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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여동생의 아이들

(2011년 7월 23일)

 

코흘리게 꼬마였을 때 보았던 조카 녀석들이 건장한 청년들이 되어 있었다.

하나는 185센티의 키에 서울에 있는 대학(서울대는 아니고?)을 다니고 있고, 다른 녀석은 176센티의 키에 SKY라고 불리는 대학 중의 한 곳에 다닌다.

두 녀석 다 '평생 축구만 하고 살 수는 없나'하고 푸념을 할 만큼 축구를 좋아해서 몸이 탄탄하고 각종 운동을 즐긴다.


8살의 나이차로 대학생이었던 시절, 국민학생이었던 동생이 성적표를 받아올 때면 내게 많이 혼나기도 했었다. 그 동생이 오빠에게 말한다.


- 오빠, 나는 아이들 때문에 속 썩인 적은 없었어. 특별히 과외공부를 시키거나 학원에 보낸 적도 없어. 자기들이 학원에 보내달라고 하면 그때나 보냈지. 남들처럼 아이들 교육에 펑펑 돈을 쓸 만큼 아이들 아범이 버는 것도 아니잖아.


- 큰 아이는 지가 알아서 동네 중학교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오빠처럼 항상 전교에서 10등 안에는 들었어. 나는 아이들이 오빠처럼만 공부하면 된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교회에서도 항상 오빠처럼만 아이들이 공부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었어.


- 작은 아이는 중학교 때 특목고를 가겠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비웃었다니까. 야, 이새꺄 너같은 놈이 어떻게 특목고에 가려고 하느냐고. 그것도 꿈도 크지, XX외고야. 그런데 떡하니 붙은 거야. 오빠, 나는 진짜 걔가 붙을지 꿈도 안 꿨어. 지보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도 떨어졌는데.


- 특목고에 다닐 때도 속으로 걱정이 많았어. 거기는 다 의사나 변호사 자식들이 다니는 데 잖아. 대부분 부잣집 아이들인데, 아이가 기죽을까봐 걱정이 되는 거야. 서울도 아닌 부천에서 25평짜리 주공아파트에 사는 아이는 걔 밖에 없을 걸. 그런데, 오빠, 걔는 천성이 기죽는 거와 거리가 먼가봐. 주위에 아이들이 그렇게 많아.


- 오빠, 있지. 걔가 2학년 때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갔거든. 거기 가서 쓴다고 20만원을 달라는 거야. 그래서 줬지. 그랬는데, 글쎄, 돌아올 때 20만원짜리 내 화장품을 사온 거 있지, 호호호. 지꺼는 하나도 안 사고. 그래서 내가 너는 거기서 어떻게 했냐고 했더니, 돈 많은 아이들 꺼 뺏어 먹었데. 하여튼 웃기는 놈이라니까.


아이들 이야기라면 신이 나는 동생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 큰 아이는 이번 성적이 올 A야. 오빠, 나는 그런 성적표 처음 봤어. B도 하나 없더라니까. 걔는 이번에 3학년 1학기 끝내고 뉴질랜드로 어학연수 간데. 8월 30일 비행기 표 끊었어. 1년 있다 온다나 봐. Working Holiday 비자를 받아서 간다는 데. 학교 등록은 하고 가야 장학금 혜택이 연장된데.


- 작은 아이는 이번에 100% 장학금 받게 되었어. 50% 장학금 받고 있었는데, 이번에 외부에서 어려운 가정의 학생에게 주는 무슨 장학금을 신청했는데, 교직원의 실수로 마지막에 누락된 거야. 그래서 아이가 가서 난리를 쳤나봐. 그랬더니 다음 학기에 100% 장학금을 주겠다고 했데.


위로 오빠만 셋이었던 아이, 오빠들 틈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지냈던 아이, 그래서 어렸을 때는 오빠들이 입던 떨어진 남자 팬티만 입고 자란 동생이었다. 그 동생을 생각할 때면 가슴아린 기억이 몇 편 있다.


공고에나 갔으면 했던 부모의 뜻을 나처럼 거스리지 않고 스스로 여상에 갔던 동생은 졸업하고도 고려대 부설 전문대학인 치기공과에 합격했지만 포기하고 취업을 택했었다. 당시 제대를 하고나서야 그걸 알고 가슴이 많이 아팠다.


조그만 회사에 경리로 취직했다. 어느날 대낮에 직원들 월급을 은행에서 찾아 나오다 사람이 많은 큰 길에서 오토바이 날치기에게 가방을 채였을 때, 그걸 빼앗기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매달리다 폭행을 당해 혼절하고 병원에 입원을 했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아유, 바보같은 년' 하고 눈물이 났다.


결혼한다고 했을 때, 상대가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홀어머니 밑에  공고를 나온 외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아무 것도 못해주는 오빠로서 무능력에 자책감이 몹시 들었다.


두번 째도 아들을 낳고 병원에서 퇴원시킬 시댁 식구가 없어, 내가 거래업체 자가용을 동원해 퇴원을 시킬 때는 불쌍한 동생의 신세에 마음이 찢어졌다. (아들 선호가 있었던 때라) 축하는 못받을지 언정.


동생이 결혼 직전, 울면서 전화를 했다.

- 오빠, 오빠가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 엉엉.


당시 내가 일하던 회사 사무실에 보따리 장수가 자주 찾아 왔었다. 카메라, 시계, 망원경, 성인용품 등 외제물건들을 007 가방에 갖고 다니면서 장사하는 친구였는데, 호기심에 가끔 이용하기도 했었다.

하루는 멋있어 보이는 금딱지 남녀 손목시계가 가방 안에 있었다.

곧 결혼하는 동생이 생각나서 물었더니, '이거, 진짜같은 가짠데, 장과장이 사면 정말 원가로 싸게 줄게' 한다.

부담없는 가격이라 선물로 추가했는데 이게 들통이 난 것이었다.


- 얘야, 혼례용품 다 허식이야. 내가 살아보니까 알겠더라. 너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엉뚱한 곳에 돈 쓰는 것보다 이런 것으로 치루고, 나중에 오빠가 형편이 좋아지면 크게 한번 도와줄게. 오빠가 잘못했으니까 마음 풀어라.

하고 달랬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그 때는 정말 그런 마음이었고, 몇 년 후에 그 약속은 지켰다.


첫째 녀석이 가슴에 선천적 기형을 갖고 태어났다. 탁구공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홈이 가슴 한가운데 있었다. 다섯 살이 되기 전에 수술하면 된다고 했고, 그 수술비를 댔다. 이 녀석은 그 수술 덕에 군대를 면제 받았지만, 당시에는 커서 사람노릇을 제대로 할까 싶어 걱정이 되기도 했었다.


지난 5월초 친구 부친상때문에 올라갔었고, 올라간 김에 며칠 동생집에 있었다.

5월 8일 큰 아이는 아르바이트로 없었고 작은 아이가 아이들 가르쳐 번 돈으로 부모에게 저녁을 사는 자리에 내가 끼었는데, 샤브샤브 식당은 만원으로 대기석에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딸이 없는 동생에게 딸 노릇을 하느라고 그런지 녀석의 수다가 기다리는 내내 계속된다.


- 삼촌, 삼촌, 수학을 못하는 아이들을 보면 이해가 안 되요. 수학이 얼마나 재미있는 건데 수학을 못 하는 아이들 보면 답답해 죽겠어요. 삼촌은 어땠어요. 수학 재미있었어요. 미적분 문제들을 보면 참 신기해요. 그런 문제들이 수학으로 풀리는 것을 봐요. 얼마나 신기한지 재미있어 죽겠어요.


- 우리학교 피아노 동아리에서 2학년 중에는 실력이 제가 짱이에요. 선배들이 제일 잘 친대요. 이번 발표회 때 제가 2학년 대표로 나가요. 피아노로 전공을 바꾸면 안 되나. 난, 피아노가 너무 좋은데. 근데, 삼촌, 의사는 어때요? 의사가 돈 잘 벌잖아요. 재수해서 의대에나 다시 갈까? 그래서 엄마가 좋아하는 돈이나 많이 벌어 오게.


동생이 넘쳐나는 사랑을 품고 끼어든다.


- 오빠, 저 새끼 말 듣지 마. 저 새끼 말 들어주면 정신이 없어. 저럴 때 보면 쟤는 꼭 미친 놈 같다니까.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계속되는 놈의 수다와 맛있는 음식으로 그날 저녁은 배도 불렀고 가족의 정도 불러만 갔다.


한 놈은 밤새 술 마시고 술 냄새 풍풍 풍기며 새벽에 들어와 오후 늦게까지 쳐 자기도 한다. 아르바이트로 아이들 가르치러 가는 시간이 지나도록 쳐 자기만 한다.

한 놈은 새벽 서 너시까지 시험공부를 하다가 두 어시간 자고 졸린 눈 비벼 뜨고 아침에 나간다.


늦은 아침, 식구들은 다 나간 후, 소파에 앉아 하릴없이 TV를 보는 내 옆에 과일쟁반을 들고 동생이 앉는다.


- 오빠, 나는 오빠 아이들이 참 부러웠다. 아이들 예쁘고 명랑하고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 내 아이들이 오빠 아이들 만큼만 자라게 해달라고 기도했어.


나는 속으로 '이제는 하나도 안 부럽다는 이야기지' 하고 심술이 나서 비틀어 본다.


- 아들만 둘이면 '목메달'이란다. 너 앞으로 며느리 얻게 되면 큰 일이다.


- 오빠는. 나는 아이들이 커서 지들 잘 살면 그만이지, 걔네들에게 기대 안 해. 나는 아이들 아범하고 둘이 시골에 가서 오빠처럼 살 거야. 그리고 나는 죽어도 엄마 처럼은 안 살아. 아이들에게 물려줄 것도 없지만, 있어도 안 줄 거야. 다 쓰고 죽을 거야.


- 그래? 너 그럴 자신 있어? 아이들에게 집착 안 하고 살 자신?


- 그럼, 오빠는! 당연하지. 나는 아이들 결혼하면 끝이야. 걔들은 걔들 인생이고 나는 내 인생이지. 그리고 오빠, 나 웃기는 이야기 있어. 나 이번에 권사에 취임하게 됐다. 하하하.


- 야, 이년아. 50도 안 된 년이 무슨 권사냐? 징그럽게, 그건 할머니들이나 하는 거지.


- 글쎄, 사람들이 내가 좋데. 40대 후반에 권사가 내가 처음이야. 교회에서 투표를 했는데, 2차 투표까지 가서 결국 내가 뽑혔어. 웃기지?


그래, 동생아. 네가 그랬구나.

납작한 코에 까무잡잡한 얼굴에 코나 질질 흘리고 징징거리기만 했던 그 어렸던 동생이 아니었구나.

너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훌륭한 엄마였고 아줌마였구나.


그래, 동생아. 네가 그랬구나.

'미'와 '우' 투성이의 성적표를 갖고와 내게 매맞던 그 동생이 아이었구나.

치매걸린 시어머니를 3년간이나 수발들었고, 그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친정엄마까지 치매로 쓰러져 못난 오빠를 대신해 또 3년의 그 모진 세월을 감당했던 강한 여인이었구나.

너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훌륭한 딸이고 며느리였구나.


그래, 동생아. 네가 그랬구나.

너는 철없던 나이 어린 동생이 아니라, 나이만 많고 철없는 오빠들 노릇까지 대신했던 누나같은 자랑스런 동생이었구나.

 

너는 어느 누구보다도 훌륭한 (자식)농사꾼이었구나!


<후기>

자식농사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 가족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번에 돌아와서 조카들을 보면서 자식농사에 대한 비결을 보는 듯 느꼈습니다.

부모의 삶이 자식에게 그대로 투영된다는 것이지요. 문제아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어른만이 있을 뿐입니다.

아이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면 그 원인을 아이들에게 찾지말고 그 부모에게 찾아야 한다는 것이 제가 그동안 살아온 경험과 주위에서 보고 들은 결론입니다.


조카들과 이야기 해보면, 요즘 한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청년실업이라든가 비싼 등록금 이야기는 다른 나라 이야기 같았습니다. 취업걱정보다는 대기업에 취직해서 평생 월급쟁이로 눈치보면서 재미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더군요. 그런 젊은이들과 이야기하면서 우리나라의 장래는 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글을 지난 수요일 생일을 맞은 제 동생 혜숙이에게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