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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내일(來日)의 의미

내일(來日)’이라는 단어에는 긍정적인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내일과 함께 연상되는 단어는 희망이다. 사람이나 어떤 상황에 따라서는 내일과 희망은 같은 의미로 인식되기도 한다. 최소한 우리 세대는 그랬다. 우리 세대가 젊었을 때는 확실히 그랬다. 아니다, 지금까지 그랬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는지 모르겠다.

 

희망은 추상명사다. 오감으로는 어떤 것인지 확인할 수 없는 실체는 느낌으로 알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 실체가 나아진다거나 좋아진다는 의미라는 걸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에 내일=희망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오늘'을 버틸 수 있는 것은 내일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희망적이라는 상태보다 인간에게 시련을 견디게 하는 동시에 사람을 고무시키는 동기부여는 없다.

 

희망적이라는 상태는 필연적으로 조건이 붙는다. ‘열심히 노력하면희망적이라거나, ‘열심히 공부하면또는 열심히 운동하면희망적으로 된다는 것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희망적이라는 말은 어색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항상 희망적이었고 언제나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일의 의미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내일이 희망이 아니라 절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난생 처음으로 들었던 것은 50대로 접어들면서부터이었던 것 같다. 안구 건조증이라는 생전 처음 겪는 증상과 함께 노안과 기억력 감퇴가 심해지고 불면에 시달리면서 내일에 자신이 없어졌다. 그리고 2008년 말 레이오프를 당하면서는 갑자기 내일이 암담해졌다. “아직 10년은 더 일해야 하는데 어떡하지?” 큰일 났다는 생각이 앞섰고 모든 것이 당황스러웠다. 내일에 대한 의미가 크게 바뀌는 순간이었다.

 

후진국에서 태어나 가난한 시대를 만난 것이 돌이켜보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다른 말로 번역하면, 그만큼 좋아지고 나아질 여지가 크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 그곳에는 희망과 내일이 있었다. 열심히 공부하면 학비가 저렴한 국립대에 진학할 수 있었고, 열심히 노력하면 남들이 사는 만큼 살 수 있었고, 열심히 저축하면 집도 장만할 수 있었다.

 

경제성장률이 10% 안팎을 넘나들었다. 회사들은 늘어났고 조직은 커졌으며 덩달아 취업도 쉬웠다. 동네 어귀에서 구멍가게나 중국집을 하더라도 망해서 문 닫는 일은 없었다. 인구는 불어났고 높은 금리의 재형저축, 주택청약예금 등 서민에게 주는 혜택도 많아서 목돈 마련도 쉬웠을 뿐만 아니라 빚을 얻기가 힘들었던 덕분에 분수를 지킬 줄 알았고 빚도 없었다. 살고 있는 집은 해마다 가격이 뛰었다. 이민도 나쁘지 않았다. 생활수준의 차이가 워낙 커서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부자 나라에서 바닥 삶을 살아도 고국의 그것과는 비교되지 않았다. 우리가 살았던 시대상은 그랬다.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내일의 의미가 우리들의 그것만큼 희망적일까. 한국이 선진국들의 친목모임이라는 ‘OECD’에 가입한 게, 20년 전인 199612월이었다. 최근의 경제성장률은 2%대에 머물고 있으며, 새로 생기는 회사보다는 도산하는 기업이 많고, 저성장에 대비하는 회사들은 조직을 축소하기에 바쁘다.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의 속도를 유지해야 한다. 경제도 마찬가지로 현상유지를 위해서 최소 3%의 경제성장이 필요하다.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덕분에 대학에 들어가는 많아졌으나, 높아진 등록금과 쉬워진 학자금 대출로 졸업하는 순간 빚쟁이로 전락하게 만들어 놓고, 학력에 맞춰 들어 갈만한 회사는 별로 없다. 경기부양을 부동산에 기대는 경제정책으로 천정부지로 높아진 집값은, 저출산과 맞물려 떨어질 가능성이 훨씬 커서 미래를 보장해주지도 않는다. 또한 월세를 감당하기 힘든 경제구조 때문에 주택을 억지로 구입하느라 빚쟁이가 된다. 이미 높아진 생활수준은 더 나아질 여지도 없다. 한정된 나라의 자원(Resource)을 독차지한 기득권들은 그들끼리의 리그를 만들어 부와 권력을 세습하기에 여념이 없다. 대부분의 서민은 지금 현상을 유지하기에도 벅차다. 지난 3~40년 동안 한국은 그렇게 변했다.

 

우리가 소유했던 젊은 날의 내일, 오늘의 젊은이들이 마주하는 내일과 의미에서 크게 다르다. 우리들의 내일이 나아진다는 의미였다면, 지금의 내일은 오늘과 다름없는 내일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오늘과 같은 내일을 유지하는 것도 힘에 부친다. 빚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저축이라는 희망이 있었지만, 이들에게는 빚이라는 덫이 있다.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아니라, 더 나빠질 거라는 절망만이 보이는 내일은 어떤 의미일까.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다.

 

얼마 전에 호주에서 온 분과 소주잔을 기울이다 논쟁한 적이 있었다. 누구나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한다는 것이 그분의 주장이었다. 틀렸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단편적인 경험에 근거한 판단은 오류를 일으키기 쉽다. 때로는 전문가의 의견도 필요하다. 내 경험이 중요하다면 다른 사람의 경험도 그만큼 존중되어야 한다. 경험에 근거했다는 이유로 내 판단만 옳다는 주장은 일방통행이다.

 

일주일 전 야구 해설가로 유명했던 하일성 씨(68)의 자살에 즈음해서 연이어 안타까운 소식들이 뉴스를 장식했다. 원룸에서 서로 모르는 청춘들 4명이 스스로 삶을 포기했고, ‘파송송 계란탁이라는 영화를 감독했던 오상훈 씨(49)가 자살했다. 20대 초반의 여성과 서른 살의 남성들까지 어떤 사연으로 목숨을 버려야 했을까. 1년에 14000, 하루 평균 38명이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OECD 중에서도 압도적 자살률 1위 국가다. 게다가 자살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지난달 서울 노원구의 한 학원 화장실에서 12살 초등학생이 자살하는 일까지 생겼다.(관련기사)

 

누가 이들에게서 내일을 앗아갔을까? 10년 전이라면 내 차가운 이성은 이런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일이라는 장밋빛 개념을 짓밟는 몰상식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내일의 희망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려는 게으름을 꾸짖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미국에서 경험한 내일에서 절망을 보았던 이후에 내일에 대한 착각에서 겨우 벗어났다.

 

내일은 그저 내일일 뿐이다. 24마일 저 앞에 보이는 내일을 잡으려고 한 시간에 1마일씩 열심히 쫓아가서 손에 잡으려는 순간, 다시 24마일 밖으로 사라져버리는 내일은, 영원히 오지 않는 환상일 뿐이다. 그런 착시현상에 속아 내일을 위한답시고 오늘을 희생하며 살아온 지난날이 후회로 다가온다.

 

내일에서 걱정과 절망을 본 젊은이들은 결혼도 미루고, 아이도 낳으려 하지 않으며 때로는 죽음으로 내몰기까지 한다.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내일을 절망이 아닌 희망으로 연결시킬 수 있을까. 정치인들의 책임이 참으로 크다. 그들에게 나아질 것이 전혀 없는 '내일 또 내일'을 위해, 결혼하고 애 낳으며 열심히 살라고 강요만 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