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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LA 에서의 1년 - 마지막 회

(2010년 11월 말)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했을 때, 오히려 아이들은 내 걱정을 했다.

“아빠, 오랫동안 떠나온 한국에 돌아가서 어떻게 사시려고 해요? 힘들어도 미국이 낫지 않겠어요. 다시 뉴저지로 돌아오신다면 제가 아빠 일자리를 알아볼 수 있어요. 알아볼까요?”

 

대견하기도 하고 기가 차기도 했지만, 아이의 기특한 성의를 생각해서 즉시 대답하진 않았다.

“그래, 생각해 보마.”

포기하기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 패배감, 배신감과 함께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 포기하고 나니 모든 것이 간단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다 내 자신이 게으르고 무능한 탓인 걸.

 

결정하고 나자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아파트 매지니먼트 오피스에 들려 한 달 후 이사 나갈 것을 통보했고, 귀국이사 업체를 불러 견적을 받았고,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제주에서 은퇴생활을 하는 큰 동서에게 연락을 하여 살 집을 알아보았으며, 승용차 두 대는 인터넷에 낸 귀국세일 광고를 보고 연락해 온 사람에게 헐값에 넘기고, LA영사관에 들려 재외동포 비자(F-4)를 신청하고 집사람의 영주권은 포기하기로 했다. 결정을 내린 후 귀국 비행기 예매까지 모든 일에 2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아이들이 아빠를 보러 LA에 오고 싶지만, 회사일이 바빠 올 수 없다는 아이들을 대신해 동부로 가 아이들을 만나는 일에 일주일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공항에서 차를 렌트했다. 공항가는 길을 누구에게 부탁하지 않고 조용히 떠나고 싶었다. 나머지 일주일은 주변을 정리하며 보냈다.

 

이삿짐을 보낸 빈집에서 이틀을 더 지내며 인터넷, 전기, 전화, 은행구좌, 크레딧카드 등을 클로즈하고 남은 돈을 찾아 한국으로 송금했다. 전기, 인터넷, 전화요금은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지불하면 갚지 않은 돈은 없다. 그래도 남긴 것은 있었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401K 은퇴연금과 몇 푼 안 되는 Roth IRA는 60살 이후를 대비해서 남겨놓았다.


아, 또 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아이들 셋.

똑똑한 아이들이니 걱정은 하지 않지만, 마음만은 매우 아프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이미 미국인이다.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미국에서 미국식 교육을 받았으니 미국인일 수밖에 없다.

미국은 미국인에게 살기 좋은 곳이다.

한국은 한국인에게 살기 좋은 곳처럼.

 

예외가 있다.

돈이다.

돈이 잘 벌릴 땐 예외가 된다.

한국에서 1년 벌어야하는 돈을 미국에서 한 달 만에 벌 때는 예외다.

미국에 사는 불편함보다 돈이 보상하는 즐거움이 더 크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중국동포가 가족과 떨어져서 기를 쓰고 한국에서의 불편한 삶을 감수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들처럼 과거에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에서 그랬다.

영어에 서툰 핸디맨들도 쉽게 돈을 벌었고, 비디오 가게만 해도, 세탁소만 해도 한 달에 만 불은 쉽게 벌었다.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 사는 외로움이나 마음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언어의 갑갑함은 주말 골프나 바비큐 파티와 같은 풍족함으로 보상 받았다. 설날과 추석 그리고 아버지 생신, 일 년에 세 번 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그 보상은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과거의 이야기다.

미국은 백년만의 불경기를 겪고 있으며 한국은 이미 선진국 소리를 듣고 있다.

외로움과 갑갑함만 있을 뿐 더 이상 보상은 없다.

 

20여 년 전, 나를 많이 사랑해주었던 대학선배이기도 했던 직장상사가 있었다. 2008년 초 모친상 때 그 분은 어떻게 연락을 받았는지 인편을 통해 부조금을 보냈고, 인사를 하느라고 그 분을 뵌 적이 있다.

 

- 너는 그 회사에서 얼마나 받고 있나?

 

○ (다소 자랑스럽게) 보너스에 따라 다르지만, 최근 몇 년째 10만 불 넘게 받고 있습니다.

 

- 에게, 그걸 받고 미국에 있냐? 유○○ 연봉이 얼만지 알아? 1억 5천이다.

 

70을 바라보는 그 분 밑에서 20년 전에 나와 유○○가 과장으로 있었는데 우리는 친구처럼 지내기도 했지만, 승진에 있어서는 경쟁자이기도 했다.

당시 유○○는 1직급 지점장이었다고 했다. 솔직이 허탈함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살아본 미국은 대단한 나라임에 틀림없었다.

그랜드 캐년, 옐로우 스톤, 나이아가라, 라스베가스 등, 가 볼만한 곳은 끝이 없다.

거대한 대륙의 자연과 도로, 항만, 공항 등의 인프라, 잘 정리된 농경지, 도시와 농촌의 균형발전, 시스템과 룰의 공평한 적용 등 세계 최강국으로서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이런 부러운 조건들을 외로움과 갑갑함 없이 즐기기 위해서는 미국인이 되어야 한다.

시민권을 취득했다고 미국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인이 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는 학교에 다니는 것이다. 최소한 고등학교라도 이곳에서 졸업해야 한다.

 

다음은 타고난 재주나 (재주가 없다면) 불굴의 노력으로 외로움과 언어의 답답함을 극복하는 것이다.

평범한 능력과 남들과 비슷한 노력으로 외로움과 답답함을 극복하지 못한 나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듯한 불편함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뉴저지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금요일 오전은 부사장이 주재하는 회의로 보냈다. 부서간 의사소통을 위한 회의라지만, 언어가 부족한 내겐 고통스런 긴장의 시간이었다. 수요일 저녁부터 걱정이 되어 식욕을 잃었고, 잠자리에서도 시나리오를 생각하느라 쉽게 잠들지 못했다. 4시간이 넘게 계속되는 회의가 끝나야 일주일이 지났다는 해방감에 안도할 수 있었는데, 레이오프 되었을 때는 회의에 더 이상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에 한동안은 기쁘기까지 했다.

 

급한 성격 탓인지는 몰라도 언어는 내겐 극복하기 힘든 문제였고, 그로 인해 지난 15년 동안 항상 긴장 속에서 살았던 것 같다. 누가 내게 영어를 잘 한다고 하면 나는 그냥 속으로 웃는다.

하긴, 장사를 한다거나 노동을 한다면 나 같은 영어도 충분히 통할 것 같기는 하다.

 

한국에 도착한지 일주일이 넘었다.

서울에서 며칠 보내고 이곳 제주에 와서 집을 보러 다니고 있다. 제주의 날씨는 LA와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운이 없는지 이곳 제주는 다른 곳과 다르게 주택 가격이 최근 1~2년 사이에 20~40% 가까이 올랐다고 한다. 작년 가을에 보았을 때는 전세 4~5천, 매매 7천 정도의 24평 주공 아파트가 전세는 거의 없고, 매매가 9천이다.

 

내 처지에 맞게 살려고 한다. 가난하지만 마음 편하게.

몸에 맞지 않는 옷은 벗어던지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싶다.

 

작년 7월 LA로 온 후, 어떻게든 미국에서 살아보고자 했던 두 번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을 뿐 아니라 적지 않은 경제적 데미지와 상처만 남겼다. 물론 억지로 LA에서 살려고 하면 살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두 내외가 사는데 무슨 큰 돈이 필요할 것인가?

이제는 경제적 풍요는 포기하고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누리고 싶다.

 

그리고 옷에 억지로 몸을 맞추는 짓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후기>

지난 30년 동안 회사생활만 한 제게 선택의 폭은 많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관리한다든가, 일을 기획하고 실행한다든가, 능률적이고 합리적인 운영을 강구한다든가하는 조직생활에서 필요한 일에는 익숙하지만, 조직을 떠나서는 매사 서투르기만 했습니다.

 

가난하지만 얼마든지 행복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시애틀 박 선생님의 조언이 결정을 도왔습니다. 15년 만의 귀국을 결행하게 된 것이지요. 박선생은 제 블로그를 읽고 제게 전화를 주었던 분입니다. KBS 인간극장에서 방영한, '날마다 소풍, 적게 벌어 행복하게 사는 법'을 보라고 충고하신 분입니다.


슈퍼에 들려보니 물가는 미국보다 훨씬 비싸더군요. 파 한 단에 3,500원, 고기류는 한 팩에 2~3만원씩으로 미국과는 비교가 안 되었지만, 주거비는 많이 싼 것 같습니다. 물론 제주라 그렇겠지만.

집사람이 사고 싶어 했지만 집주인이 거둬 들이는 바람에, 포기하고만 34평짜리 잘 지어진 해수욕장 부근 아파트가 11~12만 불(1억 2~3천) 정도로 싼 편이었습니다. 오렌지카운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타입의 전원주택도 20~30만불 정도면 충분하더군요.


어제 저는 30평짜리 3 Bed 2 Bath 연립주택을 8천만원에 계약했습니다. 전세를 구하려고 했지만, 전세는 나온 게 없어서 하는 수가 없더군요. 그래도 부에나 팍에서 살던 월 $1,350짜리 아파트보다는 훨씬 좋았습니다.

다음에는 원하시는 분이 있다면, 미국 시민권자인 외국인으로서 한국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제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