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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음주운전으로 징역 42개월

(2011년 3월 24일)

최종 판결을 앞둔 법정 안은 무거운 침묵만이 있었다.

얼굴의 주름으로 인해 50살은 넘은 듯 보이는 마른 체격의 판사가 들어서자 방안의 모든 사람은 기립했다. 법복을 입은 판사를 뒤따라 방청객과 배심원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그녀는 배심원석을 향해 배심원단의 평결을 물었고, 왼쪽 끝 배심원단 대표가 일어나 "Guilty"라고 말하는 순간, 방안은 탄식과 한숨의 물결로 출렁거리며 절망 속으로 잠겨드는 것처럼 느껴진다.

곧바로 판사의 선고가 이어졌다.

그녀도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피고를 보며 말했다. 

- 42개월. 법이 정한 가장 적은 형량을 선고한 대신 가석방이나 감형은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구속하고 형을 시작한다.

단정한 용모, 건장한 체격의 그 친구를 처음 본 것은 1998년도 막바지로 접어든 11월 말이었다.

갓 20대 초반의 젊은 친구치고 인사성도 밝고 항상 웃는 얼굴이어서 같이 입사한 6명 중에서 특히 눈에 띄었다. 마땅한 딸만 있으면 사위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한편 들기도 했다.

고등학교만 졸업한 것이 흠이었다.

양키즈 야구팀을 아주 좋아하고 젊은이답게 모든 스포츠 경기를 즐겼다.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는 무척 일도 많았고 바빴다.

20명 남짓하던 회사에서 6명을 한꺼번에 뽑을 정도였고, 넘쳐나는 일로 그리고 돈 버는 즐거움으로 거의 매일 밤늦게까지 일을 했고 어떤 날은 납기를 맞추기 위해 밤을 새우기도 했다. 내가 데리고 일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중에도 그 친구가 제일 성실하고 똘똘하게 일을 잘 했다. 수북하게 쌓인 박스 안의 서류들을 컴퓨터로 읽어 들이고, 데이터로 가공하는 일과 그에 따른 부수적인 작업을 하며 컴퓨터나 작업환경에 문제가 생기면 도움을 구하러 내게 달려오곤 했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그렇게 5~6년이 지나, 회사는 200명이 가까운 규모로 커졌고, 그 친구도 한 파트를 맡아 책임을 지게 되었다. 회사는 커진 몸집에 맞게 다른 건물로 이전 확장을 끝낸 2004년 봄, 그 친구는 누나결혼으로 휴가를 냈다.

회사가 바빠도 동생인 그가 빠질 수는 없는 일이므로 책임감이 있던 그는 휴가로 인한 부재중에 처리해야 할 일을 동료들에게 부탁을 했고, 휴가를 끝내고 돌아와서 그 동료들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저녁을 샀고 함께 술을 마셨다. 저녁을 먹는 동안, 하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집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꽤 내렸던 모양이었다. 

밤 10시 넘어, 비가 심하게 내려 시야까지 흐려진 상태에서 하이웨이로 진입하다가 사고를 내고 말았다. 진입로 부근에서는 페라리와 UPS 박스 카가 이미 사고가 나 서있던 상태였는데, 그걸 늦게 발견한 이 친구는 UPS를 피하려다 페라리를 받았고 페라리 주인이 죽는 사고가 발행한 것이다. 30대의 현직경찰인 페라리 주인은 아이리쉬 계통의 경찰집안이었다. 부친은 은퇴한 경찰이었고 형제들도 경찰인 것이 다음날 로컬신문에 보도되었다.

 페라리 주인은 그날 비번이었는데 저녁식사 때 부부싸움을 했고, 홧김에 술을 마셨으며, 술김에 차에 개스를 채우겠다고 끌고 나갔다는 것이다. 차를 몰고 나갈 일도, 개스를 채울 일도 없었으나, 술김이 되었든 홧김이 되었든 구실을 찾아 나갔으리라고 추측은 되었지만, 그 길이 30대 젊은 경찰은 세상을 하직하는 일이 되었고 한 젊은이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 되었다.

 음주운전임을 알았음에도 도망가지 않고 현장에서 순순히 체포되었고 재판을 받았다. 몇 달이고 계속된 재판과정에서 실형이 확실하니까 한국이나 캐나다로 도망가라는 말을 듣고도 재판을 끝까지 받았다. 변호사 비용으로 수 만 불이 나갔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아이는 신분에도 문제가 있었다. 부모가 영주권을 받는 도중에 18세가 넘는 바람에 영주권이 없는 것이었다.

  자신도 이 재판을 진행하면서 마음이 아팠다는 말을 끝으로 판사가 나간 후, 사람들이 움직이는 부스럭대는 소리 속에 흐느낌이 섞였다. 변호사가 아이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고, 그 아이는 울고 있었다. 가족들도 흐느끼고 있었다. 여자 친구도, 동료들도 울고 있었다.

순간의 실수가 만든 비극이었다. 술만 안 먹었더라면, 아니 먹더라도 소주 반 병 정도만 했더라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다. 피해자의 큰 잘못도 있었으니까.

 

뉴저지의 캐피탈은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에 가까운 Trenton이다.

주 형무소가 있는 곳이다.

1~2년이 지나 면회를 갔다. 일주일에 두 번 면회가 된다.

몸집이 좋았던 청년은 40파운드 이상 체중이 줄어 죄수복이 헐렁해 보이는 까칠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항상 해맑은 웃음을 짓던 얼굴에서는 웃음기를 찾을 수가 없었다.

- TV는 보니?

- 예, 봅니다.

- 그럼 양키즈 게임도 보겠구나?

- 이곳은 필라델피아와 가까워서 필리스 게임만 중계합니다. 공중파 방송만 보니까, 양키즈 게임은 거의 못 봅니다.

모범수로 도서관에서 사서를 정리한다고 한다. 그래서 편하게 지낸다고 했다.

 두어 번 더 면회를 갔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 출소를 몇 달 앞두었을 때는 예전의 모습을 많이 회복하고 있었다.

 만기복역을 하고 나왔지만, 그 친구에게 따르는 제약은 많았다. 뉴저지를 벗어날 때는 경찰서에 신고를 하여야 했다. 다른 주이기는 하지만, 가까운 뉴욕에 갈 때조차도.

회사에 복직을 시키려 노력했지만, 부사장이란 친구가 반대했다.

생명을 다루는 제약회사가 주 고객인 만큼, 전과자 채용은 안 된다는 것인데, 만일 고객이 알 경우 회사가 피해를 입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지금은 3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을 그 친구가 한 때의 고난을 딛고 일어서기를 기도한다.

  <후기>

피해자 가족을 대표해서 고인의 Step-brother(매제인지 아니면 동서인지?)의 마지막 진술이 생각납니다.

- 자기 Step-brother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는 길은 가해자를 처벌함으로써 앞으로도 있을 수 있는 비슷한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분히 정상은 참작이 되지만, 피해자의 가족들은 가해자가 처벌받기를 원한다.

  그 친구의 가족도 아메리칸 드림을 갖고 미국에 왔겠지요. 그 드림을 이루는 사람이 몇 %나 될까요? 10%, 아니면 크게 잡아 20%가 될까요?

매스컴에서는 성공한 사람들 스토리만 크게 보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을까요?

리쿼스토어에서, 세탁소에서, 네일 가게에서 일주일에 최소 6일 이상을, 목숨을 걸고 좀도둑이나 강도와 맞서면서, 먼지와 화학약품에 시달리면서 많은 분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열심히 살고 계십니다만, 그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가끔 7, 80년대 이민 오신 분들로부터 전설과 같은 성공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지만, 앞으로 그런 호시절이 다시 오기 바라는 것은 부질없는 생각일 겁니다.

헝그리 정신, 부지런함, 싼 인건비와 Native English 등으로 무장한 중국과 인도인들을 구태의연한 방법으로 경쟁해서 이겨낼 도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베트남 사람들까지 한인들 비즈니스에 들어와 가격경쟁을 벌이니 수입은 줄 수밖에 없고, 아메리카 드림은 점점 멀어집니다.

  아직도 미국으로 이민가기 위해 애쓰시는 많은 분들을 봅니다. 말로만 듣던 닭 농장을 통해 이민 온 젊은 친구를 만나보기도 했습니다. 샌디에고에 사는 그 친구는 만족하면서 미국에 잘 온 것 같다고 합니다. 아주 적극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열심히 삶을 개척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들 녀석에게 물었습니다.

- 너는 네 의사와는 상관없이 미국에 살고 있고, 이제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데 미국에 잘 왔다고 생각하니?

- 아뇨, 한국에 살았어도 충분히 괜찮다고 보는데요.

초등학교 4학년 마치고 한국을 떠났는데, 대학에 가더니 한국아이들을 많이 사귀더군요. 그 녀석은 취직이 힘든 요즘, 영어실력이 아닌 한국어 실력으로 한국계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사람 생김이 다 다르듯 같은 사물에 대한 생각과 느낌도 다 다릅니다. 또 같은 사람의 생각도 시간에 따라 환경에 따라 변하기 마련입니다.

원칙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