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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되는 놈은 된다

(2011년 7월 12일)

 

S는 동갑내기로 내가 살던 Denville의 집에서 차로 5분 정도 거리의 아파트에 살던 친구다. 한 살 위인 부인과 두 딸 그리고 아들 하나를 두고 있었는데, 딸들은 내 아이들 보다 2~3살 위였고, 아들은 내 아들보다 3~4살 어렸으니 늦둥이인 셈이다.


다 큰 딸들을 데리고 방 2개짜리 지저분해 보이는 아파트에 살아 생활이 어려운 줄 알았었지만, 자그마한 세탁소를 운영하는 그 친구는 골동품 수집이라는 꽤 고상한 취미를 갖고 있었다. 부인이 같은 성당에 다녀 소공동체 생활을 같이 하며 친하게 되었는데,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하는 소질이 있었다.


그 친구로부터 재미있게 들었던 이야기 중에 기억나는 것 몇 개를 추려본다.


- 시라큐스에서도 한참 더 들어가는 촌 동네에 살다가 1년 만에 처음 뉴욕을 오는데, 시골사람들이 뉴욕은 위험한 곳이고, 강도를 만나면 군소리 말고 돈을 주라는 말을 듣고, 백 불을 상의 윗 주머니에 넣고 다녔어요. 95번 하이웨이에서 길을 잘못 들어 조지 워싱턴 브리지를 넘어가게 되었어요. – 그때는 그게 무슨 다린지도 몰랐었지만 하여튼 복잡한 길에 들어서 신호들에 걸려 서있었는데 험상궂게 생긴 시커먼 덩치가 앞 유리를 닦더니 손을 내미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이 말로만 듣던 강도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준비한 백 불을 얼른 꺼내 주었어요. 그랬더니 땡큐하면서 허리를 90도로 꺾어 인사를 하더군요.


-  처음 미국에 온 게 2월이었는데, 시라큐스 공항에 어찌나 눈이 많이 왔는지, 마중 나온 누님이 차를 찾는데 1시간이 걸렸어요. 기다리는 동안에 눈이 차를 덮어버린 거예요. 처음 살던 누님 집은 2~3 마일마다 집이 한 채씩 나타나는데 전부 친척이에요. Last name이 다 같아요. 어렸을 때 한국의 시골동네에 가면 같은 성씨만 살잖아요. 똑 같은 거지요.


-   아이들을 데리고 마켓에 가면 동네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을 졸졸 쫓아다녀요. 동양사람을 처음 보는 겁니다. 만져보는 아이들도 있었다니까. 그런 시골에 살다 보니 1년쯤 지나니까 너무 답답해서 못 살겠더군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뉴저지 에디슨이란 동네가 조용하고 좋은데 한국사람들이 많이 산다고 하길래 찾아왔지요. 그런데 에디슨을 메디슨으로 잘못 알아들어 이곳에 왔어요. 그런 시골  촌 동네에 살다 보니 아이들이 영어는 금방 배우데요. 1년쯤 지나자 아이들이 오히려 한국말을 잘 못하는 거에요.

 

 

      한국에서 오토바이 가게를 하다가 미국인과 결혼한 누님의 초청으로 왔다는 그는 나보다 5년 정도 먼저 왔는데, 내 눈에 아주 특이한 사람이었다. 아파트 구석마다 선반을 만들어 골동품을 진열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골동품이었는지 모르지만, 내게는 쓰레기처럼 지저분해 보였다. 촛대부터, 화로, 문갑, 장식품 등에 고양이까지 키워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또 술 담배를 일절 안 하는 그는 네일 가게 종업원으로 일하는 부인을 대신해 주방 일도 곧잘 했는데, 생선을 다듬고 반찬까지 만드느라 집안은 폭격 맞은 전쟁터에 가까웠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들은 방안에서 나오질 않았고, 초등학생인 아들은 거실 한 모퉁이를 장식장으로 막고 커튼을 친 곳에 침대를 놓고 생활하였다. 도저히 공부하는 아이들을 위한 공간은 없어 보였다.


 골동품을 수집했지만, 그의 진짜 취미는 동전수집이었다. 유일한 휴일인 일요일에 그는 Coin Conference가 열리는 곳을 아들(통역)을 데리고 뉴욕으로, 펜실베니아로 쫓아다녔다. 대원군 시대의 한국 동전부터 미국 동전과 화폐에 이르기까지, 그가 동전을 수집하는데 들어간 돈만 40만 불에 이른다고 했다


  그가 내게 보여주려고 은행금고에서 가져온, 군대에서 본 탄약통 비슷하게 생긴 금속 함 두 개에는 금화, 은화를 비롯한 각국의 동전과 기념주화 그리고 20달러 지폐가 수십 장 붙어있는 수집가용 화폐에 이르기까지 가득했다.

현재 시가를 묻는 내게 60만 불이 넘는다고 했다.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Parent Day 때 카운셀러 선생을 만났다. 흑인 여성이었던 카운셀러는 ‘Korean students are very excellent.’라며 이민자로서 아이들을 걱정하는 나를 안심시켰다. 한국 학생들이 몇 명 없었던 그 학교에서 수석을 하는 아이는 바로 S의 큰 딸이었다.


   아빠와는 다르게 키도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시원스레 생긴 그 아이는 대통령 상을 받고 수석 졸업했고, 피츠버그의 명문 카네기멜론 대학에 장학금까지 받는 조건으로 합격했었지만, 아이 아빠는 기숙사비를 포함한 전액장학금을 주겠다는 주립대에 가길 원했고 결국 그렇게 되었다. 둘째 아이도 공부를 잘했고, 제 언니와 같은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진학했다.


나는 S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카네기멜론은 이공계에서는 MIT, 스탠포드와 함께 세계 7대명문으로 꼽히는 학교다. 돈 때문인지, 사랑하는 자식을 멀리 보내기 싫었던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라면 고려해볼 여지도 없는 선택이었다. 왜 카네기멜론에 보내지 않았냐는 내 질문에는 카네기멜론을 가고 싶어하는 아이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차를 사주겠다며 꼬셨다는 엉뚱한 대답을 했었다.


미국을 떠나기 전에 들린 뉴저지에서 그와는 만날 기회가 없었다. 다만 전화로 서로 안부만 전했다. 막내 아들은 어떻게 되었냐는 내 물음에,

 

- , 그 놈은 유펜(University of Pennsylvania, 아이비 리그의 하나) 와튼 스쿨에 가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어.


할 말을 잃었고 그의 자랑스런(?) 자식농사에 질투가 났다.

 

내가 보기에, S는 자식들의 학교에 한 번 가본 적도 없고, 학원을 보낸다거나 Tutor를 붙여보기는커녕, 아이들 공부하는 것 한 번 챙겨본 적도 없었다. 내가 보기에는 아이들 공부를 위한 환경조차 제대로 만들어 주지 않는 이상한 부모였다.


, 나는 무엇을 잘못했을까?


<후기>

저는 이공계를 졸업하여 평생 효율과 능률을 따지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어떤 문제가 생기면 원인과 이유를 분석하고 찾아야 했으며, 분석하고 개선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살았지요. 아이들 문제도 한동안 그런 접근법을 사용했습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아야겠기에.


몇 해 전 아이들과 진지하게 대화 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큰 아이가 말하더군요.

 

-  아빠는 항상 무서운 존재였어요. 왜 우리를 그렇게 대하셨어요. 친구들과 이야기 해보면, 다들 아빠가 친구 같다고 해요. 하지만 우리는 아니었어요.

 

어렸을 때 집에 손님이 오면 가실 때까지 불안했어요. 손님이 가실 때 인사를 해야 했으니까요. 아빠가 시키는 일은 무조건 억지로 해야 했어요. 그게 너무 싫었어요.


30여 년 전에 미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놀란 일이 있었습니다. 마켓이나 공원 심지어는 비행기 안에서 아이들을 혼내는 것을 본 것이었습니다. 버릇없이 뛰어다니며 노는 4~5살로 보이는 아이들에게 ‘Don’t do that please!’를 몇 번 하더니 그치지 않자 혼내더군요.


연수 중에 미국인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는데, 이렇게 말하더군요.

 

- 어린 아이들은 판단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혼내야 한다. 대신, 자신이 맞았다는 것을 기억할 나이가 되면 때리면 안 된다. 자신이 맞고 자랐다는 걸 기억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럴 듯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는 많이 혼냈지만, 커서는 나름대로 사랑으로 많이 돌보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키운 덕분인지 아이들은 똑바르게 잘 컸습니다. 십여 년 전, 성당에 처음 다니기 시작했을 때, 미사 후 친교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서있었는데 옆에 사람들이 어떤 아이들을 가르키며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습니다.

 

- 저 아이들은 누구네 집 아이들인지 모르겠어. 얼마나 명랑하고 예의 바르고 인사성이 좋은지 몰라. 요즘 아이들 같지 않아.


그 아이들은 제 아이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