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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아들의 생일

(2011년 7월 7일)

 

- 아빠, 놀래지 마세요. 지난 달에 회사 그만 두었습니다. 전공하고 맞지도 않고, 재미도 없어서 더 이상 못 다니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습니다. 공부하면서 천천히 새 직장을 찾아 보겠습니다.


평소에 메일이나 전화 한 통 없던 아들이 한 달 전 쯤에 보낸 이메일 내용이다.

1986년 7월 7일 세상에 나왔으니, 오늘이 녀석의 25번째 생일이다.


누구에게나 자식은 소중하듯이, 내게도 자식은 목숨보다 더 소중한 존재다. 그래서 남처럼 뛰어나지 못한 자식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이에게 누가 되는 것 같아 껄끄럽기도 하고 잘못하면 자랑하는 것 같이 들릴까봐 송구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이 카페에 들르는 사람들의 수고에 답하기 위해 하려고 한다. 그것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내가 직접 경험한 사례들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가끔 녀석이 한국에서 자랐으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한다. 그만큼 그 아이의 어린 시절 교육적 자질은 뛰어났었다. 위로 쌍둥이 누나들이 있었지만 이 아이만큼은 특이했다.

 

'일일공부'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 아이는 일일공부가 오자마자 자기 것을 다 해놓고 두 학년 위의 누나들 것까지 하곤 했다. 친구네 집에 놀러가면 밀려있는 일일공부나 문제집을 다 풀고 오는 아이였다.

일일공부 돌리는 아줌마들이 몇 년 동안 일일공부를 돌렸지만 이런 아이는 처음 본다고도 했다.


학교에 갔다오면 맨 먼저 숙제부터 하고, 다음날 가지고 갈 책가방과 준비물이며 신발주머니까지 현관 앞에 갖다놓고 나서야 놀러 나가는 아이였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적도 없었다.

 

나는 놈이 크면 한 인물 할 것으로 생각했고 녀석은 내 마음 속의 자랑이었으며 보람이었다. 내 소중한 보물을 내색하는 대신 나는 엄한 아버지 노릇을 했고, 또 취학 전부터 전자오락기나 당시로서는 최신의 컴퓨터를 마음대로 만지게 해주는 것으로 사랑을 대신했었다.


누나인 쌍둥이들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이 아이는 4학년을 마치고 한국을 떠났고 2년에 가까운 뉴질랜드 이민생활을 거쳐 미국으로 왔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아이는 부모의 잘못으로 자신의 학업적 재능을 다 펼치지 못했다. 지금 이순간도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프다. 가장 큰 이유는 화목한 가정을 유지하지 못한 내 잘못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녀석은 11학년 때 SAT 학원에 다니면서 심한 두통때문에 한국약국에서 게보린을 사먹고 있었다. 누나들도 기숙사로 떠난 빈 집에서 부모의 갈등을 견디기 힘들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는 기억을 떠올리기가 너무 힘들어 다음 기회로 미뤄야 겠다)


녀석은 2009년 겨울 뉴저지 주립대를 졸업했다. 나는 컴퓨터 사이언스를 하기를 바랐으나, 친구나 선배들 말을 좇아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자기 누나들은 아직도 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나, 뚝심이 있던 녀석은 그래도 끈질기게 공부해서 무사히 졸업했다. 학비까지 벌어가면서.

나는 아이들에게 2학년까지만 학비를 대주겠다고 약속을 한 터였다.


불운하게도 녀석이 졸업한 해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해였다. 그렇게 힘들게 공부했는데도 취직이 쉽지 않았다.

아이는 무지막지하게 프로젝트를 주는 교수들이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처럼 보인다는 말도 했다. 유럽에서 온 동기생 중에는 취업 가망이 보이지 않자 너무 실망한 탓에 다시는 미국을 쳐다보지도 않겠다는 말을 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친구도 있다는 말도 했다. 자기 과 동기생들 중에 취업에 성공한 친구들이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도 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별로 없었다.

 

- 그래도 어딘가는 자리가 있을 거다. 실망하지 말고 이력서를 넣어봐라.

 

- 자격증을 취득해봐라.

 

- 정부 쪽에는 사람을 구하지 않겠니? 한국같으면 정부에는 매년 사람을 뽑으니까.

 

녀석이 하는 말은 항상 똑 같았다.

 

-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런 과정을 거쳐 어렵게 구한 첫 직장이 한국 대기업 미국 지사였다. 전공과는 관계없는 전자회사로 버라이즌에서 요구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데 한국회사와 버라이즌 사이의 코디네이터로 일하게 된 것이다.

녀석은 한국어 실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실컷 준비를 하고 인터뷰를 하러 갔는데 한국사람이 한국말로 질문을 해서 놀랐다고도 했다.

그렇게 해서 시간당 $19을 받는 인턴사원으로 첫 직장을 시작했다.


작년 11월 초 한국으로 떠나기 전, 아이들을 보러 뉴저지에 갔었다.

녀석은 힘들어 했다. 프로그램에 문제가 많아 버라이즌에 넘기면 안 된다고 회의에서 주장을 해도 번번히 묵살 당하고, 그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해도 알았다고만 하고 넘긴다는 거다.

 

그리고 버라이즌에서 미리 언급했던 문제를 제기하면 그때는 코디네이터쪽에 책임을 돌린다고 한다.

책임있는 부서장은 한 달에 몇 건의 프로그램을 버라이즌에 넘겼다는 실적에만 목을 맨다는 것이다.

그런 회사가 어떻게 안 망하고 돈을 버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말도 했다.


책임자라는 사람은 비전도 없고, 구체적으로 업무지시도 못하고 무슨 문제만 생기면 왜 그런 일이 생기게 했냐고 큰 소리만 친다고 했다. 이런 이런 문제가 생길 것이니까 턴오버시키지 말라고 그렇게 사전에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다는 거다. 그가 관심이 있는 것은 오직 그 자리에 한 해 더 버티는 것뿐이라고 했다.


- 아빠, 비전이 없고 배울 것이 없는 회사에는 다니지 말라고 교수가 이야기 했어요. 이 회사야말로 비전도 없고 배울 것도 하나 없어요. 하루종일 놀다가 퇴근준비 하려고 하면 일을 주는 거예요. 퇴근하지 말라는 거지요. 한국에서 일 시작하니까 잘 보이고 싶은 것 같아요. 오버타임도 안 주면서.


- 아빠, 한국회사들은 원래 이래요? 아빠가 다닐 때도 그랬어요?


속으로만 대답할 뿐이다.

'얘야,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단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왔으니까.'


녀석은 한국사람들이 모여사는 그 거리에서 인기가 많다.

요즘 젊은 아이들 치고 예의 바르고 인사성 좋고 거기에 한국말까지 잘 하니까.

지금도 아무 때고 나가서 식당에서 아르바이트 하면 하루에 못 벌어도 캐쉬로 $200은 번다고 한다.

먼저 일하던 식당주인은 맨하탄에 새로 여는 식당 지배인 자리를 맡아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딸에게 전화할 때 물었다, 동생이 어떻게 지내는지.

 

- 일주일에 2~3일은 공부한다고 도서관에 가요. 또 2~3일은 아르바이트 하고요. 지금도 먼저 일하던 회사에서 다시 나와 달라고 전화가 오나봐요. 그런데 그 회사는 다시 절대 안 간데요.


<후기>

저는 아이들 이야기만 나오면 몸이 움츠러 듭니다.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야주지 못한 못난 부모였으니까요.

제 엄마가 설겆이를 하면 뒤에 서서 '제가 할게요, 제가 할게요'했던 아이.

제가 백야드 잔디를 깎을 때면 졸졸 따라 다니며 '제가 할게요' 했던 아이였습니다.


그러던 아이가, 어느날 부터 한 여름 두 시간 이상 잔디를 깎을 때에도 물 한 잔 떠다주지는 커녕 내다 보지도 않더군요. 여린 가슴에 큰 상처를 남긴 것이지요.


화목한 가정이야말로 최상의 교육입니다. 조기유학이고 교육이민이고 다 필요없는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선현우(Hyunwoosun.com)라는 청년은 외국경험 없이도 영어, 불어, 일본어가 원어민 수준이고, 스페인어, 중국어, 인도네시아어 구사에 불편이 없고, 거기다 포루투갈어까지 새로 배우고 있다고 합니다.


모두 그 청년같을 수는 없겠지만, 화목하고 성실한 부모만이 뛰어난 자식을 만들지요.


여기서 그 회사란 LG임을 실명을 밝혀둡니다.

젊은이에게 본보기는 되지 못할지언정 좌절과 실망만을 안겨주는 회사입니다.


아들의 25번째 생일날 생일선물로 이 글을 씁니다.

10년 쯤 더 세월이 흘러, 녀석이 결혼해서 아이를 가진 다음에나 기회가 되면 이글을 보여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