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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좋은 제품은 좋은 공장에서 나온다.

(2011년 7월 9일)

 

Q선생을 만난 것은 2000년 봄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건강식품(Health Food)을 가게를 하는 그 분은 윈도우에 못쓰는 컴퓨터를 이용하여 광고를 하려고 했는데, 그 자문을 구할 사람을 찾다가 나와 연결된 것이었다.


나보다 3살이 많았던 Q선생은 소위 말하는 KS 출신이었다. 경기중·고등학교에 서울대 상대 경제과, 동갑내기인 부인은 경기여중·고에 서울대 가정과를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서로 가족간에 왕래가 생길 정도로 친해진 다음이었다.


경기중학교는 들어갈 생각도 못했고, 서울대에 낙방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그분들에게 열등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서로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로 한동안 친하게 지냈는데, 결정적 이유는 그분이나 나나 와이프가 우울증을 앓는다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한국 대기업의 주재원으로 미국에 왔다가 사업 아이템을 갖고 독립하였는데, 사업에 실패하여 Natural 이나 Organic, Herb로 된 식품이나 약을 파는 가게를 운영했던 그분들의 1 1남의 아이들은 내 아이들보다 2~3살 위였다.


전교에서 2등을 한다는 큰 아이인 딸은 미술에 소질이 있어, 그 아이가 아르바이트 하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좁은 문이라는 제목으로 10 피트짜리 벽화를 그린 것이 있어 구경가기도 했었다. 작은 아이인 아들은 피아노 교습으로 용돈을 벌 정도의 피아노 실력자이었는데, 피아노 레슨을 따로 받은 적이 없이 혼자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웠고, 제 누나와 같은 고등학교에서 전교 수석을 놓쳐본 적이 없다고 했다. 특히 수학실력은 학교 선생들 조차 감탄할 정도라는 말에 부럽기도 했었다.

나중에 Q선생이 뉴욕에 있는 한인회사에 부사장으로 취직이 되어 가는 바람에 서로 연락이 뜸하다가 나중에는 소식이 끊어졌지만, 그것은 아이들이 둘 다 MIT에 진학한 뒤의 일이었다. Q선생의 두 아이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수한 성적으로 MIT에 들어갔고, 둘 다 장학금을 받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내 아이들은 High School 내내 ‘Honor Student(학교성적 상위 10%)’ 에 두어 번 들었던 것이 다였다. 나름대로는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그게 그 아이들의 능력이었다. 기회의 땅에서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면 당연히 공부 잘해서 최소한 한국에서 듣던 좋은 대학에 가지 않을까 큰 착각(?)을 했었다.

사업실패로 형편이 좋지 않았던 Q선생은 당시 나보다 훨씬 못한 방 두 개짜리 좁은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주립대학 조차 좋은 곳에 못 가는 것을 보고 부모로서 실망은 컸었다. 그때 Q선생이 생각났다.

 

공장이 좋지 못한데 좋은 제품이 나오겠어? 나도 서울대학에 떨어진 놈이고 국민학교 때는 경기중학교보다 훨씬 못한 학교에도 떨어져 재수하지 않았어. 그 부모에 그 자식이지…’ 하면 위안을 하니 마음이 다소나마 편해졌다.

 

참, 못난 놈의 못난 생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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