으며 긴장 속에서 밤을 새웠으나, 날이 밝아 본 대서양은 말 그대로 환상 그 자체이었다. 지금 같은 3월 초이었는데도, 비키니 차림으로 눈부신 해변 원색의 파라솔 밑에 누워 책을 보고 있는 금발들은 총각이었던 내 가슴을 콩닥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 너, 미국에 환장한 놈 아냐? 그래서 미국에 간 것 아냐?

 

친한 친구들 중에서도 속이 깊고 똑똑해서 가장 자랑스러운 친구인 B 가 한 말이었다. 5~6년 전에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 내게 내뱉은 말이었는데, 왜 그가 내게 그런 말을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 전화를 받은 시간이 오전이었으니 한국의 늦은 밤에 술을 마시다 술김에 전화했을 수도 있겠고, 또 미국에서 고생하며 사는 내가 애처로웠을 수도 있겠다. - 옛날 미국에 몇 개월 다녀와서 내가 너무 떠벌렸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 야, 임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내가 무슨 미국에 환장을 했다고 그런 식으로 말하냐? 너도 알다시피 그 잘난 사업부장 한다고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 받았냐? 나 거기 살았으면 벌써 죽었을 지도 몰라. 내 성질 알잖아. 나는 그 나라의 그 지긋지긋한 부정부패가 싫어서 떠났어, 이 자식아. 쓸데없는 소리 하려면 끊어, 임마!

 

그렇게 얼버무리고 지나갔지만, 친구가 내뱉은 그 말은 오랫동안 귓가에 맴돌았었다.

 

(지난 11월 이 친구의 아들 결혼식에 참석하러 서울에 갔었습니다. 그 기회에 서울에서 오프라인 모임을 가졌었구요.)

 

<후기>

어린이집 운전기사 노릇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수술한 친구가 폐에 문제가 생겨 퇴원이 1주일 늦어진 모양입니다.

아침 일이 끝난 후, 근처 탐라 도서관에 들려 책도 읽고 글도 쓰며 오후 시간까지 시간을 때우고 있습니다.

 

70년 대부터 90년 대까지 30년 동안 수 백만에 이르는 수많은 분들이 이민을 떠났습니다.

한 세대 동안 이루어진 이민의 의미를 나름대로 정리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왜 떠났으며 무엇을 이루었는가?

그리고 왜 돌아오려고 하는 분들이 있는가?

 

제가 다루기에는 너무 거창한 주제라 언감생심이지마는, 나름대로의 직간접 경험을 통해 주워들은 풍월을 읊는다고 생각하시고 너무 나무라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