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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빗나간 모성애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그 친구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성(姓)이 ‘황’이라는 것만 생각날 뿐. 그는 아이스하키 선수로 입학한 친구였다. 당시 그 고등학교는 6대1이 넘는 후기 최고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내가 5회 졸업생일 정도로 신생이었던 학교는 별 볼 일없는 축구부도 있었으나, 아이스하키는 대회마다 중동고등학교와 우승을 다투곤 했다. 1970년대 초 아이스하키 팀을 갖고 있는 학교가 몇 개 없었던 탓이 컸을 거다.


운동 특기자였던 황은 일주일에 한두 번 교실에 들어왔을 뿐이어서 얼굴은 알았지만 친하게 지내거나 말을 건네는 사이도 아니었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입영열차 안에서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다 입대를 했으니까, 고등학교 1학년 이후로 그를 본 기억이 없었으니 6~7년 만의 조우였으나, 금방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만큼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졸업 후 고려대학 아이스하키 팀에 스카웃된 그는 4년 동안 연고전을 승리로 이끈 장본인이었으며 국가대표 최고 공격수로 뉴스에 가끔 오르내렸다.


논산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도 내가 먼저 그를 알아보았을 거다. 어쨌든 우리는 겁을 먹어 잔뜩 주눅이 든 상황 속에서도 고등학교 동창으로 나눴던 대화를 아직까지 기억하는 까닭은, 그때 들은 이야기가 다소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OO공사에 입사해서 다니다 입대한다는 내 말에, 거의 우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스하키를 한 게 지금처럼 후회된 적이 없어. 하키는 군대에도 팀이 없고, 실업팀도 없잖아. 앞날이 막막해. 운동을 하려거든 축구나 배구 같은 인기종목을 했어야 했는데…” 비록 비인기 종목이었으나, 기억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꽤나 유명했던 국가대표 주전선수가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비싼 장비를 필요로 하는 아이스하키는, 특히 당시에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고급 스포츠였다. 그가 부잣집 아들인 것은 그가 입은 교복이나 교실에서의 행동거지로 알 수 있었다. 물이 빠져 희뜩거리는 교복을 입고 다니는 나에 비해, 그는 방금 다림질한 것처럼 윤이 나는 고급 천으로 된 교복을 입었다. 담임을 비롯해서 학교 선생들은 그의 출석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학정원의 두 배수만 예비고사(지금의 수능시험)를 합격시켜 대학에 지원할 자격을 주었던 우리 시대의 입시제도에서, 예체능계는 일반에 비해 합격점이 한참 낮았다. 그가 고대에 진학한 것으로 보아 예비고사는 합격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지난 4~50년 동안 상전이 벽해가 되었다는 표현이 부족할 만큼 세상은 크게 변했다. 대학입시도 그렇다. 예전에는 공부 못하는 친구들이 지원했던 예체능계가 지금은 일반보다 더 어려워졌다고 한다.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 같은 학교는 서울대만큼이나 들어가기 힘들다고 들었다. 무식한 탓에 승마가 스포츠라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고등학교 성적이 꼴찌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최순실 조카나 딸이 연세대나 이화여대에 들어간 것을 보며 입영열차에서 만났던 동창생이 떠올랐다. 말이 필요한 승마는 비용 면에서 40년 전 비싼 장비가 필요한 아이스하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친구가 예비고사 합격여부에 관계없이 고대에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국대급 실력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했다.


아들 녀석은 고등학생 때, 방과 후 학교활동으로 야구를 했다. 골프를 추천했으나 그런 인기 종목은 정원에 비해 지원자가 너무 많아 순서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 녀석의 변명이었다. 미국에서 아이를 키워본 사람은 아는 이야기지만, 좋은 대학에 가려면 학교성적이나 수능(SAT)성적만큼 학교활동도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과 다른 것은 돈이 거의 안 든다는 거다. 유니폼부터 모든 장비는 학교에서 준비한다. 아들에게도 야구클럽 정도만 사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승마활동이 있는 학교라면 말이나 승마장도 학교에서 준비해서 학생이면 누구나 동등한 기회를 줄 것이다. 학부형으로서 문제는 아들의 라이드(교통편)였다. 연습이나 시합이 있는 날은 스쿨버스를 타지 못한 녀석이, 라이드를 달라고 아직 퇴근시간이 안 된 회사로 전화해서 귀찮게 했다. 그때 든 의문은 라이드조차 줄 형편이 안 되는 부모는 어떻게 할까 하는 것이었다.


이웃이었던 박 씨의 막내아들은 레슬링을 했는데 아들의 후배였다. 박 씨는 세탁소를 운영하고, 부인은 네일가게에서 일했는데 거리상 아들에게 라이드를 줄 수가 없었다. 팀플레이가 아닌 레슬링은 정말 힘든 운동이다. 그 아이는 연습 후에 지친 몸으로 몇 마일을 걸어서 집에 갔다. 나중에 그 아이는 와튼 스쿨에 진학했다.(관련 글 보기) 문제는 이런 학교활동을 하는데 학교성적이 중요하는 것이다. 즉 일정수준 이하인 학생은 방과 후 활동을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운동을 하고 싶은 학생이라면, 공부가 아무리 싫더라도 억지로라도 해서 일정수준에 도달해야만 한다.


최순실의 딸이나 조카는 공부는 싫고 대학졸업장은 받고 싶어서 승마라는 스포츠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운동에 자질이 없더라도 잘 훈련된 좋은(비싼) 말을 사면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거기까지는 돈만 있으면 가능했을 것 같기는 하다. 교수가 리포트를 대신 써주고 시험도 대신 치러주었다고 전해진 정유라도 대단하지만, 연세대를 무사히 졸업한 장시호는 더 대단하다. 그렇게 졸업이 가능할까는 정말 의문이다. 한국은 공부하기는 싫고 대학은 가고 싶은 학생들이 대학을 가는 수단으로 운동을 선택한다면, 미국은 운동을 하고 싶은 아이들이 운동 때문에 공부를 한다. 미식축구나 농구를 하고 싶은 열악한 환경의 흑인들이, 대학에 가고 싶다면 운동실력도 중요하지만 학교성적도 B는 유지해야 한다.


정 공부하기 싫으면 대학에 안 가면 된다. 올림픽 금메달 28개로 전무후무한 기록의 소유자인 미국 볼티모어 출신 펠프스(Michael Phelps)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도 역사상 최고의 수영선수가 되었다. 정유라 입시비리 사건은 한국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실력보다는 간판이 중요하고, 내용보다는 형식이 중요하며, 본래 자기 모습을 보여주기 보다는 미용과 성형시술이라도 해서 남에게 잘 보이는가에 목숨을 거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야말로 몹쓸 병이다.


근검절약을 미덕이라고 강조하고, 허례허식과 사치를 사회의 공적이라며 척결대상으로 삼았던 박정희 대통령도 고치지 못했던 한국병이, 이제는 치료가 불가능한 수준까지 오는 바람에 이런 일이 터지지 않았나 싶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학교에 출석하지도 않고 졸업시키겠다는 상상을 했을까. 정말 엄청난 최순실이다. 빗나간 모성애가 아이를 19살 미혼모가 되도록 망쳐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고졸도 아닌 중졸 학력으로 만들었으니.


<후기>

뉴스가 이렇게 재미있기는 난생 처음입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세 달째 상상을 초월하는 소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어떤 고전이나 대하소설도 작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실화에는 못 미칠 것입니다. 주말마다 수백만 촛불행진이 이어지는 것보다는, '권선징악'이라는 인간 본연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주에는 저도 제주시청에서 열리는 촛불집회에 참석해서, 문정현 신부님 옆자리에도 앉았습니다.


엊그제 벌어진 구치소 청문회에서 묵비권으로 일관하던 최순실이, 딸 정유라 이야기에 눈물을 흘렸다는 뉴스를 보고 생각한 것을 글로 옮겨 보았습니다. 그녀는 지금도 이화여대에 딸이 정당하게 입학했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 짐작도 못하겠습니다.


입영열차 이후로 황군은 다시 만난 적이 없습니다. 40년에 가까운 세월을 그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요? 학교 체육선생이나 지도자가 되었을까요? 지금은 60대 초로가 되었을 그의 모습이 정말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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