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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미국의 인종갈등을 보면서

“연탄들은 안 돼! 걔들은 인간이라고 할 수가 없어! 연탄들 상대로 장사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몰라요!” K가 말을 꺼내자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경험담이라며 거들었다. 20여 년쯤 된 이야기다. 이민 초기에 친구를 따라 뉴저지 ‘엘리자베스 한인교회’에 반 년 정도 다녔던 적이 있었다. 수요 예배 후 ‘남선교회’ 주축 멤버들이 체육대회 겸 야외예배 준비를 하던 중에 잡담으로 흘렀다.


- 내가 처음에 엘리자베스에 살았잖아. 하루는 거실에서 밖을 내다보며 담배 피우고 있었는데 어떤 깜둥이가 스트릿 파킹을 한 내 차 주위를 맴돌더니 드라이버로 차 문을 따는 거야. 나가기도 귀찮아서 밖에 대고 꺼지라고 소리를 쳤지. 그랬는데도 나를 빤히 보면서 하던 일을 계속하는 거야. 그래서 야구 방망이를 들고 쫓아 나가니까, 그제야 실실 웃으면서 도망가더라고. 뛰어 가지도 않아, 그냥 걸어가. 그게 바로 연탄들이야. 몰랐으니까 싼 맛에 거기 살았지, 반 년도 못살고 이사 나왔어.


흑인을 연탄으로 호칭하며 비하한다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엘리자베스 시(市)는 뉴저지 최대도시 뉴악(Newark)과 인접한 곳인데 흑인과 스페니쉬를 비롯한 유색인종이 많이 살며, 범죄율이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오르내리는 도시다. 1번과 9번 국도가 교차하는 지점으로서 인근에 '리버티 국제공항'과 '엘리자베스 항구'가 있고, 뉴욕의 스테튼 아일랜드와는 ‘괴달스(Goethals)’라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군수물자 생산지로 최대 호황을 누렸던 곳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이 말을 받았다.


- 내가 그 근처에서 세탁소를 하잖아. 이 새끼들은 세탁물을 맡겨놓고 찾아가지를 않는 거야. 돈도 안 되고 1년 동안은 갖다 버릴 수도 없으니까, 별수 없이 보관하느라고 공간만 가득 차서 골치 아파 죽겠어. 깜둥이 동네에서는 비즈니스를 하는 게 아냐.


유사한 이야기들이 계속 쏟아졌다. ‘뷰티 서플라이’를 하는 사람은 잠깐만 한 눈을 팔아도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주머니에 머리핀이나 염색약을 몰래 넣는다든가, ‘리쿼 스토어’를 하는 사람은 빤히 보고 있는데도 술병을 들고 그냥 나간다든가, ‘코스트코’에 가면 50센트도 안 하는 캔 맥주를 1~2불이나 주고 사 마시는 종자라든가 하는 그런 식의 비하 발언이었다. 처음 듣는 생소한 이야기에 반신반의하는 이민 초짜를 교육(?)시키려고 과장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민을 생각했을 때는 피상적인 겉모습만 보고 결정했을 뿐, 그 나라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이해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미국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미국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롭게 알게 된 역사와 문화는 매우 불편한 것이었다. 아름다운 나라(美國)도 아니었고 정의나 인권도 애초부터 없었으며, 학살과 유린, 기만과 인종차별만이 존재하는 백인집단의 나라였다. 정의나 인권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와스프(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 중에서도 남성에게만 존재했을 뿐이었다.(관련글 보기)


인종차별 외에도 노동착취, 여성차별, 아동노동 등으로 얼룩진 나라가 미국이었다. 내가 학교에서 배웠던 교과서도 엉터리였다. 링컨이 노예해방을 한 것은 정치적 논리였을 뿐, 흑인인권을 존중해서가 아니었다. - 그렇다고 해서 링컨이 위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링컨 역시 흑인은 여전히 열등하다고 믿었다. 링컨이 노예해방을 선언한 1863년 이전까지 약 350년 동안 흑인들은 동물과 인간 사이의 존재로 인식되며, 미국에서는 법적으로 인간의 지위가 아니었다.


이론적인 법으로만 그랬다는 것이지, 현실에서는 여전히 인간으로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흑인뿐이 아니라 중국인이나 한국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은 누구나 다 같았다. 문명국이었던 일본인들이나 약간 나은 대우를 받는 정도였다. (관련글 보기) 유색인종이 진정한 의미의 참정권을 획득하고 지금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된 것은 불과 50년 정도 되었을 뿐이며, 이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덕분이다. 워싱턴 주 상원의원인 신호범(미국명: Paull Shin) 박사의 자전적 에세이 ‘공부 도둑놈’을 읽으면, 그가 1960대 중반 텍사스에서 군복을 입은 채 백인인 부인과 팔짱을 끼고 호텔을 나서다 백인남성들로부터 이유 없이 폭행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백인여성을 데리고 다니는 동양인에 대한 테러였다.

폴 신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그게 미국이었다. 아주 탁월한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유색인종은 차별 속에서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지금은 그러지 않다고 해서, 혹은 나는 차별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부인하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포수에 쫓기는 꿩이 머리를 눈 속에 처박고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우측 사진: 신호범 워싱턴 주 상원의원)


흑인들이 노예생활을 하는 동안, ‘와스프’들은 무주공산이던 허허벌판 서쪽으로 달려가 깃발만 꽂으면 자신의 땅이 되었다. 뒤늦게 신대륙에 도착한 백인들도 힘들게 살았지만, 노예들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350년이 넘는 노예생활을 끝내고도 100년 동안이나 더 차별 속에서 밑바닥 인생을 살아온 그들이었으니, DNA에 ‘우리는 차별받고 있다’는 특별한 무엇이 있음직도 하다.


2008년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제 미국에서 인종차별은 종지부를 찍었다!’고 선언하듯이 말했다. 그러나 지금 나타나는 현실은 다르다. 겉으로 보이는 인종차별은 없어졌을지 모르지만, 인종 간 갈등은 점점 더 증폭되고 자주 발생하고 있다. 원인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비롯될까? 지금까지 읽은 책에서 몇 가지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1961년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서명된 ‘인종, 종교, 피부색, 출신국가에 따른 고용 차별 금지’에 관한 행정명령은, 1967년 존슨 대통령에 의해 강화되어 ‘소수인종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 제정으로 이어진다. 이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 영향이 컸던 것으로, 백인은 흑인에게 ‘커다란 빚’이 있다는 역사적 사실이 배경이 되었다. 이것은 같은 유색인종인 아세안에게도 큰 혜택이 되어, 정부가 발주하는 모든 입찰에 일정부분 할당이 주어졌고, 아이들에겐 성적이 다소 불리해도 명문대에 입학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 '소수인종 우대법안'에 비판적인 신문의 만평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 정책은 백인들에게 거꾸로 역차별이라는 불만을 초래했다. 성적이 훨씬 우수한 백인학생들이 저보다 못한 흑인에게 밀려 'UC 버클리'에 낙방하면서 소송을 냈고 연방 대법원으로부터 위헌판결을 얻어냈다. 백인들은 환호했다. 이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점점 사회의 주류로 부상하는 유색인종이 백인들에게는 위기위식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압도하는 사회에서는 갈등이 있을 수 없다. 북한이 그런 경우다. 일방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공산당과 갈등을 조장하는 바보는 없다. 한국처럼 여당과 여당이 막상막하거나,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처럼 엇비슷해야 갈등이 생긴다. 작금 미국에서 발생하는 인종갈등도 그런 차원이 아닐까? 대대로 기득권을 누려왔고 우월적 지위에 있다고 믿는 ‘WASP’와 그 부류들이 유색인종의 폭발적인 등장–심지어 대통령까지–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고, 조상 대대로 전해온 DNA에 깊숙이 아로새겨진 차별의식으로 아직도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흑인사회의 의식이 부딪히는 것이다.


다인종 국가 미국에서 백인위주 사회가 무너지면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 미국에서 백인인구가 50% 이하로 전락하는 것도 시간 문제다. 백인들의 위기의식이 커질 수밖에 없다.


<후기>

미국 동부의 주(州)들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서쪽으로 가면서 주의 경계들이 왜 직선이고 카운티들은 네모반듯한지도 한국에 돌아와 미국역사를 들여다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1983년 생전 처음 가본 해외인 미국, 그것도 플로리다 동부 해변에서 본 화려하고 넉넉한 삶, 풍요로운 자연환경에 반해서, 그것을 부러워하다가 결행했던 이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생각하면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제가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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