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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미국의 실업문제를 생각해 본다.

(2011년 3월 15일)

 

어떻게 하면 이익을 극대화하는가? 하는 문제는 모든 회사와 경영자의 최대 과제이자 고민거리이다.

 

생산성 향상, 경영 효율화, 능률 극대화, 경비절감 등의 보기 좋은 구호들은 결국 이익을 어떻게 하면 극대화하는가 하는 문제로 경영자가 현재의 이익에 만족을 못하여 임직원들을 쥐어 짜겠다는 뜻이다.

내가 다니던 회사도 매출대비 이익이 줄어들자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이익극대화 혹은 생산성 향상이라는 문제에 매달렸다.

 

직원교육 강화, 경비절감, 인턴제 확충 등의 여러 가지 방안이 논의되었지만 크게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해외지사 설립에 눈을 돌렸다. 한국, 중국, 인도, 필리핀 등이 거론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중국이 결정되었다. 한국은 이미 인건비가 너무 높았고, 인도는 인프라가 부족했고, 필리핀은 게으르고 무책임한 국민성이 부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준비기간을 거쳐 2006년에 중국의 텐진에 지사를 설립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일반직원은 300불 매니저급은 800불에서 천불의 급여수준이었지만, 미국의 3천불짜리 직원보다 훨씬 스마트해서 일처리도 빨랐다. 사무실 비용 등 매니지먼트 비용도 미국보다 훨씬 저렴했다.

 

유일한 문제는 미국 동부에서 중국까지 T1이라 불리는 전용회선비용 8천불과 언어로 인한 문제였지만, 월 8천불은 인건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고 언어문제는 영어가 되는 매니저들에 의해 해결이 되었다. 미국에서는 영업과 마켓팅 외에는 직원을 뽑을 필요가 더 이상 없어졌다. 대신 중국의 직원은 50명에서 100명으로 또 200명으로 계속 늘어갔다.

 

1979년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해서 처음 받은 월급이 \160,000 정도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당시 환율로 2백 불이 좀 넘었었다고 생각된다. 지금은 ‘신들도 다니고 싶은 직장’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의 국영기업이지만, 당시에는 친척어른들이 만나면 으레 물어보는 봉급 물음에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릴 때도 있었을 정도로 적었다.

 

당시 대학동기들은 대우, 삼성, 현대, 금성, 대한항공 등 내놓으라는 회사 두세 군데 합격하고 골라 가기도 했을 정도로 취업은 쉬었고, 10년도 안되어 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을 거치면서 봉급은 백만 원 이상으로 몇 배가 올랐다.

 

83년 회사에서 보내준 해외연수 덕분에 난생 처음 미국구경을 했다. 그들의 월급은 우리의 최소 7배 이상이었다. 10년 후 93년에 사업부장이라는 직책으로 같은 곳에 출장을 갔다. 우리 부서의 신입사원 급여는 그곳 신입사원의 70% 수준이었다. 그러나 생산성은 수직적인 기업문화를 가진 우리나라가 훨씬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보다 훨씬 전, 내 기억에 의하면 1960년대 기능직 임시 공무원이었던 부친은 20~40불 정도의 월급을 받았었다. 몇 천원의 봉급을 어떻게 쪼개야 할지 한숨을 쉬시던 돌아가신 어머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어른거릴 때가 있다. 쌀 한가마 연탄 몇 장 들여놓으면 없었다. 그래도 그 때는 일자리가 없어 모든 사람들이 궁핍하게 살았고 일자리를 가진 사람들이 행복했었을 게다. 가끔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에서 하루에 1불로 생활하는 비참한 사람들의 모습이 뉴스에 나오기도 하지만, 50년 전에는 우리가 그랬다.

 

L선생은 지난 9월, 내가 올린 글을 보고 연락을 주신 분으로 에어컨을 배우고 싶은데 묻고 싶은 게 있다며 만나자고 했다. 나보다 세 살이 위인 그분은 83년에 이민 와서 6개월 만에 우체국에 취직을 했고 지금까지 다닌다고 하셨다. 2~3년 후에는 퇴직을 해야 하는데 그 대책으로 에어컨 기술을 생각한다고 하는, 내가 생각하기에 행복에 겨운 분이었다. 내가 결사적으로 말렸음은 물론이지만, 그 분의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 당시에는 영어를 잘 못해도 우체국에 취직을 할 수 있었다. (하느님의 은혜라는 말을 덧 붙였지만.)

 

-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우체국을 떠났는데, 대부분 후회를 한다.

 

- 비디오 가게든, 구두 수선 가게든 가게만 차리면 한 달에 만 불 수입은 쉬웠다. 그런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 우체국을 그만 두었다.

 

- 어바인의 잼보리나 컬바 길옆은 다 오렌지 밭이었다. 그래서 이곳이 오렌지카운티라고 불린다.

 

대학 2학년 때로 생각된다. 기초전공이던 ‘통신학개론’ 첫 시간에 교수님이 질문을 던졌다. 통신의 '이데아(Idea)가 무엇인가? 통신의 궁극적인 목표인 가장 이상적인 통신이란 어떤 상태인가? 라는 화두였다. 답은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여, 통신의 상대가 어디에 있든지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의사전달을 하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것이 정답이라면 그 꿈은 현재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인터넷과 통신기술의 발달로 미국에 있어도 한국의 가족과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 할 수도 있다. 인터넷과 컴퓨터 그리고 메신저라는 프로그램 지식만 약간 있으면 추가비용도 들지 않는다. 중국에서도 인도에서도 미국에 있는 것처럼 전화를 받고 컴퓨터에 연결을 해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60년대 천 불대의 임금을 좇아 삼촌과 형들이 광부가 되어, 고모와 누나들이 간호원이 되어 독일로 떠났고 70년대에는 건설인부가 되어 중동으로 떠났다. 당시 그들이 받는 천불 이천불은 한국 내에서 엄청 큰돈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큰돈인가는 당시 주한 미군을 보면 알 수 있다. 일개 병사인 주한미군이 한남동에 아파트를 얻어 주말마다 파티를 하고 계집질도 했으니까. 중국에서 네팔에서 필리핀에서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으로 돈 벌러 온다. 한국이 4~50년 전에 독일로 중동으로 갔던 것처럼.

 

한국이나 미국이나 취직이 어렵다고 한다. 그 쉬웠던 취직이 이토록 어려워졌는지 그 이유가 분명하고 확실히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걸 설명하고 싶어서 직접 경험한 이야기를 적어보았다.

 

지난 날 ‘아시아의 4龍’이라는 말을 많이 거론하고 언급했다. Korea, Hongkong, Taiwan, Singapore가 그들이다. 인구가 1억도 안 되는 작은 나라들이다. 지금은 BRICs라고 한다. Brazil, Russia, India, China가 그들이다. 그들의 인구는 인류의 절반에 이르는 30억에 가깝다. 그들이 과학과 언어와 같은 지식으로 무장한 채 경제이론에 의해 이익을 추구하며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인터넷과 같은 통신의 발달은 공간의 제약을 극복하고 있다. 지구상의 어디에 있든지 일을 하는데 별로 지장이 없다.

 

더군다나 기업가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낮은 인건비를 찾아 움직인다. 그들을 채용해서 일하는 비용이 미국에서 채용하는 비용과 비슷해질 때까지 중국에서 혹은 인도에서 계속 고용할 것이다. 그 결과는 현재 나타나고 있다. 미국 내에서 절대 빈곤층은 계속 늘어나지만 (최근 통계에 의하면 미국인 7명 중의 1명) 백만장자 또한 계속 늘고 있는 것이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추구하는 게, 누구나 다 아는 기초경제이론이다. 최소의 비용을 추구하다보니 월마트나 홈데포같은 대량구매와 대량판매를 할 수 있는 거대기업만이 살아남는다. 월마트나 홈데포가 들어서면 반경 10~20마일 내의 모든 소매점이나 하드웨어 스토어는 망한다고 한다. 중국이나 인도에 생산기반을 갖지 못한 기업은 문을 닫고 대량으로 저가공세를 할 수 없는 가게는 도산한다. 고용은 줄 수밖에 없다.

 

유일한 해결책은 정부의 개입이지만, 가진 자의 편에 선 정치가에게 해결을 기대할 수 있을까?

 

뉴스를 보면 그래도 미국은 한국보다 낫다. 한국은 더하다. 음식점은 물론 동네 구멍가게까지 대기업에서 독점한다. 정치는 잘 모르지만, 민주당 정부에서는 월마트나 홈데포의 확장을 막고 공화당 정부에서는 허용한다고 한다. 부시 정권 8년 동안 모든 규제가 풀렸다고 한다. (통계자료가 없어서 확실하지 않습니다. 통계를 가지신 분은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누군가 대중은 어리석다고 설파했다지만,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 온 것은 다수의 힘이다.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해 다수가 다시 현명해질 때가 온 것 같다. 보다 현명한 생각으로 대중을 위하는 정치가를 선택하는 권리는 대중에게 있으니까 희망도 있다.

 

<후기1>

사실 정치나 경제에 대해서는 거론할 자격도 없는 문외한입니다. 단지 50년 이상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작금의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보입니다. 엄청난 속도의 변화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그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인류의 역사를 오천년으로 보던 오만년으로 보던 최근 백년의 변화가 그 이전에 있었던 것 보다 더 크다고 합니다.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또 가족의 행복을 위해 이민이라는 멀고 험한 길을 선택했지만, 그 선택이 지금에 와서는 옳았던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만, 변화의 시대에 산다는 핑계를 스스로에게 대답대신 하곤 하지요.

 

이제는 미국에 살겠다는 생각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이 다 커서 제 스스로 살아가는 것을 보니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제 자신은 이 나라에 더 이상 살 이유가 없군요. 가고 싶어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형편에 있는 분들에 비하면 행복하다고 해야겠지요.

 

<후기 2>

얼마 전에 새로운 사실을 알았습니다. 웨스팅하우스에서 오랜 세월 근무했던 분으로 부터 전해 들은 이야깁니다.

 

미국의 대형 회사들도 불경기를 피하기 위해서 오래 전부터 저임금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답니다.
그 분이 근무 했던 회사는 텍사스와 멕시코 보드 타운인 멕시코 훠레스시나 샌디에고 국경인 멕시코 티후아나로 옮겨서 불경기의 한파에 별 영향을 받지 않고있다는 이야긴데 결국 미국의 인건비를 감당할 수 없음을 미리 알고 대처한 경우겠지요.

 

웨스팅 하우스는 전 세계에 113개의 제조업 공장을 소유하고 있는 대형 회사입니다.
세계 18개국에 총 종업원 11만명 정도 입니다. 멕시코에서만 현재 39000명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의 통근거리가 불과 30분 정도라고 하니까, 물류나 회사의 지역본사는 미국 쪽에 있고 엔지니어나 매니저만 멕시코로 출 퇴근 하는 거지요. 즉 멕시코 쪽의 회사의 일반 종업원은 전부 현지인을 채용하고 엔지니어나 매니저만 미국인을 채용함으로써 인건비를 최소화합니다.
미국인 직원에 대한 보험과 외국근무수당은 물론 멕시코까지의 출퇴근 개스비도 회사에서 지불한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미국인에 대한 채용기회는 감소할 수 밖에 없고, 실업률은 올라갈 수 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을 미국은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