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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백인의 나라, 미국

설마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도널드 트럼프가 힐러리 클린턴을 여유 있게 따돌리고 미국 대통령이 된 것이다. 힐러리의 당선을 결정적이라고 예측했던 세계적인 언론들과 정확하기로 명성이 높은 여론조사기관들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그의 선거구호(Campaign Slogan)는 'Make America great again'이었다. 이는 36년 전 레이건 대통령의 슬로건이었던 'Let's make America great again'을 모방한 것으로, 우연찮게도 그들의 퍼스트 네임도 스펠링 하나('R'과 'D') 차이다.


그의 연설 때마다 반복하는 'America First(미국우선주의)'를 보고, 그가 당선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했었다. 베트남 전쟁부터 최근의 이라크 전쟁까지 미국이 참여하여 천문학적인 전비로 국력의 고갈을 초래한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게다가 베트남 전쟁도 불필요한 전쟁이었지만 이라크 침공의 원인이 된 대량살상무기(WMD)도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이라크 전(戰)의 결과로 테러전문 군사조직인 IS까지 생겨 미국인들의 피로감은 극에 달한 상태였다. 공화당이냐, 민주당이냐를 떠나서 누구나 그런 구호를 들고 나왔다면 당선되지 않았을까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런 것만으로는 트럼프 당선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미국이 '백인의 나라'이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백인경찰이 흑인 스나이퍼(Sniper, 저격수)에 의해 조준 사살되는 뉴스를 보고 저학력 백인들이 어떻게 생각했을까. 교육의 나라라고 하더라도 고졸 이하의 저학력 백인인구가 60%를 훨씬 상회하는 것이 미국의 현실이다. 그들이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겠다는 트럼프의 공약에 열광하는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LA에 살 때 경험하고 들은 것을 토대로 - 모두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 정확하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사례를 들어보자. 미국의 모든 집에는 원통형의 가정용 온수 보일러가 있다. 과거에는 설치비용이 300불이었는데 2010년 경 히스패닉 사람들은 100불에 설치한다고 했다. 심지어 80불을 받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백인들에게 견적을 받으면 5~6천 불이 드는 공사도 히스패닉은 2~3천 불에도 기꺼이 한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든 저학력자는 많은 사람들이 장사를 하거나 테크니션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언어가 서툴고 미국에서의 학력이 없는 이민자들도 마찬가지다. 즉 이민자와 백인 저학력자의 이해가 충돌하는 분야가 된다. 300불을 받고 하던 일을 이민자들 때문에 100불에 같은 일을 하게 되었다는 현실을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설명이 필요없다. 테크니션들도 자격증(Certificates)이 필요하다. 장비도 간단하고 비교적 손쉬운 페인팅부터 많은 장비와 전기회로와 화학물질 지식이 필요한 HVAC(Heating, Ventilation & Air Conditioning)까지 많은 종류의 자격증이 있다.


처음에는 헬퍼(Helper) 노릇을 하면서 저임금을 받던 히스패닉들이 현실을 깨달으면서 페인팅 같은 손쉬운 자격증을 취득해서 스스로 사업을 하고, 점점 어려운 자격증까지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캘리포니아 같은 곳에는 멕시코 정부에서 지원하는 기관까지 생겨 그들의 사업을 지원하고 소득을 올리기 위한 방법까지 조언하고 있다. LA에서는 한국기술자의 헬퍼로 일하던 멕시코인들이 자격증을 취득하고 지금은 경쟁자가 되었다. 일하는 자세도 과거와는 다르다고 한다. 고객을 유치하는 방법, 사업을 확대하는 방법까지 배워 일처리도 전과는 달리 깔끔하고 철저하게 하는 업체가 늘고 있다고 들었다. 히스패닉 계가 많은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먼저 시작했지만, 동쪽으로 넓혀 궁국에는 전 미국으로 확대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전보다 훨씬 줄어든 대가를 받는 백인들에게, 멕시코 국경에 거대한 장벽을 설치하겠다는 트럼프의 공약이 허황된 것이더라도 백인 저학력자들을 열광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미국우선주의를 주창하지 않는가. 그들에게 미국은 곧 자기자신들이었을 거다. '미국=백인'이라는 공식을 일깨운 것이다. 물론 이런 견해가 극히 개인적이라고 일축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그분들이 맞을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내가 경험했던 미국은 그랬다.(카펫클리너와 구레나룻에 관한 글 보기)


아무튼 미국인의 선택으로 극단주의자인 도널드(Donald) 트럼프의 시대가 열렸다. 그가 글자 한 자 차이인 로널드(Ronald) 레이건 같이 연임에 성공할지 아니면 단임으로 끝날지 알 수 없지만, 레이건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임기 중에 미국사회의 불평등과 양극화가 더 심화될 것은 틀림없다.(참고1, 참고2 글 보기) 그의 허황된 공약이 실현된다면 무슬림이나 히스패닉을 포함하여 이민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며, 법인세나 소득세 감세정책으로 국가재정은 악화되고, 공공의료보험이나 복지도 축소될 것이다. 오프쇼어링(Offshoring)으로 떠났던 기업이 국내로 되돌아와 생산증가와 고용증대로 이어지는 효과가 있을 수도 있겠다.


한국은 2만 8천 명의 미군주둔에 필요한 비용으로 1조원을 추가로 부담하거나 아니면 미군철수를 지켜봐야 하며, FTA 폐지 또는 개정으로 대미수출이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불법체류자에 대한 단속이 심해지고 그들을 고용하는 고용주에게 불이익이 커지며 추방되는 사람이 늘어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것은 전부 가정이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있다. 트럼프의 선거구호에서 'Great America'는 백인들 중에서도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에게만 해당한다는 것!


<후기>

한국에서라면 트럼프과 같은 비도덕적 인물은 절대로 당선되지 못했을 겁니다. 더우기 성추행을 하고 세금을 내지 않았다면, 한국에서는 군대에 다녀오지 않은 것만큼이나 도덕적 결함으로 볼 테니까요. 그러나 정직하지 않는 것만큼은 용서되지 않는 문화의 미국에서, 트럼프가 당선된 것은 정직하지 않다는 점에서는 클린턴도 오십보 백보 수준이었기에 가능했다고 판단됩니다. 그것도 정치인이 말입니다.


그런 이유로 버니 샌더스가 민주당 후보가 되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거라는 아무 소용없는 추측도 해봅니다. 힐러리는 '여성의 유리천장'을 핑계로 삼았지만, 솔직하지 못한 자신의 이미지를 탓해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지난달 사위와 함께 남산길을 걸으며 미국의 인종차별에 대해 의견을 나눴던 적이 있습니다. 1982년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위가 느끼는 인종차별은 제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심각했습니다. 다인종 교회에 다니는 사위가 특히 흑인들이 느끼는 인종차별에 대해 사례를 들어 말하는 것을 듣고, 이민1세대로서 생각의 한계가 느껴졌습니다. 제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던 겁니다.


굳이 이민을 가서 아이들을 마이너리티로 살게 만든 것이 후회스럽다는 내 말에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뇨, 그것은 잘하신 겁니다. 아버님이 이민을 했기에 제가 와이프를 만났잖습니까?"


▼ 남산을 오른 기념으로 포즈를 취한 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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