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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포기도 용기다.

(2010년 10월)

몇 년 전 시민권 준비할 때 배운 것이 있다.

행복추구(Pursuit of Happiness)가 생명(Life)과 자유(Liberty)와 함께 인간이 갖는 3대 기본권리라는 것이다. ‘행복추구’라는 단어가 강렬한 느낌으로 깨달음을 주었다. 인간이 일상에서 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은 행복추구가 그 목표다.

어떤 이는 도박을 할 때 행복을 느끼기에 폐창가를 찾고, 라스베가스에 가서도 사진 한 장 찍지 못하고 갬블만 하다 온다. 술을 찾고 마약을 하고 돈으로 여자를 사는 등, 행복을 위해 잘못된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행복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 때 사람은 절망을 하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행복을 위해 정든 고향과 형제와 친구 그리고 고국을 떠난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고 그 분들이 다 행복하게 사는 건 아니다. 불행하게도 내 주위에는 마지못해 사는 분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물론 행복하신 분들도 있지만.

- B 선배님: 70이 넘은 연세에도 등산과 사진, 농담을 좋아 하시고 항상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으신다.

- G 여사님: 주말 산행 클럽에서 만난 60이 넘으신 분으로, 토요일 산행이 사는 유일한 낙이라고 하는데, 자녀 없이 남편 분을 잃고 항상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생각한다.

- 57세 동서: 살고 있는 주택이 조금이라도 올라 20만 불만 손에 쥘 수 있게, 자식들은 이곳에 두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당장 가고 싶지만 돈이 없다는 거다.

- P 선배님: 부인에게 이혼당하시고, 아이들은 성장해서 떠난 후 빈집에 혼자 살며 재혼을 꿈꾸는데, 노년을 위한 경제적 여유는 있지만 술이 가장 친한 친구이다.

- 이웃의 65세 부부: 이혼해서 혼자 사는 딸의 자식을 돌보느라 어쩔 수 없이 불행하게 사신다. 도박이 유일한 취미다.

- 손아래 처남: 되지도 않는 비즈니스에 희망을 걸고, 브레이크 고장 난 차처럼 벼랑을 향해 갈 수 밖에 없는 불행한 친구다. 누구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언어때문에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다.

- R 후배: 억척스럽게 일하지만, 표정이 항상 어둡다. 늦둥이까지 있는 가족의 생계 때문에,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며 살고 있는 듯 보인다.

- L 후배: 한때는 직원이 5~60명에 이를 정도로 사업이 좋았었지만, 현재는 직원 없이 하루하루 버티며 고민이 많다.

 

누구나 현재보다 나아지는 삶을 원한다.

즉 업그레이드되는 삶을 원하며, 다운 그레이드 되는 삶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변화는 항상 두려우며 신중하다. 현상유지의 편안함이 더 나빠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이기기 때문이다.

안정을 중시하며 현상을 유지하려는 기득권층을 우리는 보수라고 하고, 현실에 불만을 갖고 어떻게든 변화를 구하려는 사람들을 진보라고 한다.

변화는 필요하지만 안정 속에서 서서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중도 혹은 진보적 보수라고 한다.

보수적인 진보성향인 이들도 있다. 안정도 중요하지만 기득권을 해체시키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미국의 공화당, 영국의 보수당, 일본의 자민당, 한국의 신한국당 등은 보수내지는 진보적 보수이고, 미국의 민주당, 영국의 노동당, 일본과 한국의 민주당은 진보내지는 보수적 진보를 표방한다.

어느 쪽이든 논리가 있고 그 논리에는 일리는 있다. - 이런 말을 한다고 줏대 없는 놈이라고 비방하지는 마시라. 굳이 말하라면 본인은 진보에 속한다. - 문제는 상대의 의견이 내 의견과 다르다고 핏대를 올리는 분들에게 있다. 목소리 큰 사람이 대접받고 이기는 사회는 성숙한 사회가 아니다.

저질들의 집합일 뿐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당시 이해가 엇갈린 무지한 기독교인들에게 핍박을 당했다.

다수가 항상 옳았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잘못된 다수의 편에 있을 수 있다.

서태지는 천재다. 그의 해괴한 음악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그의 천재성을 부인하는 것은 갈릴레이를 핍박한 기독교인과 다름이 없다.

노무현씨는 대쪽 같은 절개를 지닌 선비이며 순수한 마음으로 사회의 모든 계층을 아우르고자 진정으로 고민하고 진심을 다했던 보기 드문 정치가였다.

그가 행한 통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의 순수성과 진실성을 호도하고 모욕을 준다면, 선량한 사람을 반동이라는 굴레를 씌워 정치범 수용소에 처넣는 북한의 김정일 집단과 다를 것이 없다.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 나중에는 최대 업적으로 손꼽히는 청계천 복원사업과 대중교통체계 개편사업도 숱한 논쟁을 일으키고 반대에 부닥뜨렸다고 들었다. 현재는 ‘4대강 사업’이 반대에 부딪히고 있지만.

 

신이 아닌 인간이 완벽할 수는 없다.

대통령이 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5~60년대 대한민국보다 훨씬 부국이었던, 아르헨티나나 필리핀의 오늘날을 보면, 우리는 그들보다 훌륭한 지도자를 가진 행복한 국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조폭 우두머리 같은 살인자 대통령도 있었지만, 조국과 민족을 위해 그 사람조차도 잘한 일이 있다. 애국자 아닌 대통령이 어디 있겠는가?

대통령이 마음에 안 든다고 욕하지 말자. 51%의 국민이 좋아한다면 성공한 대통령이다.

 

인간이란 이해타산에 극히 예민한 존재다.

종합 부동산세를 도입하여 부동산 부자들에게 중과세를 하겠다고 하니 그렇게 반대하던 강남 땅 부자들도 그 대통령의 잘못된 정책으로 부동산값이 폭등하자 좋아서 우리 대통령, 우리 대통령 했다고 한다.

그들이 좋아서 뽑은 대통령도 집값이 내리자 그들은 형편없는 대통령으로 매도를 한다.

그게 인지상정이다. 자기들이 돈 벌려고 투자한 아파트가 자기들 뜻대로 오르지 않자, 정부의 공약 탓으로 돌리며 정부 잘못이라고 데모를 한다.

적절하지 않은 예가 될지는 모르지만, 한국 사람의 4분의 1이 보았다는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면 자기 가족의 이해타산에 의해 총부리를 북한으로 남한으로 돌리기도 한다.

그게 인간이라는 존재의 리얼리티 아니겠는가?

북한에서 고초를 당하다 625 때 탈출하여 월남한 분들에게 햇볕정책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정책일 수밖에 없지만, 그 분들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나쁜 정책이라고 싸잡을 수는 없다.

노동현장의 열악함을 고발하기 위해 분신자살한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씨는 죽었다 깨어나도 박정희를 옹호할 수 없을 거다.

내 부모가 이승만에게 충성하는 우익경찰에게 맞아서 억울하게 죽었다면 누군들 좌익에 가담하지 않겠는가?

박정희 정권 때 민주주의 투쟁을 하다 박해를 받아 죽은 숱한 사람들 중에 내 가족이나 친구가 있다면, 어찌 쉽게 박정희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박정희를 비롯한 군사정권 때 핍박받은 호남사람들과 김대중씨 입장이라면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에 어떻게 지지표를 던지겠는가?

이해하려고 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다. 한국 분들이여, 인내의 한국인들이여, 너그러운 한국 사람들이여, 이해하시라. 이해가 안 된다고 하더라도 반대를 위한 반대는 마시고, 어거지 비난은 하지 마시라.

 

사람에게는 몇 분의 짧은 순간에도 머릿속을 오가는 수많은 생각들이 있다.

그러고 나서 결정을 하고 행동을 한다. 그게 인간이다.

그렇게 복잡한 인간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고 혼자 생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 인생을 살아보지 않고,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행복 전도사’라고 불리는 최윤희 선생이 얼마 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자살을 폄하하는 글들을 이곳저곳에서 보았다.

사지가 없는 닉 부이치치도 사는데, 그깟 고통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혹평을 하는 분도 있었다.

물론 닉 부이치치는 대단한 사람이고 그 인간승리 때문에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이처럼 특별하지는 않다. 평범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모든 사람이 오바마처럼 나이 오십도 되기 전에 대통령이 될 수 없다.

그 고통을 당해보지 않은 분들은 그렇게 매도하지 마시라.

아마 귀하는 그런 경우를 당하면 더한 짓도 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해야 한다.

왜냐? 이해가 없이는 그런 분들을 포용하고 같이 가는 사회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죽음을 이해해야만 대한민국 검찰과 같은 기득권의 문제점을 고쳐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최진실의 자살을 이해할 수 있어야 인터넷의 폐해를 고칠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음, 승리, 투지, 노력, 성공, 부자, 강함, 쟁취와 같은 단어에 온통 세상의 가치는 존재한다. 성공만 하면 부도덕하거나 부정직을 따지지 않는다. 결과만 중시할 뿐 수단이나 방법은 도외시한다.

재벌의 후계라는 친구들이 부모 돈으로 미국에서 공부한 후, 돈벌이로 가져간다는 것이 기껏 TGIF, Starbucks 같은 먹고 마시는 프랜차이즈다.

골목구석의 구멍가게까지 돈벌이 수단으로 챙긴다.

룰을 지킨 사람들의 실패가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린 성공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

가난했던 과거시절과는 생각도 패러다임도 달라져야 한다.

2만 불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5천 불 시대의 생각을 견지하고 있다면 시대착오적이다.

 

포기는 용기다.

포기하는 일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순리대로 사는 길이고 자연에 순응하는 일이다.

욕심은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사망을 낳는다는 성경구절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만고의 진리다.

 

<후기>

미국의 광활한 자연과 풍요로움을 포기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만 다 가지려는 것은 욕심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다음은 쉽더군요.

세상에서는 포기하지 말고 쟁취하라고 가르칩니다만, 이제는 포기하는 법을 배우려고 합니다.

포기하는 용기없이 마음의 평화를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깨달은 거지요.

Peace be with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