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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졸음운전

30도를 웃도는 지독한 더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뉴스에서는 지구 온도를 측정한 이래 가장 뜨거운 7월과 8월이라고 한다. 광복절로 이어지는 지난 주말은 물론이고, 고속도로는 피서 인파를 나르는 차량으로 꽉 막힌다는 장면을 전하며 TV 뉴스의 앵커는 처참한 교통사고 장면도 함께 해설한다.

지난 일요일에도 그랬다. 여름을 맞아 서울에서 고향을 방문한 36세의 아들이 두 누나(41, 39세)와 함께 엄마(61세)를 모시고 여수 ‘향일암’에 나들이 가다가, 졸음운전을 하는 화물차(53세)에 받혀 엄마는 현장에서 사망하고 남매들은 큰 부상을 입는 사고를 당했다.(관련기사 보기) 사고가 난 ‘마래터널’을 지난 봄 여수 여행을 했을 때, ‘경주애인’님 부부와 함께 몇 번을 지나간 곳이기도 하다.

지난 달 셋째 일요일인 17일에는 영동고속도로 ‘봉평터널’에서 관광버스 운전사(57세)가 졸음운전으로 서행하는 차들을 들이받는 사고로, 네 명의 21살 꽃다운 청춘들이 목숨을 잃었다. 불과 4주 만에 유사한 사고가 또 일어난 것이었다. 이쯤 되면 안전 불감증이라는 단어로 사고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게다가 희생자들의 사연들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여수 사고 일가족은 엄마가 홀몸으로 4남매를 키웠다고 한다.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41살의 장녀를 포함 4남매 모두 결혼하지 못했고, 장애인인 장남만 몸이 불편해서 집에 있는 바람에 사고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성치 않은 몸으로 엄마의 장례를 준비해야 했다.

영동고속도로에서 사망한 4명의 여자아이들의 사연도 이에 못지않다. 여고 동창생인 이들은 중국에 유학 갔던 친구가 방학을 맞아 귀국하자, 아르바이트 해서 번 돈으로 강릉 바닷가를 갔다 오는 길에 희생되었다. 한 아이는 편모 가정에서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하며 대학에 갈 희망으로 열심히 살았다고 전한다.

세월호처럼 무슨 사고가 나면 피해자들은 힘없는 서민들이고 약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보다도 왜 이렇듯 처참한 사고가 자주 발생할까?

미국이민 초창기에 졸음운전 했던 기억을 회상해본다.

1998년이었던 것 같다. 전 직원이래 보았자 20명이 약간 넘는 작은 회사가 미국 굴지의 회사에서 수백만 불이나 하는 큰 프로젝트를 따냈다.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A회사에서 보스턴에 있는 B회사를 머지 해서, B회사 일부 회사 건물이 사라지게 되었다. 없어지는 회사의 모든 종이 서류를 전자서류로 만들어 아카이브 하는 프로젝트였다.

중국인이 경영하는 컴퓨터 도매상에서 부품을 사다가 조립해서 쓸 정도로 영세한 회사였지만, 세계적인 회사에 조립 컴퓨터를 갖고 가서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처음으로 ‘Compaq’이라는 당시로는 최고 브랜드의 ‘서버’를 만 불이 넘는 큰돈으로 구입해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

그리고 아침에 렌트한 카고밴에 서버와 함께 각종 장비를 가득 싣고, 프로젝트 총책임자인 부사장과 같이 보스턴으로 향했다. F-1 취업비자 스폰서 해주는 것만도 너무 고마워서, 피곤해서 운전을 못하겠다느니 하는 사치스러운 엄살을 부릴 처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사장이 나를 채용하는 것이 못마땅하게 여겼던 터라 그에게 주눅이 들어 약자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운전을 시작하자 너무 졸렸다. 287노쓰 방향으로 가다가, 코넥티컷에서 95번으로 바꿔 타니까 트래픽까지 심했다. 이곳저곳에 비즈니스 관련 전화를 하느라고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않는 부사장에게 운전을 부탁할 수도 없어서, 입술과 혀를 깨물고 허벅다리를 꼬집어가며 졸음을 이겨내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Hey, Duke, You crazy! What are you doing now?” 트래픽에서 벗어나 한가해진 도로에서 순간적으로 그만 깜박 졸고 말았다. 깜짝 놀라 앞을 보니, 1차선으로 가던 차가 왼쪽으로 차선을 벗어나 중앙분리대를 스치듯 가고 있었다. 다행이었던 것은 왕복 6차선의 도로는 중앙분리대가 있어 반대편으로 넘어갈 수도 없었다는 것과, 1차선과 중앙분리대 사이에 공간이 충분해서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혼자가 아니었다는 거다. 물론 혼자였다면 중간에 차를 세우고 잠깐이나마 눈을 붙였겠지만.

그러고 나서야 부사장에게 핸들을 맡기고 잠시나마 졸 수 있었는데, 이때 배운 교훈은 지독하게 졸릴 때는 10분, 아니 5분만 눈을 붙여도 충분히 정신이 맑아지며 피로가 가시고 몸이 개운해진다는 것이다.

여수와 영동고속도로에서 사고를 낸 운전자들은 둘 다 50대였으며, 재수 없게도 둘 다 선탑자 없이 혼자 운전하고 있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직업 운전수인 이들이 졸음운전의 위험을 몰랐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비상식적인 상태의 운전으로 큰 사고를 냈고, 엄청난 비극을 초래했다. 왜 그랬을까?

내 경험에서 원인을 찾아본다. 이들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약자가 아니었을까? 도저히 운전할 수 없는 상태에서 운전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 도저히 댈 수 없는 시간임에도 부정할 수 없는 ‘을(乙)’의 입장은 혹시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증거가 있다. 관광버스 운전사는 전날 버스에서 잤다고 한다.

제도적 문제점은 없었을까. 미국에서 졸음운전은 DUI(Drive Under Intoxicating or Influence)와 같은 중범죄로 다스린다. 한국에서는 음주운전만 아니면 아무리 사람이 죽는 교통사고라도 대부분 집행유예의 가벼운 처벌이 주어진다. 무고한 희생이 따르는 사고에 비해 가해자의 처벌이 너무나 가볍다. 재수 없이 그 관광버스나 화물차 앞에 가고 있었다면, 누구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

뉴저지에서 보스턴까지 적게는 4시간에서 6시간까지 걸리는 그 거리를 4개월 동안 무수하게 오가며 프로젝트를 위해 일했다. 어떤 날은 새벽 6시부터 자정까지 일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운전하며 피곤할 때는 수시로 길가에 세워놓고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며 다녔다. 2008년 경제위기가 닥치고, 레이오프 시킬 기회가 오자 그 부사장이란 친구는 바로 나를 짤랐고 그 결과 지금 제주에서 외국인 아닌 외국인으로 살게 되었다.

그런 게 인생이다.


<후기>

폴이라는 그 부사장 친구도 회사가 다른 회사에 넘어간 후에, 사전 예고 없이 레이오프 되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레이오프 시킬 때는 HR부서에서 IT부서에 먼저 통보합니다. 왜냐하면 이메일 어카운트를 비롯해서 회사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폴에게 그런 작업을 했던 직원으로부터 몇 년 전에 들었는데, '폴의 어카운트를 삭제하는데 기분이 참 묘했다'고 전하더군요.


그 녀석에게 잘 보이려고 최선을 다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후회와 함께 화가 납니다. 살면서 만약 어디선가 만나게 된다면 욕이라도 한 번 시원하게 해주고 싶습니다. 하하하, 제가 속이 너무 좁지요?


다음에도 운전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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