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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아빠, 절대 비밀이에요!

(2011년 7월 16일)

 

- 아빠, 절대 비밀이에요. 아직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되요! 미국의 친구 분들에게 전화가 와도 말씀하시면 안 되요.


한국식 나이로는 28살이니까 옛날 같으면 노처녀 소리를 듣고 부모로부터 빨리 결혼하라는 잔소리를 듣고도 남겠지만, 하는 짓이 어린애같기만 하다.


아이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죄(?)로 일주일에 두어 번 이메일을 보내기도 하고 전화도 하지만, 아이들로부터 메일이나 전화가 오는 것은 거의 기대할 수 없다. 이달 초에 딸 아이로부터 간단한 메일이 왔다.

 

- 아빠, 저녁 9시 경에 전화주세요.


그곳 시간에 맞춰 전화했더니, 운전 중이라고 30분 있다가 하란다.

 

- 저, 이번에 회사를 옮길 거예요. 아직 회사에는 말 안했어요.

 

○ 어떤 회산데

 

- 'C'사요. (지난 날 다니던 회사의 고객으로 조금 아는 회사다)

 

샐러리는?

 

- 50% 더 준데요.

 

그럼, 7만 5천불. 괜찮네. 그 정도면 뉴저지에서 충분히 살지.

 

- 아직, 회사에는 이야기 안 했어요. 15일 텀을 주고 다음 주에 이야기할 거에요. 그리고 일주일 정도 개인 시간을 갖다가 이번 달 말부터 그 쪽으로 출근할 거에요. 아빠 괜찮죠?

 

처음에는 프로베이션일텐데. 시큐어한 거냐?

 

- 예, 아는 사람들이 그 회사에 있어요. 괜찮데요.


나는 아이 셋을 두었다. 딸만 둘이면 금메달, 딸 둘에 아들 하나면 은메달, 딸 하나 아들 하나면 동메달, 아들만 둘이면 목메달이라는 농담에 따르면 나는 은메달 감(?)은 된다.


딸 둘은 쌍둥이다.

내 모친이 쌍둥이였다고 한다. 즉 외할머니께서 쌍둥이를 낳았고 하나는 나오자 마자 죽었다고 한다. 대를 걸러 나타나는 유전이라고 하니 내가 그 유전을 받은 모양이다. 외사촌 중에서 쌍둥이를 가진 사람은 나 하나다.


1984년 12월 25일이 예정일이었는데, 쌍둥이라 그런지 쉽게 나오질 않아서 해를 넘겨 제왕절개 수술로 나온 아이들이다. 쌍둥이라도 성격은 틀려서 하나는 수줍음을 많이 타고 다른 놈은 할 말을 다하는 편이고, 오른손잡와 왼손잡이로 서로 다르다.


세 아이 중에, 두 녀석은 강단도 있고 어려서부터 제 앞가림을 스스로 잘해서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한 녀석만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는데, 그 걱정은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해 따로 살고있던 수 년 전, 아이들과 포트리의 술집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던 중에 그 아이가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는 걸 듣게 되었다.

일주일에 4일을 아르바이트 한다고 해서, 언제 학교에 다니냐고 따지고 들자, 너무 힘들어 쉰다는 거다.


기가 막혔다.

머리 속이 하얗게 변하며, 띵했다. 뒤통수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그 아이의 성격을 아는 나는 그것으로 그 아이의 공부는 끝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아이의 생각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부모의 잘못으로 아이의 인생을 망치는 것 같았다.


그 다음 해,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는 무척 잘 나가고 있었다.

때마침 회사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어 사람을 뽑고 있었다.

프로젝트 담당자를 만나 부탁을 하고, 아이가 지원만 하면 템포러리로 뽑겠다는 확약을 받았다.

IT 파트의 책임자로 힘(?)을 좀 쓸 때이기도 했다.


아이를 달랬다.

아빠 말만 들으면 5년 내로 5만불짜리 봉급쟁이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웨이츄리스로 일하는 것은 지금 당장은 달지만, 네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는 말도 했다.

사람은 남들 일할 때 일하고 남들 놀 때 놀아야 한다는 말도 했다.


겨우 설득해 놓았더니, 한 달만 시간을 달라고 한다.

회사는 지금 당장 사람이 필요한데 한 달을 기다리라는 거다. 부모된 게 죄인이다 싶었다.

아이가 싫다고 할까봐 프로젝트 매니저에게 사정하는 쪽을 택했다.


2006년 7월 그런 과정을 거쳐 회사에서 일하게 된 아이였다.

아이는 그런대로 열심히 일했고, 누구의 딸이라고 손가락질도 받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인정도 받았다.

아니,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이와 같이 생활하고 출퇴근을 같이 하면서, 내 경험을 조심스럽게 이야기 해며 가르치기도 했다.

어느덧 5년의 경력을 쌓았으니 회사를 옮길 때도 되었다. 한국이 아니고 미국이니 스스로 몸값을 높여야 한다. 커리어 우먼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레이오프 되었을 때 그 아이는 4만 9천불의 연봉을 받고 있었다.

그 아이에게 부모로서 주문한 것은 딱 하나였다.

어떡하든 대학 졸업장만 따라는 것.


그 아이는 지금 회사에 다니면서 학교에서 야간 수업을 듣고 있다.

대학 졸업장은 따겠다고 한다.

이번 여름은 그래서 바쁘다고 한다.

여름에 휴가를 내서 아빠를 보러 한국에 오겠다는 약속도 그래서 지킬 수 없다고 한다.


그래, 아빠의 나라는 한국이고 너희 나라는 미국이다.

그 땅에서 행복하게 살기만 바란다.

그래도 고졸인 학력으로 그만큼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은 미국이 네 나라이기 때문이란다.


<후기>

이 아이가 12학년 땐가 밤 11시가 넘도록 들어오지 않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11시 반이 넘어 나타난 이놈을 닥달했더니, 남자 친구 아버지가 한국에 가는데 JFK 공항까지 갔다 오는 바람에 늦었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들을 잘 못 키워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우선 내가 너희들에게 5대씩 맞겠다고 했지요.

강제로 한 놈에게 다섯 대씩 종아리를 때리게 하고, 그 아이에게 다섯 대를 걸레 자루를 때린 적이 있습니다.


15 대를 맞은 내 종아리도 피멍이 들었지만, 딸아이는 여린 살이 터져 며칠 동안 똑바로 누워 자지를 못했지요.


왜 그렇게 아이들에게 엄했어야 했는지 지금은 후회를 많이 합니다.

아이들은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친구가 되어주고 같이 놀아주어야 하는데...


검소하게 산 부모에게 배워서 그런지 검소하고 절약하는 게 요즘 아이들 같지 않은 아이, 어느날 그 아이가 내게 이야기 합니다.

 

- 회사 친구들이 그러는데 제 성질이 아빠를 닮아 고약하데요. 똑 같다는 대요. 제가 많이 닮았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