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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사는 이야기

끔찍했던 운전경험

한국으로 돌아온 것도 거의 6년이 되어간다. 제주에 정착하고 나서 3개월이 안 돼 만든 카페였으니 나의 한국생활은 이 카페가 전부인 셈이고, 글쓰기는 실질적인 직업인 동시에 취미이자 소일거리였다. 댓글이나 한줄 메모장을 제외한 글만 해도 1,200개가 넘었으니, 글의 질적 수준을 따지지 않는다면 실로 엄청난 양의 글을 쓴 셈이다. 내가 죽어서 사라진다 해도 그동안 쓴 글은 어디엔가 남아 누군가에게 읽힐 거라는 착각으로 오늘도 글을 쓴다.

 

글을 다루면서 느끼는 것은 글쓰기에 일단 발동이 걸리면, 글감이 계속 떠오른다는 것이다. 뉴스를 보거나, 소설을 읽거나, TV의 다큐멘터리를 접하면서, 순간순간 글감이 생각나고 글로 남기겠다는 욕망에 휩싸이곤 한다. 물론 그렇게 떠오르는 글감을 전부 글로 옮길 수는 없다. 그럴만한 능력이나 자질도 없지만, 흉내나 모방이 아닌 글로 특유의 진솔한 내용을 담으려면 주위사람의 사생활도 생각해야 하는 등의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다.

 

작년부터 소설을 써보려고 준비도 하고 나름 애를 써보았으나, 창작에는 능력도, 소질도 없는지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와 구상을 지난 4개월 동안 몇 페이지만 써놓고는 진도를 못 내고 있다. 허구인 소설은 써놓고 다시 읽어보면 너무 거짓말이 뻔한 것 같아서, 도저히 다른 이에게 읽으라고 권할 자신이 서지 않는다. 그러니 썼다가 삭제하기만 반복할 뿐이다. 어떻게 하면 상상 속의 이야기를 사실처럼 풀어낼 수 있을까? 내게는 영원히 풀지 못할 것 같은 숙제와 같다.

 

그저, 살아온 지난 세월의 경험을 바탕으로 에세이나 끄적이는 게, 내게 딱 어울리는 수준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서론이 길었졌으나, 오늘도 소설을 쓰겠다고 새벽에 기상해서 몇 시간 동안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 절망하고, 내 수준에 맞는 글이나 쓰겠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제에 이어 계속되는 운전 이야기다.

 

제주에서 글쓰기 다음으로 가장 오래 일한 직업이 운전이었다. 처음 운전을 하게 된 계기는, 제주에서 사귄 친구가 갑작스럽게 수술하게 되어, 그가 하는 어린이집 차량을 스페어로 한 달간 땜빵하면서다.(관련글 보기) 그 친구의 소개로 나중에 초등생들이 다니는 보습학원 차량을 1년 가까이 운전하다가 그만두었고(관련글 보기), 집 인근에 있는 유치원 차량을 6개월 동안 운전했던 것은 2년 전이다.

 

유치원 차량을 끝으로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큰 사고가 없었던 것은 정말 운이 좋았던 탓이었다. 운동을 하거나 운전을 하다가, 사고 날 뻔했던 끔찍한 기억이 떠올라 소름이 돋고 몸서리가 쳐지는 순간이 간혹 있다. 최근의 뉴스를고도 그 기억을 떠올려야만 했다.

 

이번 여름에 어린이집 차량이 후진을 하다가 세 살 된 아이를 치어 죽이는 사건과, 차에서 잠들은 아이를 한여름 차속에 방치해서 질식하게 만드는 사건이 그것이다. 이 두 사건을 어른들의 부주의나 소홀로 몰아가는 뉴스는 나를 코웃음을 치게 만들었다. 내 경험에 입각해서 판단한다면, 그들의 잘못이 아닌 100% 시스템 문제였다.

 

마지막에 운전했던 유치원은 규모가 꽤 컸다. 대형버스와 중형버스가 각각 한 대, 12인승 풀사이즈 밴이 두 대 있었고 나는 그 밴을 운전했다. 내게 차량운전을 인계한 교사는 신혼 중인 여성이었는데, 제주의 사립유치원으로는 다섯 손가락에 든다고 자랑삼아 말했다. 이 여자가 노선을 알려주며 내게 했던 말은 이랬다.

 

- 아라초등학교 신호등은 53분에 건너야 합니다. 저 앞 신호등은 05분에 건너야 합니다. 이 길이 막히면 저리로 돌아가도 됩니다. 여기서 기다리는 건 불법이지만, 하는 수 없습니다.

 

아침에는 약 세 시간 동안 세 트립을 하는데도, 오줌 눌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돌아야 했다. 시간이 약간만 늦으면 부모로부터 불만이 섞인 전화가 왔다는 전갈이 왔다. 시간에 맞춰 도착해도 한 아이만 제시간에 안 나오면 그 뒤는 줄줄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 시간에 신호등을 건너려면 과속도 하고, 눈치껏 신호도 무시해야 했다. 신호등 하나에 3분이 늦어졌다.

 

저녁에 데려다 주는 것도 문제였다. 차량탑승 보육교사가 마중 나온 보호자에게 손에서 손으로 아이를 인계하도록 법제화 되었는데, 제 시간에 안 나오는 보호자들이 흔했다. 퇴근 길 막히는 도로에서 불법으로 정차하고 기다리는 것도 쉽지 않았고, 한 번 늦어지면 줄줄이 늦어질 수밖에 없는데도 부모들은 항의 전화를 했다. 그렇게 한두 번 늦어지면, 그 다음부터는 부모들이 아예 그걸 계산하고 늦게 나왔다.

 

그런 경험에 의하면 사고가 그 정도에 그치는 게 오히려 신기하기만 하다. 그럼 왜 아이를 차량에 방치했을까? 아마 기사는 오줌 누러 가기에 바빴을 테고, 탑승교사는 천방지축 아이들을 인솔하기에 정신없어서 순간 깜빡했을 거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고, 항상 시간에 쫓기는 그들은 그날따라 정신이 없었을 수도 있으니까.

 

해결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차량을 늘리고 배차시간을 충분히 주면 된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 이유도 간단하다. 차량과 운전수의 숫자는 유치원의 수익과 직결된다. 그들은 아이의 머릿수를 돈으로 계산할 뿐이지, 안전이 돈 보다 우선시 되지는 않는다. 최소한의 차와 운전수로 최대한 많이 회전시키는 게 그들의 수익에는 최선이다.

 

물론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기사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소변 볼 시간도 주지 않으면서 말이다. 부모들이 차가 늦는다고 불평하면, 운전 중인 차량에 전화해서 그대로 전하면서 말이다. 시스템을 문제 삼지 않고, 사고를 낸 당사자 탓으로만 돌리는 언론과 한 치의 다름도 없다.

 

가슴으로 문제를 파악하지 않고 머리로만 판단하는 한, 모든 것을 이익에만 결부시키고 능률과 효율만 따지는 한, 부모들의 갑질 항의조차도 힘없는 운전수에게 그대로 전가하는 한, 이런 사고는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계속 반복해서 일어날 것이 틀림없다.

 

지금도 가끔씩 생각나며 소름 돋게 하는 기억들이다.

 

- 초저녁이지만 한겨울이라 깜깜한 밤이었다. 시간은 늦었고 왕복 6차선 넓은 도로의 양쪽에는 차량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불법 유턴을 했는데, 갑자기 시커먼 사람 그림자가 나타났다. 나처럼 불법으로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급브레이크를 밟고 정지한 것은 아마 그 보행자와 거리가 1미터도 안 되었을 거다. 브레이크가 잘 들었던 것이 서로에게 행운이었다.


초등생이 다니는 보습학원이지만 선행 학습하느라 다니는 유치원생도 있었다. 유치원이 새로 생긴 초등학교 부설로 학교 안에 있었다. 차량이 학교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데도, 아이를 태우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학원차량들이 학교를 드나들었다. 그날도 약간 늦었다. 학교 내에서 본관 건물 앞을 지나는데 건물에서 아이 하나가 쏜살같이 차 앞으로 튀어나왔다. 반사신경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하마터면 아이 하나를 죽일 뻔했다.


쥐구멍을 찾고 싶을 정도로 창피한 일도 있었다. 편도 1차선 길에서 신호등에서 직진을 해야 하는데, 우회전하는 차가 보행신호 때문에 길을 막고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은 늦었고 급한 마음에 반대 차선으로 가다가 직진하다가 중간에 신호가 끊겨 버렸다. 어떻게 되었을까? 읽는 분의 상상에 맡긴다. 도로가 개판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 컴컴한 주택가 골목이었다. 차에서 내려 길만 건너면 되기에 보호자가 나오지 않는 아이였다. 탑승교사는 차량 앞에서 아이에게 건너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유치원 차량 뒷편에서 SUV 한 대가 헤드라이트도 켜지 않고 쏜살같이 다가왔다. 미국에서는 노란색 차가 서있으면 방향에 관계없이 무조건 차량이 멈추어야만 한다. 놀라서 크락숀을 길게 눌렀고 길을 건너려던 아이가 소리에 놀라 멈칫했다. 그덕에 아이가 살았다.

 

<후기>
미국에서도 에어컨 조수로 따라다니며 3D 잡을 해보았지만, 한국에서의 3D는 정말 할 짓이 아니었습니다. 쉰살이 넘어서 경제활동을 해야만 하는 분이 한국으로 온다고 하면 절대적으로 말리고 싶습니다. 그런 일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다고 하면, 저는 지금이라도 미국으로 돌아갈 겁니다.

새벽 3시에 깨서 소설을 구상한다고 앉았다가 포기하고는 옛 기억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글이라도 올리면 오늘 하루 무의미하게 보내지는 않았다는 안도감이 생깁니다. 수 십만 년 전 인류의 조상들이 동굴 안에 그림이라도 그려 남긴 것을 보면, 글이든 그림이든 남기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일 겁니다. 저는 그 본능에 충실한 것이고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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