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공부하는 법

(2011년 8월 17일)

 

(이 글의 내용은 자식농사와는 관계가 없습니다만, 공부를 어떻게 하느냐는 면에서는 참고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특히 돈도 없이 유학와서 1년 3개월만에 석사학위를 받고 회사를 차려 미국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임을 먼저 밝혀둡니다. 어떤 분이 댓글로 하신 극찬에 대한 감사의 답글로 언젠가 한번은 쓰려고 했던 글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한 때, 내가 아주 존경까지 했었던 내 친구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지금은 존경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그러나 성공한 이후에는 내가 알던 예전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기에 감정이 전과 같지는 않다.)


그를 만난 것은 1981년 말에 새로 생긴 부서에서 였다. 당시 컴퓨터를 이용한 제어시스템을 담당하는 부서가 새로 생겼고, 나는 하드웨어 담당자로 그는 소프트웨어 담당자로 발령을 받아 서로 인사하게 되었다.


강원도 산골 출신의 그는 공전을 나온 후, 회사에 취직해 교대근무를 하면서 인천의 모대학에 편입하여 졸업장을 딴 친구였다. 그의 첫 인상은 이마에 '나는 촌놈입니다'라는 사인만 없을 뿐 촌놈의 모습 그 자체였다. 곱슬머리에 돗수높은 커다란 안경, 축구공처럼 동그란 얼굴, 더듬거리는 듯한 어눌한 말투, 동료들의 대화에 잘 끼지 못하는 등 전형적인 촌놈의 티가 줄줄 흘렀다.


82년 3월에 그 신생부서 전원은 LG(당시에는 금성)에서 시행하는 컴퓨터 교육에 10주간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 때 같이 교육을 받으며 그 친구가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다.

 

말이 좋아 피교육생이지 우리는 "갑"이었고 LG는 "을"이었다. 당시의 돈으로 30억짜리 프로젝트로 미국에서 들어오는 시스템을 LG에서 시공을 하고 우리는 운영을 하게 되는 계약자인 동시에 공사 감독기관이었기 때문이다. -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상상만 하시기를.


전기를 전공한 그는 그런 교육에 죽자사자 매달렸다.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느냐고 물었더니, 새로운 컴퓨터 공부가 너무 재미있다는 거다. 백과사전같이 두꺼운 컴퓨터 매뉴얼을 집으로 가지고 다니며 새벽 2~3시까지 공부하면서 낮에는 쉬는 시간만 되면 깊이 잠이 들곤 했다.

 

미국의 시스템 공급자에게 1년 정도 교육을 받고 온 강사들의 실력도 그만그만 하여서 제대로 무얼 알고 강의하는 사람도 없었고 대충 시간만 때우는 식의 교육이었다. 그때만 해도 컴퓨터 전공자는 거의 없었고 전자나 전기를 전공한 사람들이 컴퓨터를 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수업시간에는 눈이 동그래지며 열심이었고, 강사가 헤매면 그가 오히려 강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1983년에 내가 미국에 연수를 다녀오고, 그는 그 다음해인 1984년에 연수를 갔었는데, 나와는 달리 그는 돌아오자마자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겠다며 영어공부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공부방법도 특이했다. Webster 영영사전을 가지고 다니며 외웠었는데, 그 이유는 영어는 어차피 희랍어에서 온 언어이고 그 수많은 단어를 다 외울 수가 없으니 접두사와 접미사와 그 변형들을 외워서 어떤 단어라도 그 뜻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는 거였다.


1년을 그렇게 공부하더니 1985년에 그는 토플을 870점, GRE(대학원 과정 입학을 위한 언어시험) 1150점을 획득하여 세군데의 학교로 부터 입학허가를 받았다. 회사에는 휴직계를 내고, 1986년 8월 15일 유학을 위해 와이프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재산이 있을 리 없는 그가 가지고 간 것은 전세를 빼서 마련한 1년 정도의 학비와 연수 때 처음 본 장모로 부터 들은 한 마디(제 글 '어떤 여인의 삶' 참조.)가 전부였다.


주민등록상 공식적인 나이로는 나보다 두 살이 어린 그 친구는 때때로 나를 '형'이라고 호칭하기도 했었는데, 1986년 말 과장으로 승진하여 지방에 가 있던 내게 편지를 보냈다. 지금은 없어져 버린 그 편지의 내용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는 내게 미국에 와서 같이 공부하자는 제안을 했었다. 내가 결심만 하면 나머지는 자기가 다 알아서 수속해주겠다는 말도 첨부했다.


유학에 관심이 없진 않았지만, 당시 승진 후에 누리는 달콤함에 취해있기도 했고 또 갓난 어린 아이 셋을 데리고 갈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득하여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거절 의사를 대신했다. 그러나 사실 그보다 더한 이유는 그 친구의 편지 후반부에 쓴 내용이었다.


- 나는 일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학교에서 지내. 도서관에서 먹고 자고 하는 거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졸리면 벽에다 머리대고 잠깐씩 졸고 끼니는 샌드위치로 때우고 오로지 공부만 하고 지낸다. 토요일에 빨래감 가지고 집에 가서 하루 자고 일요일 오후에 다시 학교로 돌아온다.


나는 도무지 그렇게까지 공부할 자신이 없었다. 나이가 30을 넘기도 했지만, 지방이라 공짜로 주는 사택에 살며 돈 쓸 일이 별로 없어 돈도 꽤 많이 저축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그리고 과장님 소리를 듣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기저귀 차고 다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지긋지긋한 공부를 하러 가기에 마음이 선뜻 내키지 않았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로부터는 그 후로도 몇 차례 편지가 더 왔었고 그 중에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내용들이 있다.


- 내가 지금 다니는 학교는 주립대라 단축코스가 없어. 돈도 없이 왔는데 남들처럼 편하게 2년씩 공부할 수도 없고. 그래서 스티븐슨 공대라는 사립대로 옮기려고 해. 그곳에는 학점만 이수하면 조기 졸업과 학위취득이 가능하거든. 등록금은 좀 비싸지만 잘하면 장학금 받을 수도 있으니까.


- (1987년 가을에 온 편지) 나 이번에 졸업하게 되었다. 3학기 만에 끝낸 셈이지. 박사학위까지 하고 싶은데, 마누라가 방방 뜨며 하는 말이 '너나 혼자 공부해라, 네가 더 공부한다면 아이 데리고 나 혼자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협박하는 거야. 자네도 알다시피 난 교수가 꿈이잖아. 할 수 없지, 뭐. 마누라 때문에 안 되겠어. 내가 포기하는 수 밖에. 하긴 마누라도 고생 많았어. 내 대신 생활을 책임지느라고 맨하탄 청과물 상에서 생선 다듬는 일을 했어. 겨울에는 손등이 얼어 터져서 피가 날 정도니까.


- 나는 지금 핏츠버그에 출장 나와 있어. 호텔방에 있는데 내 방 안에는 지금 오색 풍선이 가득하다. 내 생일이 음력이잖아. 그런데 미국인들은 음력을 모르니까 회사에 있는 내 기록만 보고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생각하고 생일기념해 준답시고 풍선을 한 컨테이너 보낸 거야. 호텔 방에서 생일선물로 보내온 샴페인을 혼자 마시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다.


1987년 말 그는 공부를 더 하는 대신 취직을 선택했다. 그 당시에도 불경기라 영주권도 없는 사람의 취직은 석사를 가졌더라도 쉽지 않았다. 연수를 갔던 회사를 포함해서 큰 회사 몇 군데에 이력서를 보냈지만 보기좋게 거절 당하고, 조그만 회사에 인터뷰를 한 끝에 겨우 취직을 할 수가 있었다.

 

연봉은 2만 3천 불이라고 했는데, 당시로서도 마스터 학위자로서는 형편없이 작은 액수이었다. 그래서 그는 수락하는 대신 조건을 달았다. 자신이 일하는 게 마음에 들면 6개월마다 5천불씩 올려달라고 했고 그 이후 그 회사를 떠날 때까지 한번도 그 5천불 인상이 빠진 적이 없었다. 매 6개월 마다 5천불에서 만 불이 인상되었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너무 재미있어 보통 매일 11시까지 일했다. 밤을 새기도 하고, 주말에도 혼자 나와서 일했고, 1~2년 후에는 그가 없으면 회사가 판 제품을 서비스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으며, 소프트웨어 개발 담당 매니저가 되었으니, 입사 몇 년이 안 되어 8만불까지 연봉이 오른 것은 당연할 지도 모르지만 그는 결국 회사를 떠나고 만다.


- 회사에 부사장이라는 친구가 새로 들어왔어. 사장의 친구인 모양인데 별로 하는 일도 없이 뒷짐이나 지고 왔다갔다 하는 거야. 그 날도 늦게까지 일하던 중에 우연히 회사 파일을 하나 보다가, 별 볼 일이 없는 그 친구가 십만불을 받는다는 걸 알게 된 거야. 화가 나더라구. 나는 몇 년 동안 죽어라 일해서 회사에 기여한 것이 적지 않은데도 이제 겨우 8만 불인데. 인종차별이야 뭐야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


- 그래서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사장실로 들어가서 따졌지. 부사장이 무슨 일을 하는데 십만불을 받느냐고. 그랬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내 월급을 9만불로 올려주겠다는 거야.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니 이건 아닌 거야. 내가 아시안이라고 우습게 본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거야.


- 한국에 있을 때도 가장 큰 불만은 불공평한 것이었어. 8시간 동안 시간만 때우고 가는 사람이나 10시간 12시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나 월급이 같은 거야. 그것처럼 불공평한 게 어딨어? 능력도 없이 단순히 오래 된 사람들이 호봉때문에 돈은 더 많이 받잖아? 그게 싫어서 미국에 왔는데 미국도 결국 같은 거잖아? 친구라고 부사장 시키고, 하는 일 없어도 6 digit 연봉을 받는다면, 이 회사에서 충성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그래서 바로 사표 내고 나왔어.


물론 그 이유가 다는 아니었다. 나중에 들으니 은사였던 한국인 교수 한 분이 같이 창업하자는 제의가 있었다고 한다. 이 일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친구의 이야기가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던 것으로는 보인다. 자기 와이프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다니던 회사를 스스로 떠나게 된다.

 

그가 떠난 그 회사는 몇 년 후 문을 닫게 되고.


그런 과정을 거쳐 그 친구는, 1992년 자기 집 건넌방에 회사를 차리게 되고, 소소로운 어려움은 있었지만 그 회사는 그 후 16년 동안 크게 성공해서 2007년 말에는 대략 1억불의 가치가 있는 회사로 인정받게 된다.


- 학점을 잘 받으려면 교수 눈에 띄여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더라고. 꾀죄죄한 아시안에다 영어도 잘 못하지 방법이 없는 거야. x나게 공부하니까 시험은 잘 보지만, 그것만 갖고는 'A'학점 받기에는 부족하거든.

 

그래서 꾀를 냈어. 어떤 과목이던지 이해하기 아주 어려운 것들이 있잖아. 그걸 x나게 공부해서 완전히 이해하는 거야. 그리고 수업이 끝난 다음에 교수실로 찾아가는 거지. 그리고는 당신이 잘 설명해주었지만 이해가 안 된다고 질문을 하는 거야.

 

그럼 교수 표정이 금방 확 바껴, 하하하.

 '흐흠, 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 되는 거야.

 

쉬운 이론이 아닌데도 질문이 없어 이상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떤 놈이 질문하니까 '그것 봐라' 하는 마음이 되는 거지. 열심히 설명해 주지, 입에 침을 튀겨 가면서.

 

건성으로 듣고 있다가 얼마 후에 내가 이러는 거지.

당신 말은 이러니까 이렇다는 거지 하며 내가 완전히 이해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거야.

 

그러면 교수 얼굴이 더욱 환해지거든.

자신의 설명이 훌륭해서 어려운 이론을 이해시켰다는 착각때문에 기쁘다는 표시지.

 

그 때 한 마디 하는 거야. 당신의 설명이 너무 훌륭해서 내가 이해할 수 있었다고, 너무 고맙다고 한 마디 해주고 나오면 그 과목은 A+야. 그 교수는 절대 나를 잊어버릴 수가 없게 되거든.


- 영어도 잘 못하는 내가 미리 공부해서 완전히 이해하지 않고 수업에 들어가면 어떻게 수업내용을 이해하냐? 

불가능하거든. 다 미리 공부해놓고 들어가는 거지. 내 졸업점수는 3.75야. 원래는 4.0이 넘어야 돼.

선수과목(Pre-requisite)인 테크놀로지Ⅰ을 듣지 않고 테크놀로지 Ⅱ를 들으면 아무리 시험을 잘 봐도 B밖에 안 주는 거야. 그러니 4.0을 넘을 수가 있었겠어?

그러나 학점 잘 받자고 4학기 다 공부할 수도 없고.


- 교수들이 큰 프로젝트들은 한 두달 정도의 기한을 주고 내 주거든. 다른 사람들은 보통 1~2주 남겨 놓고 시작하는데 나는 바로 시작하는 거야. 예를 들어 컴파일러를 작성하라는 프로젝트를 받았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바로 시작했어. 끝내고 나니까 그게 제대로 동작하는지 보고 싶은 거야. 그래서 프로그램을 하나 만들었어. 그랬는데 안 돌아가는 거야. 당연하지, 새로 짠 프로그램이 단번에 제대로 동작하는 게 있냐? 디버깅을 해야잖아? 그래서 디버거도 만들었어.

프로젝트 하나에 세 가지를 제출하는 거야. 교수가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아무리 친구사이지만 이런 사람을 존경하지 않을 수 있을까?


<후기>

2007년 말 어떤 빌리언 컴퍼니가 1억 2천만불을 준다는 데도 팔지 않았던 회사를 내가 쫓겨난 후, 2년도 채 안 되어 작년 말 5천만불 정도를 받고 팔았습니다. 그 친구가 70% 이상의 주식을 가지고 있었으니 친구는 3천만불 이상을 챙겼을 겁니다.

 

망하지 않고 팔리는 바람에 저도 다행히 몇 만불은 챙길 수 있었지요. 자기 혼자 시작해서 한 때는 전세계에 400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리기도 했고 연말이면 보너스 잔치를 벌이기도 했었지만, 잘못된 인재의 선택과 경영으로 경제위기를 당하자 하루 아침에 휘청하더군요.


그 친구는 더 이상 촌놈이 아니었습니다. 한국말을 할 때는 더듬던 말 버릇도 영어는 유창하게도 참 잘했습니다. 직원들을 강당에 모아놓고 Townhall Meeting을 할 때도 반백의 머리칼을 넘기며, 패셔너블한 정장을 입고 유머를 적당히 섞어가며 Address를 하는 멋진 모습을 보곤 했었지요. 그리고 그런 그의 멋진 모습을 보는 저는 같은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에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해인가는 유명한 경영인 모임에서 뉴저지의 그해 최고경영인으로 수상한 적도 있습니다.


그 친구를 보면 성공의 가장 중요한 팩터는 집중과 몰입인 것 같습니다. 그 친구가 일을 할 때는 옆에서 싸움이 나도 모를 정도로 집중합니다. 오랜 세월 같이 했지만, 그 친구가 저보다 머리가 좋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다만, 집중과 몰입도에서는 제가 아는 어느 누구 보다도 뛰어났지요.


머리좋은 놈은 노력하는 놈을 당할 수 없고, 노력하는 놈은 재미로 하는 놈을 당할 수 없다는 말은 진리입니다. 아이들을 자신이 하고픈 일을 하도록 하면 그 아이는 집중과 몰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감과 할 수 있다는 신념이 뚜렷했습니다. 그 신념의 뒷받침은 그 친구의 신앙이었는데, 나는 그 누구보다도 든든한 백이 있다라고 이야기하곤 했지요. 든든한 백은 물론 기독교 신자인 그의 하느님이었습니다.


나를 미국에서 살게 해주고 영주권과 시민권을 받게 해준 친구(그 친구는 서류에 사인만 하고 비용은 제가 댔지만), 또 그 덕분에 내 가정에 우여곡절(?)을 겪게 해준 친구, 한 때는 그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다는 생각까지 갖게 해주었던 그 친구가 가끔은 생각납니다. 좀 더 잘했으면 굴지의 회사가 될 수도 있었고, 그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직원들까지 부자로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과 함께.


그래서, 이 글은 그 친구에게 바칩니다.


자식농사 이야기는 아니지만, 공부와 관련있는 이야기라 적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