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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나은 세상을 위하여

한국과 미국에 만난 어글리 코리안

(2011년 9월 22일)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계산대 밖에서 지루하게 기다리다 나타난 집사람을 보고 물었다.


“내 차례가 다 되었는데, 어떤 노부부가 새치기를 하는 거예요. 그것도 아주 보란듯이 ‘이렇게 줄이 긴데 어떻게 줄을 서서 기다려. 그냥 앞으로 갑시다.’ 하면서. 그래서 새치기 하지 마시라고 말하려는데 뒤에 있던 할머니가 내 소매를 잡으며 하는 말이, ‘망신당하기 싫으면 그냥 참으세요. 저 사람들 예순 아홉 살 되는 이웃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인데 억지 부리기로 이 동네에서 유명해요. 그냥 참고 못 본 체 하는 게 최선이에요.’ 하는 거야. 참, 내 기가 막혀서. 이 미국 땅에도 저런 막 되 먹은 사람들이 있나 봐요.”

 

집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나는 그냥 못 들은 척 쓴 웃음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의 가든 그로브라는 동네에 한아름이라고 하는 한인 슈퍼가 새로 개장했다. 영어로는 ‘H Mart’ 라고 하고, 중국어로는 ‘韓亞龍’ 으로 불리는 상점이었다. -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미국으로 흘러들어와 생긴 기업으로 그 아들 전재용씨가 실제 오너라는 소문은 미국 한인사회에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하다.


미국에 정착했던 1998년에도, 내가 살던 뉴저지에 한아름이 있었다. 당시에는 100불 어치를 구입하면 쌀 한 부대를 거저 주었고, 50불 어치를 구입하면 고추장 한 통을 무료로 주기도 했었다. - 언젠가 부터 이런 무료행사는 슬며시 사라졌다. 차로 40분 이상 운전해서 장을 보곤 했는데, 발 디딜 틈이 없이 붐벼도 한 달에 한번 이상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10여 년 동안 ‘한아름’은 한인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면 미국 전역에 생기지 않은 곳이 없었다. 뉴저지 매장은 더 크게 건물을 마련해 이전을 했고, 조지아 주 아틀란타, 버지니아, 시카고, 덴버, LA 등등...


이야기가 본론에서 벗어났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한아름 가든 그로브 매장이 개장한다는 광고를 보고, 당시에 거의 실업자 신세인지라 시간이 남아도는 나는 집사람과 데이트 겸, 돈 안드는 나들이 겸해서 갔던 것이었다.


개장 첫날에 주는 사은품이 탐이 났는지 아니면 첫날이라 크게 세일할 것을 기대했는지 평일 오전인데도 많은 사람들로 붐벼 모자란 쇼핑카트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하다시피 했고, 10여 곳이 넘는 계산대마다 4~50명 이상 길게 줄을 서서 통로가 막혔다.


집사람이 줄을 서는 것을 보고, 나는 밖으로 나가 기다렸던 것인데 30분도 더 지나서 나타난 집사람의 이야기다. 가끔 무례한 중국인들 인도인들을 경험하고 흉보는 한국분들을 보는데, 못된 한국인들도 그에 못지 않다는 생각이 들며 쓴웃음이 난다.


기억을 20여 년 전으로 돌려본다.


정확한 연도는 생각나지 않지만, 대전 엑스포가 끝나고 일반인에게 개방했을 때, 모친과 식구들을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다행이 친한 친구가 그 부근의 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숙박은 걱정하지 않고, 프라이드라는 작은 차를 타고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아이 셋과 집사람 그리고 모친이 동행했다.


대기업의 간판을 달고 있는 유명한 테마관은 2시간 넘게 기다리기도 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비오는 날이었다. 모친과 아이들을 대신해서 줄을 서며 차례가 되길 기다렸다. 줄서기가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자 많이 입구에 가까이 갈 수 있었다. 그러자 모르는 사람들이 내 앞 뒤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두 시간 이상 기다렸으니 웬만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다 낯이 익어 있었다.


소위 말하는 새치기였다. 화가 난 나는 어디서 새치기 하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줄을 서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바보 멍청이들이냐고 멱살을 잡았지만 그들은 오히려 더 당당했다. 자기는 시골에서 올라왔고 죽어도 이걸 다 보고 집에 가야겠다고 큰소리쳤다. 줄을 서면 오늘 중으로 다 볼 수 없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더 큰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경찰을 부르던지 폭력을 행사하던지 마음대로 하란다. 자기들은 새치기를 해서라도 볼 테니까. 그리고 당신 뒤로 가면 되지 뭐가 혼자 잘난 양 큰소리를 치냐고 오히려 대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한번에 입장하는 관람객이 3~4백 명이 되다보니 입구에서는 종종걸음을 쳐야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가 느슨해지는 순간, 줄을 섰던 사람들 보다 새치기하는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았다. '막가파'식의 인간들에 어이가 없었다.


15분 정도의 관람을 위해 두 시간 넘게 비를 맞으며 줄에서 기다리는 내 자신과 사람들이 한심했다. 새치기 하는 사람들만 없다면 30분만 기다려도 충분할 것 같았다. 70이 다 된 노모와 국민학교 저학년 아이들은 또 뭔가? 하는 생각에 관람을 하고 줄의 맨 끝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가서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시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젊은 분들이 몇 분 나서서 새치기 하는 사람들을 막아야 합니다. 저 앞에서는 새치기 하는 사람들이 줄 서는 사람보다 더 많습니다."


"아저씨, 보셨으면 그냥 가세요. 아저씨 똑똑한 줄 다 알아요. 됐어요, 그냥 가세요."


그랬다. 도덕과 질서를 안 지키는 사람들 보다 그것을 방관하는 사람들이 더 나쁘다고 생각했다.

질서를 깨는 사람들을 보고도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야말로 그런 사회를 조장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1983년 연수를 갔던 회사가 플로리다 멜번이라는 곳에 있었던 덕분에 디즈니월드에 갔었다. 그곳에서도 긴 줄이 있었지만 모두들 질서를 지키면서 넉넉한 모습으로 기다리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입구에는 철봉으로 미로처럼 연결해 놓아 새치기를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3가지가 다 문제였다.


첫 째는 새치기를 하고자 하는 못 된 인간들이다.

둘 째는 질서를 깨는 사람들에게 분노할 줄 모르는 방관자들이다.

셋 째는 질서를 깰 수 없는 그런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이다.


그리고 그런 세 가지가 결합되어 지금의 문제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대통령이 후보시절 당선을 위해 마음에 없는 거짓말을 했다고 스스로 밝혀도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 나라다. 분노하는 사람이 없으니 국민을 하찮게 여긴다. 그 결과 물가는 뛰고 저축은행 부실사태가 불거져 온 국민이 고통을 받는 것은 아닌가?


교인의 헌금을 제 주머니 돈으로 사용해도 분노할 줄 모르는 신도들이 조용기 목사를 만들고 자신의 자식에게 교회와 당회장 자리를 세습해주는 목사님(?)들을 양산해 내는 것이 아닌가?


대화와 타협은 모르고 도끼와 망치를 들고 국회 문을 때려 부수는 깡패집단같은 정치인들만 언제까지 탓할 것인가?

작은 질서의 무너짐을 방관하고 분노할 줄을 모르는 우리 모두의 문제가 아닐까?


분노하는 나를 비웃는 사람들을 보면서 당시 다혈질인 나는 생각했었다.

 

- 그래, X팔 이 X같은 나라를 언젠가는 내 떠나리라. 내 새끼들 만큼은 이런 나라에서 살게 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 다짐은 몇 년 후에 실현되었고, 그것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


<후기>

작년에 가든 그로브에 오픈한 한아름에 갔다 온 후 쓰다 만 글을 발견하고 오늘 완성했습니다.

만약에 그 때 집사람과 같이 제가 서있다가 그런 노인들을 발견했다면 어떻게 했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그 옛날처럼 화를 내고 큰 소리로 그 무지한 노인들과 싸웠을까?

답은 'No'입니다.

저도 어글리 코리안의 대열에 들어선 겁니다.


지난 20년 동안 세상풍파에 닳고 닳아 무디어진 것이지요.

복잡한 시비에 끼어드느니 참고 말지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옛날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분노를 모르는 인간은 성숙한 사회인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침을 튀기면서 술자리에서 떠들던 기억들이 지금은 저를 슬프게 합니다.


작년 이맘 때 참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일년에 3~4만 불만 벌 수 있으면 영혼이라도 팔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에어컨 일이었지만, 생각과 달리 제가 할 수 있던 일이 아니더군요.


어글리 코리안 때문에 떠난 한국이었지만 가든 그로브에서 다시 만난 후에 돌아온 셈입니다. ㅎㅎㅎ


- 제주의 가을을 소개합니다. 성산 일출봉에서 내려다 보았습니다.



- 서귀포에 있는 실외 라이브 카페입니다. 무인카페를 운영했던 분이 새로 차렸다는데 잘 될까 걱정이 앞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