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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골프단상

(2007년 여름 어느날)


미국에는 카운티(한국의 區나 郡에 해당)마다 운영하는 퍼블릭 코스가 있다. 회사가 있는 모리스카운티에는 'Flanders Valley Golf Club' 이라는 꽤 괜찮은 코스가 있다. 36홀로 매 10분마다 내보내기 때문에 별로 밀리지 않기도 하지만, 6300야드가 넘는 코스에는 나무가 많고 웅장한 맛이 있고 페어웨이가 넓은 편이고 벙커나 그린도 관리가 잘 되어 골프잡지에서 미국의 100대 퍼블릭으로 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금요일에는 - 6,7,8월에는 섬머 플렉서블 타임을 운영하기 때문에 12시에 일을 끝낸다. - 주로 회사동료들과 그곳에서 어울린다. 좋은 회사(?)에 다니는 덕분에 얻는 즐거움 중의 하나다. 어제 금요일에도 2시 20분에 티타임을 예약했었지만, 아침부터 내리는 비가 심상치 않아 전화를 했더니 비 때문에 코스 전체를 닫았다고 하였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금요일 점심을 먹고 느지막이 아쉬움을 뒤로하고 집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287을 타고 내려오는 중에 비가 멎었고, 집으로 가는 길에 혹시나 하고 그린놀 골프장에 들렸는데 그곳은 예상 외로 코스를 오픈 하고 있었다. 클럽 안에는 직원들만 앉아 잡담을 하고 있는 분위기였다. 그린피 15불(주말에는 25불인데, 3시라 Twilight 요금을 적용)을 내고 카트를 끌고 혼자 나섰다.

 

비가 그친지 얼마 되지 않아 내 앞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픽사리를 했을 때는 다시 한번 치기도 하면서 18홀을 끝냈을 때는 6시가 채 되지 않았다. 3시간이 걸리지 않은 것이다. 9홀이라도 더 돌기 위해 다시 1번 홀로 갔다. - 회사가 있는 모리스 카운티는 그렇지 않지만 섬머셋 카운티는 한번 그린피를 내면 체력이 허락하는 한 얼마든지 더 칠 수 있다. 거의 예약도 필요없다. 스타터가 있는 곳에 칠판이 있는데 그곳에 이름을 적고 같이 라운딩하는 사람 수를 적어 놓고 퍼팅연습을 하고 있으면 스타터가 이름을 부르고는 그린피를 내고 영수증을 갖고 오라고 한다. 2주쯤 전에는 휴가를 내고 주중에 오전에는 걸어서 오후에는 힘들어 카트를 타고 두 바퀴를 돈 적이 있다. 물론 카트를 탈 경우에는 카트비는 별도다.


27홀을 돌고나니 8시 가까이 되어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미국에 살면서 골프는 쉽게 즐길 수 있는 커다란 즐거움 중의 하나다. 지금까지는 그 즐거움도 누리지 못하고 살았지만, 거의 혼자만의 즐거움을 찾아야 하는 이곳에서 가장 적절한 오락이 아닐 수 없다. 너댓시간 그 작은 공을 좇아다니며 집중하다보면 모든 잡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국처럼 캐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운동이라는 생각에 카트도 타지 않고 Hand cart를 끌고 다닌다.

 

지난주에는 35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를 무릎쓰고 카트를 끌고 치다가 탈진을 해서 혼나기도 했지만, 그 덕분에 그런 날에는 카트를 타야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오늘(8월 11일 토요일) 일어나 아침을 대충 때우고 7시경에 그린놀을 향했다. 집에서 10도 채 안되는 거리에 있는 골프장이다. 칠판에 ‘Duke(1)’이라고 적었다. Duke이라는 사람이 혼자 라운딩하러 왔다는 뜻이다. 퍼팅연습을 여나무개 하고 있는데 내 이름을 호명했다.

 

그린피 영수증에 펀칭을 하고 1번 홀로 가니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는 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이 다 나이가 있어 보이는데 Dick(더 늙어 보임)과 Jack이었다. 곧 이어 나타난 사람은 Tom이라고 했다. 여느 때처럼 난 보기와 더블을 번갈아 가면서 스코어를 냈지만, Tom이라는 친구만 꽤 잘 치고(나중에 물으니 핸디가 15정도라고 했다.), 다른 두 사람은 많이 헤매면서도, 어제의 비로 질척거리는 그린위로 카트를 끌고 나름대로 열심히 즐기는 모습이었다. 유일하게 골프백을 맨 Jack은 11번째 홀을 아웃하면서 자기는 충분하다고 그린을 떠나갔다.


Dick은 시간만 나면 워터해저드나 수풀 근처에서 공을 줍고 있었는데 워터 워터해저드만 만나면 공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셋이서 치기 시작하니 속도가 빨라져 파3홀에서 앞팀이 홀 아웃하기를 기다리면서 Dick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내년부터 자기는 그린피가 공짜라는 것이었다. 왜냐고 묻자, 내년에 85살이 되는데 85살이 되면 섬머셋 카운티 퍼블릭 코스는 그린피가 면제된다고 한다.

 

그는 84살이었던 것이었다. 나이가 들어 70정도로 생각했다. 물론 70이라도 카트도 타지 않고 걸어서 골프를 치고 티샷을 한다는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웬만한 거리는 무조건 우드를 들었다. 티샷도 짧고 우드도 픽사리가 많았지만, 그린 주위에서는 볼을 핀에 자주 붙이는 것이었다. 즉 많은 경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00야드만 넘으면 우드를 잡는데 정확히 공을 맞추고 있었다.

 

어느덧 마지막 홀의 그린에서 만났다. 나는 여전히 100을 넘긴 102개의 스코어에 아쉬움을 느끼고, 여느 때처럼 ‘Good to play with you'라고 상투적인 인사를 하면서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런데, 그런데...

Dick은 다시 스타터에게 가는 것이 아닌가?

 

- May I play one more?

 

- Of course, if you want. Put your name on the board.


하느님 맙소사, 여든 네 살 인 그는 다시 라운딩에 나서는 것이다, 그것도 걸어서.


<후기>

Dick은 다음해에 우연히 또 만나서 같이 라운딩을 했습니다. 여전히 걷고 있었고, 저를 기억하지는 못하더군요.

이제 그린피 내지 않고 라운딩을 하느냐고 물었고, 그렇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실력은 전 해와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5~60 야드 내에서는 거의 핀에 같다 붙였고, 퍼팅도 꽤 잘해서 한 두번의 퍼팅으로 홀을 마치곤 했습니다.

 

그래서 물어보았지요. 얼마나 자주 라운딩을 하느냐고.

백 몇 번을 했다는데 대충 계산해보니 3월에 오픈하는 것을 고려하면 비오는 날만 빼고 매일 라운딩을 한 것이더군요.


실컷 즐기시기 바랍니다.

물론 여유가 있다면 제주에서도 가능하지만, 저는 솔직이 힘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