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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성공적으로 나이 들기 (7)

베일런트 교수는 연구를 진행하면서, 에릭슨 교수가 수립한 '성인발달과정' 6단계 개념을 구체적인 사례 연구로 실증했다. 책에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나 책을 읽으면서 정체성은 20대에 어른으로 태어나는 과정이고, 친밀감은 20대 중반부터 배우자를 찾아가는 과정, 직업적 안정은 30대의 사회인으로서 정착하는 과정이라고 나름대로 정의해 보았다. (책의 한국말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단 책의 용어를 그대로 인용한다.)


이런 단계는 사람에 따라 나이와 상관없을 수도 있겠지만, 50세가 되어도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다음의 단계인 생산성은 40대, 의미의 수호자는 50대, 통합은 60대 이후에 나타나게 되는 과정이라고 판단했다. 이미 언급했듯이 사람에 따라 이런 과정은 빠르게도 혹은 늦게도 진행될 수도 있으므로,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공자나 맹자,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위대한 인물은 2~30대에 이미 5~60대의 과정인 의미의 수호자나 통합의 단계에 도달했던 분들이다.


④ 생산성(Generativity)


여섯 단계 중에서 이해하기 가장 힘들었다. 책에서는 '다음 세대를 헌신적으로 지도할 능력을 갖추는 것'이라고 짧게 정의했지만 의미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우선 '생산성'이라는 번역 자체가 원래의 단어가 주는 뉘앙스와 너문나 다르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연륜의 지혜'라고 고치고 내가 이해한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베일런트 교수가 의도한 것과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밝힌다.


1980년 대 초, 사회 초년생 티를 벗어나지 못했을 무렵, 두 가지 사상이 직장생활 전반을 지배했다. '신자유주의 사상'과 '토요다 자동차의 생산성'이었다. 신자유주의 물결은 당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도날드 레이건'과 영국의 '마가렛 대처' 수상에서 비롯되어 한국까지 전파되었으며, 토요다 자동차에서 괄목할만한 생산성 향상이 공장 내 현장 분임조 활동으로 작은 창조적 아이디어들이 모여, 혁신적인 '생산성 향상과 비용절감'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20대 중후반이었던 나는 이런 사조에 대해 부정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무조건 옳다고 믿었던 배경에는 정치인이나 큰 조직을 운영하는 높은 사람들이 추진하는 정책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과장이나 부장의 지시는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조건 따랐던 시절이었으며, 자신의 일에만 몰두했고 세상사에는 근시안이었으니 당연했다.


당시 유행했던 '신자유주의 사상'을 회고해보면, 작은 정부와 작은 조직을 지향했고 무조건 효율과 능률, 이익만을 중요시했다. 예를 든다면, 경찰력도 민간화하자는 것이 있다. 전년도에 경찰조직 운영비, 범죄 발생률, 범인 검거 율을 따져서, 경찰력을 입찰을 통해 민간인에게 넘기고 범죄 발생율과 범인 검거율의 개선만 추구하자는 논리였다. 실제 미국에서는 레이건 행정부가 강력하게 작은 정부를 추진하는 바람에 민간운영 교도소가 생기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말도 아니지만 그땐 그랬다. 여기에 대해 글을 쓰려면 한두 편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많지만, 여기서의 요점은 아니기에 생략한다. 그런데 '연륜의 지혜'가 생긴 40대에 같은 일이 생겼다면 어땠을까. 무조건 수용하고 따르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스스로 판단해서 긍정할 건 긍정하고 부정할 건 부정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내가 위로부터의 명령이나 지시에 순순히 따르지 않고, 부정하고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 30대 중후반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즉, 나름의 견해를 갖고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부모님의 강요는 억지 고집일 뿐 옳지 않다는 생각, 보스의 지시가 부당하다는 저항심, 정부의 방침이 사회정의에 반한다는 분노의 바탕에는 세월의 연륜이 자리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이가 듦에 따라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모든 사람이 같은 과정을 겪는 것은 아니다. 건너 뛸 수도 있고 뒤죽박죽으로 순서가 바뀔 수 있는 것은 저마다의 경험이 전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신자유주의 사상이 무조건 틀린 것은 아니다. 대처 수상이 1976년 영국에 IMF를 초래했던 '영국병-고복지, 고비용, 저효율의 만성적인 사회구조'를 강력하게 극복하는데 신자유주의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그 이후 '인간의 탐욕'이라는 요소를 간과한 잘못으로, 미국과 영국, 한국과 같은 '신자유주의'를 추진했던 국가에서는 부(富)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었고, 미국에서는 2008년 경제위기가 초래되었다. 효율과 비용을 중요시하는 미국의 민간교도소에서는 재소자의 인권이 지켜지지 않았다. 이렇듯 인간의 이기심이 작용하면 많은 현상들이 왜곡된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옛날 친구들의 변한 모습을 접하고 놀랐다. 학창시절에는 박정희 유신독재와 전두환 군부독재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야당 편에 섰던 많은 친구들이, 이명박 정부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비판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들었으나 지금은 대체로 이해한다. 토목을 전공한 그 친구는 이명박 토건정부에서 대기업 임원이 되었고, 소위 강남이라는 곳에 살며 한국사회의 기득권으로 거듭난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정치적 견해나 사상은, 이기심 앞에서는 해 뜨기 전의 새벽안개 같은 것이다.


그랜트 그룹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민주당 성향이지만 공화당 성향도 분명 있으며, 경향이 그렇다는 것이지 많이 배웠다고 해서 모두 좌파적 사고를 갖는 것도 아니다. 엊그제 독일에서 있었던 주 의회 선거에서 메르켈의 집권여당이 3위에 그쳤다. '반(反)이슬람, 반(反)난민'을 내건 극우정당이 2위를 차지했다. 나치의 악몽이 남아있는 독일에서도, 이기심이 상식을 누른 것이다.


그러나 이기심이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행복은 신(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발달과정을 따를 때만이 찾아온다. 사춘기가 육체적인 어른으로, 정체성 확립이 사상적 경제적 독립과 함께 정신적인 성인으로의 시작점이라면, 생산성(연륜의 지혜)은 성숙한 사회적 인간으로 거듭 나서 사고의 지평을 국가적, 세계적, 인류적 차원으로 넓혀가는 출발점이라는 것이, 책을 여러번에 걸쳐 정독하며 대체로 이해한 내용이다.


이런 추론은 연구 대상자의 사례에서 충분히 밝혀진다. 4~50대의 삶에 따라 70대 이후에 살아가는 방법과 느끼는 행복에 차이가 많았다. 따라서 독일이 어떻고, 한국사회가 나쁘고, 미국이 좋다며 비교하는 것은 현명한 자세가 아니다. 40대를 넘기고 5~60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연륜의 지혜'로 이기심과 편협된 사고에서 벗어나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부정과 불의를 비판하며,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통해서 노후에는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베일런트가 70년 동안 연구해서 내놓은 해석이다.


<후기>

'Generativity'라는 중요한 화두(話頭)는 쓸 수 있는 소재가 너무 많아서 고심했습니다. 버클리 대학의 심리학 박사인 에릭슨 이전에는, 노인에 대한 이미지는 대부분 부정적이었다고 합니다. 셰익스피어 작품에 등장하는 노인들이 그런 것처럼, 나이가 든 사람들은 자주 편협하고 고루한 고집불통으로 묘사되기 일쑤였습니다. 우리나라 작품들도 대부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잔인한 시어머니, 무책임한 아버지, 이기적이고 고집 센 노인들이, 그렇지 않은 어른들보다 훨씬 많이 등장합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덴마크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에릭슨은, 성인이 된 후에야 자신이 유태인 모친의 불륜으로 태어난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사립학교 교사로 지내다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딸인 안나를 만나게 된 것이 정신분석학을 공부한 계기가 되어, 정신과 의사로 활동했으며 나중에는 하버드에서 인간개발학 교수로 은퇴했다고 전합니다.(위키백과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