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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LA 에서의 1년 - 두번째 이야기

(2010년 9월)

 

지난 6월 초부터 8월 31일까지 3개월간 일을 배운다고 대학 후배를 따라다녔다.

 

호텔의 주방이나 음식점에 있는 냉장고 냉동고, 가정집의 에어컨, 대형 Mall에 입점한 상점의 에어컨, 혹은 구조 변경 공사현장까지…….

 

난생 처음으로 해본 소위 ‘노가다’라 불리우는  일의 ‘시다바리’였다. 공구와 자재들을 옮기고, 나사를 풀고, 계측기를 걸고, 일하는 동안 붙잡고 있고, 들어 올리고, 눈치 있게 공구를 집어주고, 사다리에 올라 천정 속의 먼지를 뒤집어 써가면서 헬퍼를 했다.

 

대학 6년 후배인 그 친구는 정말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나 같으면 엄두도 나지 않을 것 같은 험한 일들을……. 아침 7시에 시작해서 어떤 때는 저녁 9시나 10시까지. 내겐 정말 힘든 일이었다.

 

이곳 캘리포니아는 많은 하우스들이 에어 핸들러라고 불리는 냉난방 장치를 Attic에 두었다. 아마 스페이스를 절약하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살던 동부에서는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Attic에서 작업할 때는 완전히 한증이었다. 숨이 턱턱 막히고 땀이 물 흐르듯 흘러내렸다. 어둡기까지 한 먼지투성이인 곳에서 헤드렌턴을 쓰고 무거운 장비를 움직여가면서 일을 해야 했다. 그곳에서 일하다 내려오면 90도가 넘는 뙤약볕도 냉장고 속에 들어온 듯 서늘함을 느꼈다. 유난히 더위에 약한 내게는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사다리를 걸쳐놓고 높은 곳에 올라갈 때는 겁이 나서 사지가 후들거렸다. 힘든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고 가는 동안 운전을 하면서 이 친구는 내게 이런저런 LA에 사는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이 지역은 이런 저런 동네이고 어떤 음식점이 맛있고, 멕시칸들이 진출한 업종은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이윤이 없고, 에어컨은 그래도 아직 멕시칸들의 진출이 적어 괜찮다는 등의 이야기는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문외한인 내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7월 16일.

아침부터 시작한 글렌데일 쪽에서 일을 끝내고 점심을 먹은 후 리버사이드로 향했다. 오후 4가 넘어 도착해 올라 간, 갤러리아 몰의 옥상은 100도가 훨씬 넘은 기온에 뜨거운 햇빛까지 보태져 열기로 이글거리고 있어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무더운 날 에어컨은 무슨 이유에선지 정지해 있었다. 후배가 지시(?)한 곳을 나사를 풀어 뜯어냈다.

후배가 드라어버를 이용해 강제로 기계(컴프레서라고 불리는 외부장치의 프로펠러)를 돌리면서 내게 두 번째 지시를 했다.

 

“선배님, 파이프가 뜨거운지 만져 보세요.”

작업용 장갑을 벗고 손이 들어갈 만한 곳의 파이프를 찾아 손가락을 대는 순간, 사고가 나고 말았다.

커다란 굉음을 내며 회전하고 있는 대형 프로펠러에 오른손 엄지가 그만 닿아버린 것이다. - 나중에 그곳을 다시 가서 보고는 손가락이 잘라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여겨졌다.

 

손톱이 세로로 쪼개져있었고 왼손으로 오른손 엄지를 움켜잡은 나는 후배와 병원을 찾아 달렸다.

마취를 하고 꿰맸어도 고문을 당하는 듯한 통증과 함께 후회와 걱정이 교대로 찾아왔다.

 

치료가 끝나니 뚱뚱한 병원직원이 몇 장 서류를 들고 와서는 사인을 하라고 들이밀었다. 왼손으로 겨우 사인을 하고는 병원비에 대해 물었더니, 청구서가 두어 장 갈 것이라고 했다. 보험이 없으니까 60%를 깎아준다는 말도 했다.

 

이 주일 후, 결국 두 장의 청구서를 받았다. 하나는 병원, 다른 하나는 응급처치 의사로부터 $3,400 정도의 청구서를.

당시의 나는, 내게 도움을 주려는 좋은 의미의 후배에게 손해를 주기 싫었던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집사람은 내게 언성을 높였다. 일하다가 다쳤는데 후배가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배가 먼저 해결책을 제시했다. 본인 잘못도 있고 또 일하다가 그랬으니 치료비 걱정은 말라는 거다. 다만 최대한 깎아달라고 했다. 미국에서는 병원비도 Negotiation이 된다고 들었으니 내가 어떻게든 깎아보겠다고 했고, 치사하고 구차한 말로 사정을 하고 또 해서 $1,260로 합의를 했다.

 

그 돈은 후배가 냈음은 물론이다.

 

아픈 손가락에 보호대를 대고 다시 쫓아다닌 것은 사고가 난 후 4일 후였다. 다운타운의 어느 빌딩 2층에 생기는 치과병원을 위한 리모델링 공사현장이었다. 사다리 꼭대기에 올라 에어덕트를 이리 저리 옮기면서 설치하는 작업은 정말 힘들었다. 일한 다음날은 입맛이 다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3개월은 버틸 생각이었다. 그것도 못 버틴다면 내 스스로 너무 한심할 것 같았다.

하도 힘들어서 에어컨을 배우고 있던 학원에서 인스트럭터에게 물어보았다.

 

- 그거 힘들어서 아무나 못해요. 멕시칸들 잡이에요.

 

- 너무 힘들어서 그거 하는 멕시칸은 시간당 $15씩 줘요.

 

- 그런 일을 50이 넘은 장선생이 어떻게 합니까? 하지 마세요.

 

후배에게도 물었다. 이런 일까지 해야 하냐고.

 

- 이거 생각보다 괜찮아요. 하나에 $300씩 받아요. 생각만 잘 해서 설치하면 그리 힘들이지 않고도 하루에 네댓 개씩은 설치할 수 있어요.

 

- 선배님도 한번쯤은 해보셔야 에어컨에 연결되는 에어 닥트를 이해하시죠.

 

- 선배님은 손가락도 아프시니까 밑에서 공구나 집어주세요.

 

물론 힘든 일은 후배가 많이 했지만, 후배 말처럼 밑에서 공구나 집어주는 일만 할 수는 없었다.

 

- 선배님 자재 사러 갔다 올 동안, 이쪽 것 떼어내어 저쪽으로 옮기시고 저쪽 것은 오른쪽 방에서 설치하세요.

 

사흘 일하고 목요일 저녁 내 차 둔 곳으로 돌아왔을 때, 후배가 내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며 말했다.

 

-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빕니다. 일이 있으면 또 전화 드릴게요.

 

집에 돌아와 집사람에게 후배에게 받은 돈을 얼마인지 세어 보지도 않고 건네주었다.

 

- 에게. 삼일에 겨우 이백 불. 이거 받으려고 그 고생을 한단 말이야. 당장 그만 두어요.

 

- 멕시칸 헬퍼도 이것보다 낫겠다. 밤 8시 9시까지 부려먹으면서 이걸 준단 말이에요.

 

참,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에어컨을 생각했을 때는, 프레온 가스나 넣어주고 전기고장이나 고쳐주고 하는 정도의 일로만 생각했다.

 

물론 그 후배는 수입이 꽤 괜찮은 것으로 보였다.

대충 생각해도 바쁠 때는 하루에 500불에서 천불 이상까지 버는 듯 보였다. 리쿼 스토어에서 400불짜리 컴프레서 바꿔주고 900불을 받고, 2천 1,2백 불짜리 가정용 에어컨 교체해주고 3천 5백 불을 받았다.

 

일이 힘든 것을 생각하면 그리 많이 받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은 한다. 미국회사들은 5천불 이상을 받는데 그 사람들 보험이나 비용을 생각하면 그 정도 받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후배처럼 개인으로 하는 사람은 보험 같은 부대비용이나 사무실 같은 Overhead가 없으니까, 그렇게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또 6월에서부터 9월까지만 일이 많고 바쁘다. 즉 여름이 지나고 나면 거의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뭔가?

 

8월 마지막 주 금요일.

혼자 건물 옥상에 올라가 일을 끝내고, 로프로 자재들을 내리고 있었다. - 사다리를 타기 때문에 자재들을 옥상에 올리고 내릴 때는 로프를 사용한다.

카고 밴에서 인보이스를 작성한다고 차에 남았던 후배는 작성을 다했는지, 밑에서 담배를 피며 내가 내리는 걸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다른 편으로 돌아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면서 그 친구가 내가 내린 자재들을 차에 정리하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자재들은 그대로 그곳에 있었다.

 

- 아, 이 친구가 말로만 선배님, 선배님 하면서 나를 그야말로 부리기 좋은 ‘시다바리’ 취급을 하고 있구나.

 

병원비를 까는지 2주째 그 ‘수고비’조차도 없었다.

말을 하면 되겠지만, 말을 꺼내는 순간 그 친구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좋았던 관계도 사라질 것이다.

그깟 몇 백 불 때문에 앞으로도 동문회에서 계속 만나게 될 후배와 껄끄러워질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나는 굴러온 돌이고 그 친구는 박힌 돌이 아닌가?

 

그냥 조용히 이야기 했다.

 

○ 나 힘들어서 더 이상 못하겠어. 이번 달까지만 하고 그만 둘 거야. 그렇게까지 험한 일을 하는 자네가 존경스럽네. 나는 나이가 들어 그런 일은 더 이상 못해.

 

- 돈 때문에 하지, 누구는 하고 싶어서 합니까? 선배님은 성격이 너무 급한 것 같아요. 급하게 결정하지 마시고 천천히 생각하시고 결정하세요.

 

나도 성격이 급하지만, 자네도 보통이 아닌 것 같은데. 자네와 일할 때는 너무 서둘러서 내가 불안하기 짝이 없어.

 

- 빨리 끝내고 다른 곳에 가야하니까 그렇지, 전 성질 급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난 더 이상 못하겠어. 라이선스 취득한 후, 나 혼자 살살 다니면서 가정용 에어컨이나 봐주면서 살겠어. Commercial 에어컨은 할 생각도 없어. 아이들도 다 커서 제 밥벌이 하니까 큰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우리 부부 두 사람 먹고 살면 되는데 그렇게 힘든 일까지 하고 싶지 않아.

 

3개월의 잔인했던 현실체험은 이렇게 끝났다.

 

<후략>

누구나 남의 눈에 티는 보기 쉬워도 자기 눈에 박힌 대들보는 보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도 마찬가지겠지만. 의외로 많은 분이 제 글을 보고 댓글도 달아주시고 좋은 말도 해주셔서 모처럼 글쓰기가 재미가 납니다.

 

한국에서 직장생활 18년, 미국에서 11년 정도를 했습니다.

오륙도 사오정이니 조퇴니 명퇴니 하는 것들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퇴직을 했어도 직장을 다시 잡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들의 부족한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큰 착각 속에서 오만하게 살았는지 뼈저리게 자책을 합니다. 하하하

 

회사에서 붙잡아도 60까지만 일하겠다는 거창한 포부(?)도 한때는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2008년이 지나면서 모든 상황이 바뀌더군요. 믿었던 401K는 반에 반 토막이 나고, 믿었던 회사와 친구들은 말을 바꾸고, 미래는 갑자기 오렌지 빛에서 회색으로 잿빛으로 변해 가더군요.

 

후배로 인해 - 그도 사실은 삼성그룹에서 주재원으로 일하던 친굽니다. - 험한 현실을 제대로 배운 덕분에, 그동안 직장이라는 온실 속에서 세상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은 것이지요.

후배는 후배대로 저를 탓할지도 모르지요. 기껏 병원비 물어줬더니 받자마자 관두었다고.

 

5월 초부터 에어컨 기술을 배우기 위해 학원에 다녔습니다. 수강료는 한 달에 $600씩 $1,800이었습니다. 5월 말에 후배를 만나고 나서 6월부터 쫓아 다녔는데 매일 다닌 것은 아니고, 어느 홈데포 앞으로 몇 시까지 나오라고 전화연락이 오면 나가는 거지요. 어떤 때는 일주일 내내 안 찾을 때도 있지만, 항상 출동대기 상태(?)로 지냈는데, 나중에는 전화가 안 오면 안도할 정도가 되더군요.

 

오늘은 여기서 줄입니다.

모두들 행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