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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성공한 이민, 실패한 이민

(2011년 11월 1일)

 

엊그제 10월 29일 KBS에서 방송한 다큐 '글로벌 성공시대, 미국인의 마음을 빼앗은 리더, 어바인 시장 강석희'편을 보았다. 1952년 생인 그는 대학 졸업 후 1977년, 어릴 적부터 동경하던 미국으로 건너가 Circuit City에서 세일즈맨으로 이민생활을 시작했고, 일하는 상점마다 최고의 실적을 보일 정도로 탁월한 노력을 경주했으며, 2004년에 어바인 시장에 처음 당선되고 재선에 성공하여 현재까지 시장으로 재직하고 있다고 전했다.

 

1992년 발생한 LA폭동이 계기가 되어 정치에 입문하였다고 하는데, 어바인은 미국에서도 가장 살기 좋은 도시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이민 1세대로서 그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자타가 공인하는 성공한 이민자로 자리매김을 하여 고국의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것이다.

 

강석희 시장뿐이 아니라 많은 성공한 코리안 아메리칸이 있어서 한국인 이민자들이 자부심을 갖고 살며 또 미국 내에서 한국인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그러나 그런 성공한 사람들만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생업에 종사하면서 장삼이사(張三李四)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다수고, 또 불행하게도 실패한 이민생활을 하는 분들도 있다. 성공한 사람들이 신문과 방송으로부터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세상이지만, 민주주의의  다수결 원칙에서 보면 그들은 비주류다.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이야말로 이 시대의 주류이고, 사회 통념상 실패한 이민자의 삶조차도 그들의 열정이 순수했다면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

 

부와 명예, 사회적 지위 등 온갖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온통 세상을 지배하고 있고 TV와 신문을 도배하고 있지만, 내 가슴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크게 움직인다. 1%의 돈 많고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99% 민중의 삶을 대변할 수는 없다. 오히려 99%의 평범한 인생이 있기에 1%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여기 평범하게 살아온 이민자의 이야기가 있다.

'한국이 이렇게 잘 살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가 한 이야기다.

 

나는 그를 잘 알지는 못한다. 인생이 얽히고 설키다 보니 친척의 결혼식에서 처음 만나 멋적은 인사를 나누었고, 그 후 이런 저런 인연으로 두 어 차례 더 만났다. 그의 집에서 며칠 머무르며 그의 안내를 받아 샌프란시스코 지역을 관광하기도 했었는데, 내가 제주에 살게 되면서 제주가 고향인 그가 점점 내 상념 속으로 들어왔다.

 

그는 1983년 가을이 깊어지는 이맘 때, 미국으로 유학을 왔었다.

평소에 동경하던 미국에서 공부하기 위해 고향의 모교에서 교사로 일해서 번 돈 몇 푼을 들고, 공부를 잘 했던 자랑스런 아들이 고향땅 부모 곁에서 평범하게 살기를 원하는 부모의 반대를 무릎쓰고 온 것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공부가 끝난 뒤에도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 고향 땅에 비해 모든 면에서 비할 나위없이 풍족하고 부유한 미국 땅에 이민자라는 이름으로 정착을 선택했다. 결혼도 했고 사업도 순탄했으며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단, 하나가 문제였다. 아이가 없었다.

장남인 그는 유별나게 아이를 좋아했고 아이를 원했지만, 불행하게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던 그에게 한국에서 온 한 여인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 여인과의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 그는 이혼을 택했다. 그러나 미안했다. 그 미안함 때문에 그는 거의 전 재산을 Ex-wife에게 넘겨 주었다. 그에게 돈은 지금까지 해온대로 또 벌면 되는 것이었다. 죄책감을 잊기에 충분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 아이가 태어났고, 짧은 기간이지만 달콤한 생활을 했다.

 

리먼 브러더스 사태가 일어났을 때에도, Economic Crisis로 온 미국이 난리칠 때도 그는 크게 영향받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였다. 2008년 5월 만났을 때, 그는 이렇게 이야기 했었으니까.

 

- 물론 영향이 없지는 않아요. 예전 같지는 않지요. 그러나 아직은 그런대로 괜찮아요. 오히려 일감이 적당해서 좋아요.

 

하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져 갔다.

2010년 1월에 다시 만났을 때 술자리에서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 미국에서 30년 가까이 살면서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상상도 못 했어요. 누가 스윗치를 꺼버린 것 처럼, 갑자기 일감이 사라져 버렸어요. 일이 있다고 해도,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지들이 다하고, 돈도 되지않고 힘이 들어 할 수 없는 일들만 최소의 예산으로 나오는 거예요. 빨리 경기가 회복되지 않으면 큰 일인데...

 

그리고 지난 9월 추석 연휴가 끝난 다음날 내게는 사촌 여동생이기도 한, 그의 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 오빠, 제주에서 살기는 어때. 요즘 애 아빠가 많이 힘들어. 일을 해도 남는 게 없어. 일감이 워낙 부족하니까 입찰이 나오면, 옛날 같으면 쳐다보지도 않던 일도 서로 하려고 대드는 거야. 그러니 저가로 Bid하지 않으면 일 자체가 없고, 또 일을 하더라도 워낙 저가로 입찰을 하니까 일을 하고도 손해를 보는 거야. 세금도 못내고 있어. 나는 이 사람 고향 제주에 부모님이 계시니까 제주로 갔으면 하는데 이 사람이 말을 안 들어. 오빠가 이야기 좀 해주면 안 될까? 이 사람 좀 설득시켜서 제주로 가게 만들어 봐. 오빠가 제주에서 살아 보았으니까 어떤지 이야기 좀 해줘. 나도 이젠 미국에서 살기가 싫어. 제주에 가면 무슨 일이라도 할 테니까. 시누이들 하는 장사라도 도우면서 살면 되잖아.

 

마음이 짠해졌다. 20대 중반에 청운의 꿈을 안고 간 젊은이는 어느덧 50대 중반에 인생의 기로에 섰다.

 

한 때는 작은 일은 쳐다도 안 보고, 관공서 입찰만 쫓아다녔을 정도로 사업이 잘 되었고 사람이 좋아 어려운 사람들도 많이 도왔다. 한국이 IMF를 당해 많은 사람들이 대책없이 미국에 왔을 때, 그는 그런 분들을 많이 도와 일하게 해주었다.

 

사람좋은 그가 무엇을 잘못 했을까?

아이를 갖고 싶어 했던 것, 조강치처와 이혼한 것, 돈에 집착하지 않았던 것, 미국이 이렇게 될 줄 몰랐던 것, 한국이 이렇게 잘 살게 될 줄 몰랐던 것이 그의 잘못이라면, 그의 죄(?)는 참으로 작지 않다.

그러나 그 죄는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이기도 하다.

 

그의 모친은 큰 아들 생각에 한숨과 눈물로 지낸다.

그래서 전화한다. '얘야, 그만 돌아오라고'

그러나 그의 자존심이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의 부친은 자기 앞에서 그 아들의 이야기 하는 것 조차 싫어한다.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해서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인가?

 

그냥 내 진심을 담아 아래와 같이 메일을 보냈지만, 그에게서는 아직까지 아무런 대답이 없다.

 

어느덧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엊그제 추석은 미국에서 살다온 분들과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같이 지냈습니다.

 

한 분은 46년생으로 30살에 미국에 이민 가서 27년을 사시다가 911이 터지고, 맨하탄에서 하던 그로서리 매출이 뚝 떨어지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제주에 와서 사시고 계신 분입니다.

부모(94세, 95세) 형제(형, 누나, 여동생)와 자식(아들 며느리, 딸 사위)이 다 미국에 있는데도 이곳에 돌아와 안덕면에서 사시고 있고, 다른 한 분은 61년 생인데, 미국에서 고등학교, 대학교(UNLV)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17년을 지내다가 제주에 내려온 사람입니다.

 

다들, 제주에는 연고가 전혀 없으나 잘들 지내시는 분이지요.

두 어달 전에는 오클랜드 변두리에서 25년 살던 친구가 국민학교에 다니는 아들 둘을 데리고 서귀포에 정착한 친구도 보았습니다.

 

나는 지난 11월에 도착하여 12월에 집을 사고 (제주 월평동, 옛날 제주상고 부근) 하루걸러 놀고 쉬면서 생애에 최고의 날들을 보내고 있지요.

 

돈을 벌지 않고 생활한다는 게 이렇게 자유를 느끼게 하는 일인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제 돌아온 지 일년도 되지 않았지만, 작년 이맘 때 LA에서 마음고생하던 것을 생각하면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네요.

시간이 많으니, 집사람과 올레길도 걷고 운동도 많이 하고, 인터넷도 하고, 영화도 많이 보고 책도 보면서 건달 생활을 합니다.

특히, 혹 나같은 사람이 있으면 도움을 주려고 '역이민'카페를 개설해서 운영하고 있기도 하지요.

http://cafe.daum.net/back2korea를 참고하시기를.

 

작년에 혼자 고민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생각하면서 정보를 구했는데,

그 과정이 힘들어 내가 경험했던 것을 바탕으로 저와 비슷한 분들과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카페를 열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여 회원수가 700명에 이르고 있는데,

전화로 상담해 준 사람들도 꽤 되고, 또 이 카페를 통해서 돌아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미국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얻은 결론은 'Pursuit of Happiness'입니다.
악착같이 미국에서 살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연명하는 것이지 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게 된 것입니다.
돈은 행복하기 위한 수단은 될 수 있어도 행복은 아닌 것이지요.
그렇게 하나 하나 나 자신을 합리화 시키다 보니 결정은 쉬웠습니다.

 

패배감에 몸서리가 쳐지기도 했지만, 그것이 행복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지금까지는 물질적으로 채우기 위해 살았지만, 앞으로는 버리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물론 아직도 그 과정을 이룬 것은 아니지만.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용산이지만, 그곳을 고향으로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난 죄인 거지요.

 

나야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지만, 고향이 있는 분들은 고향이 얼마나 좋은 곳입니까?
부모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는 내가 부모가 되어 아이들을 키워보니까 알겠더군요.
내 자식 놈이 심장이 필요하다고 하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기꺼이 꺼내줄 것 같습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어느 부모도 그렇게 하겠지요.

 

내가 힘들 때 품어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내가 힘들 때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은총입니다.

 

아직 1년은 안 되었지만, 파아란 가을 하늘을 보고 내가 행복하다고 느낄 때 잘 돌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너무 힘들 게 생각하시지 마시고, 소나기는 피한다고, 미국에 소나기가 올 때 잠시 피해간다고 생각하고 귀향을 조심스럽게 권해 봅니다.

어차피 나나 OO 아빠나 시민권자니까, 나중에 미국 경기가 다시 좋아지면 돌아갈 수도 있고,
또 이곳이 마냥 편하면 이곳에서 살면서 SSA 받아먹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만든 카페에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차근 차근 읽어보시고 후회없는 결정 하시기를 권합니다.

 

<후기>

어제 성당에서 성탄절에 부를 성가 연습을 하는 도중에 전화가 왔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XX라는 사람입니다. 메릴랜드에서 살고 있는데, 우연히 역이민 카페를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컴퓨터 문외한 이거든요. 너무 좋고 도움이 되는 글이 많아 차근차근 다 읽어보려고 하는데 어떤 글은 읽히고 어떤 글은 가입해야 된다고 나오는데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려주세요.

 

방법을 알려주고 난 후. 30분 있다가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 정말 좋은 일 하고 계십니다. 저는 성공한 이민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실패한 이민자도 아닙니다. 그냥 평범하게 살아왔지요. 연어가 죽을 때는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도 그러려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미국에는 충분히 살 만큼 살았거든요. 또 아시다시피 이제는 미국도 옛날 미국이 아니잖아요.

 

저는 지금 부산에 있는데 오프라인 모임을 하면 꼭 참석하고 싶습니다. 13일 다시 돌아가는데 다음에 올 때는 정리해서 아주 올 겁니다.

 

다음에 오면 꼭 만나고 싶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고.

정말 고맙습니다. 돌아가면 모든 글을 하나 하나 다 읽어볼 생각입니다.

정말 좋은 일 하시는 겁니다. 이런 정보가 정말 필요했습니다. 다음에 돌아오면 꼭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이런 분들 때문에 이 카페에 더 시간과 정성을 들이게 됩니다.

덕분에 일자리 찾는 일에는 점점 더 멀어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