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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이야기

입맛

건강에 대한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은퇴했거나 나이가 들수록 중요도는 더해진다. 주변에 이런 저런 병으로 고생하는 지인도 있고, 아침 저녁 식사 후마다 한움큼의 약이 필요한 분도 있다. 특히 재작년에 60대 초반의 나이에 대장암으로 돌아가신 어떤 분을 잊을 수 없다. 며칠 전 인터넷에서 읽은 글, '똥'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순환하는 자연계의 핵심이 '똥'이라는 점에서 크게 공감했다. 다행인 것은 '생로병사'와 같은 TV방송으로 건강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고, 보험으로 의료혜택을 받기 어렵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100세 시대'라고 매스컴에서 떠든다고 해서 누구나 100세를 사는 것은 아니다. 오바마가 40대에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고 누구나 40대에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니잖은가. 또 장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가 되었든 건강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에 동의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 거다. 따라서 기대수명보다는 건강수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불행하게도 한국인의 평균 건강수명은 100세가 아니라 아직까지는 70대 초중반에 불과하다.

 

아무리 건강정보가 넘쳐나더라도 약장사들의 엉터리 정보도 많을 뿐더러, 물려받은 유전자나 체질에 따라 호불호와 건강정도가 다 다르기 때문에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하기 힘들다. 적지 않은 세월을 살면서 겪은 경험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이 글도 그런 맥락에서 경험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누구나 10대 시절의 경험이 있다. 수업을 마치고 무거운 책가방을 짊어지고 집에 돌아오면 먹을 것부터 찾았다. "엄마, 배고파!"하고 외쳐보지만 엄마가 없다면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니 혼자서 부엌의 찬장을 뒤지는 수밖에 없다. 이때 엄마가 몰래 감춰놓은 설탕이나 꿀, 참기름 등을 발견하는 횡재(?)를 경험하는 수가 있다. 부뚜막에 앉은 채로 설탕을 수저로 퍼먹었던 기억이다. 그때는 왜 그렇게 단 것이 먹고 싶었을까.

 

1983년 회사에서 보내준 연수로 처음 미국을 방문했을 때 '던킨도넛'에 들렸던 적이 있다. 종업원이 말하는 도넛 이름이 낯설기만 해서 손가락질로 주문했었다. 한입 베어 물자 얼마나 달았던지 숨이 턱하고 막힐 지경이었다. 돈이 아까워 주문한 세 개를 억지로 먹었는데, 한동안 속이 니글거렸고 나중에는 설사까지 했다. 그때는 왜 그렇게 단 게 싫었을까. 가난한 나라에서 온 연수생이 주로 사먹은 음식은 맥도널드 햄버거였지만, 혹 가다 레스토랑에서 먹는 음식은 맛이 너무 짰다.

 

1990년대 말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오버타임으로 밤을 새울 때면 아침에 누가 던킨도넛에서 몇 다즌의 도넛과 박스에 든 커피를 사왔다. 시장기 탓에 조심스럽게 한두 개를 집었다. 옛날 기억은 가장 달지 않은 것을 찾게 만들었다. 쓴 커피 탓인지는 몰라도 먹을 만했다. 먹을 만할 뿐만 아니라, 아무거나 집어도 숨이 막히지도, 속이 니글거리지도, 설사도 하지 않았다. 던킨도넛에서 도넛 제조법을 바꾸지 않았다면, 바뀐 것은 내 입맛임에 틀림없다.

 

1970년대 군대생활 중에는 항상 배가 고팠다. 훈련소 시절에는 특히 심했다. 바짝 든 군기가 배고픔을 잊게 만들었지만, 땅바닥을 박박 기다보면 식사하고 한 시간도 안 되어 허기를 느꼈다. 자대에 배치되자 자유배식을 했다. 마음껏 풀 수 있던 밥만큼은 식판 위에 최대로 담았다. '짠밥'이라고 불렀던 군대 밥의 맛은 상관없었다. 움직이기 거북할 정도로 위를 잔뜩 채워야 직성이 풀렸다. 졸병신분을 벗어났을 때 가장 맛있었던 것은 PX에서 파는 고추장 통조림이었다. 작고 납작한 캔 속에는 볶은 고추장이 들었는데 '짠밥'에 이걸 얹어 비벼 먹으면 일품(?)이었다. 군대에서 체중이 10킬로 이상 늘었다.

 

1960년대 '아지노모도'라는 일본말로 불리는 조미료가 있었다. 모든 음식에 이걸 사용하는 엄마를 보고 필수품으로 알았던, 소위 'MSG'라는 것이다. 물론 엄마는 아주 귀한 물건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아주 조금씩 넣었다. 그러다가 가끔 사고도 났다. 조금만 넣는다는 게 실수로 쏟은 것이다. 그럴 경우 그 찌게나 국은 너무 달아서 속이 미식거렸다. 대학시절이 끝나갈 무렵, 친구 부모님이 종로 삼각동에서 삼겹살집을 시작했다. 어느날 근처를 지나다가 이른 시간에 들렸더니 친구 어머님이 깍두기를 담고 계셨다. 커다란 함지박에 주사위처럼 썬 무 조각을 고추양념과 버무리던 어머니는 마지막에, 커다란 '아지노모도' 봉지를 통째로 넣으셨다. 그때는 이미 MSG의 유해성이 알려져 있어서, 유식한(?) 아들은 엄마에게 사용하지 못하게 강요했던 때였다.

 

지난주에 본 '생로병사'에서 탈북주민들에게 한국음식에 대해 묻는 것을 보았다. 탈북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국음식이 너무 달거나 짜다고 불평했다. '하나원'을 나와 처음 먹어본 육개장이 너무 달아서 몇 숟갈 못 먹었다는 여성도 있었고, 한국음식을 먹으면 한동안 속이 니글거린다는 남성도 있었다. '던킨도넛'을 처음 먹었을 때의 나와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그들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 음식에 곧 익숙해질 것은 틀림없다.

 

세상만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도 변한다. 성격도 바뀌고 체질도 달라지며 입맛도 변한다. 특히 입맛은 길들여지는 습관이다. 외식이 연례행사와 다름없던 과거에는 엄마의 손맛에 길들여졌지만, 집밥보다 외식이 흔한 요즘에는 사회에서 원하는 입맛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 영업과 이익이 최우선인 가공식품과 음식점은 대중의 선호에 집중해서 미각을 자극하는 설탕과 소금을 충분히(?) 사용한다. 당과 나트륨의 과도한 섭취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이제 상식이 되어, 선진국에서는 이에 대한 규제를 법제화하고 있다.

 

입맛이 중요한 것은, 유전자, 운동과 함께 먹는 음식이 건강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김치조차 물에 씻거나 부모가 빨아주지 않으면 매워서 먹지 못했던 어린아이도, 자극적인 맛에 길들어진 어른이 되면 더 매운 것을 찾고, 더 짠 것과 더 단 것을 찾는다. 영양소는 없고 칼로리만 있는 가공식품과 자극적인 맛에 집중하는 음식점의 음식이 건강에 좋을 수 없다. 건강한 체질이나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좋은 유전인자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기대수명이 아니라 건강수명을 위해 입맛을 바꾸고 꾸준한 운동으로 스스로 건강관리를 하는 도리 외에는 없다.

 

바깥 날씨에 별 문제만 없으면 아무리 귀찮더라도, 이마에 땀이 흐를 때까지 새벽에 뛰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후기>

건강 하나만큼은 자신있다고 말하는 분이 있는데 어리석은 소리입니다. 나이가 들면 건강은 하루 아침에 훅 갈 수 있다는 걸, 많은 선배님들이 체험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겸손한 자세로 소언다행 (少言多行)과 소노다소(少怒多笑)하면서 건강한 2017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나이들어 불행하게도 건처재사우(建妻財事友)를 다 충족할 수 없다면, 건강과 와이프만이라도 확실하게 챙기시기를,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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