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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사는 이야기

사위傳

제주에 정착하고 나서 일 년쯤 되었을 때, 세 아이 중에서 큰 아이가 가장 먼저 제주를 찾았던 때가 2012년 3월이었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제주공항 하늘 위까지 왔던 항공기는 갑자기 짙어진 해무 탓에 김포로 회항하는 우여곡절을 거쳐 다음날이 돼서야 겨우 조우할 수 있었다.


"아빠, 비행기가 곧 착륙한다고 안내방송을 하고 나서 계속 빙빙 돌기만 하는 거야. 30분도 더 그러더니 해무 때문에 착륙이 어려워서 김포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나는 해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답답한 거야. 그래서 스튜어디스를 불러 물어보았더니 옆자리 아저씨가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더라."


그렇게 만난 아이가 자신이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있다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려주었다.


원래는 남자 친구의 모임에서 만난 남자 친구의 친구이었는데, 자신의 남자 친구는 그냥 친구일 뿐이지 남자로 생각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모임에서 처음 만난 그 남자는 시작부터 뭔가 달랐다. 남자는 뉴저지 남쪽 '체리힐'이라는 동네에 살고 있는데 주말마다 자신을 만나러 100마일이 넘는 거리를 오간다. 


그러더니 결혼하겠다며 전화로 연결시켜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결혼한 것은 일 년 후인 2013년 8월이었다. 뉴저지에서 처음 만난 사위는 인상은 좋았으나 나를 어려워하는 것이 역력했다. 무얼 물어보면 "네, 네, 네"하며 '네' 소리만 연발했다. 곧바로 내가 한 말을 이해하고 답했느냐고 추궁하면, '솔직히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간간히 영어를 섞어 말하곤 했으니 그런 대화가 진솔하게 계속되기는 힘들었다.


"요셉이 먼저 다니던 대학에서 자퇴했다고 들었는데, 저는 그 사유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상견례 자리에서 처음 만난 사돈에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기도 했다. 안사돈이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듯 얼버무렸지만 꼬치꼬치 캐물을 자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사위도 이번에는 자초지종을 자세하게 털어놓았다.


"저의 외조부님이 목사님이셨고 어려서부터 크리스천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자연히 부모님이 원하는 크리스천 대학에 갔습니다. 사우스 캐롤라이너에 있는 '밥 존스'라는 이름의 대학으로, 규율이 무척 엄격했습니다. 흡연하다 걸리면 페널티가 100점, 음주 적발에는 150점인데, 벌점 누적이 150점이면 쫓겨났습니다. 그러니까 술은 한 번만 걸려도 바로 퇴교조치를 당하는 겁니다. 1년 6개월을 다니다가 결국 못 버티고 제 스스로 나왔습니다. 쫓겨나기 전에 알아서 그만둔 것입니다.


뉴저지 럿거스로 옮겨서 같은 '컴퓨터 사이언스'를 하려니까 밥존스에서 이수한 학점을 인정해주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전공을 바꾸게 된 겁니다. 밥존스 시절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지금도 그 학교에 다녔을 때 겪었던 일이 꿈에 나타나곤 합니다."


미국에는 자유분방한 대학만 있는 것으로만 알고 있던 내게는 금시초문이었다. 사관학교도 아닌데도 그런 대학이 있다는 것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지만, 사위는 거짓말이나 과장을 섞어 이야기할 사람은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내 군대 시절을 떠올렸다. 제대한 지 10년이 지난 후에도 군대의 기억은 악몽으로 남아서, 꿈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소재가 되었다. 서류가 잘못되어 다시 군대에 가야 한다는 둥, 복무기간이 연장되어 못다 한 기간을 채워야 한다는 둥, 그럴듯한 사연으로 포장된 꿈이 수시로 나타나 현실이지 꿈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악몽이 되곤 했다.


그래, 그런 혹독한 여건을 이겨냈다면 더 좋았을 것이지만, 그랬다면 인간성이 없는 인간이 됐을지도 모르고 딸아이를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지. 그런 사람이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어도 실패한 인생을 사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 게 인생 아니겠는가. 인생은 100미터 단거리 경주가 아니다. 42.195킬로를 달리는 마라톤이 아니던가. 힘들 때는 힘들다고 말하고 불평도 늘어놓는 그런 인간적인 속성이 더 필요할 수도 있는 게 바로 인생이니까.


"저도 아버님의 경우와 똑같습니다. 저도 한국계 회사에 다니니까 한국 사람들과 한국말로 회의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열중해서 들으면 처음에는 잘 들리는데, 30분 정도 지나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영어 때문에 고생했던 경험을 듣던 사위가 내 처지를 이해한다는 듯 크게 맞장구를 쳤다. "하하하" 나는 사위의 말에 크게 웃었다. "그럼 그렇지, 영어 못하는 나만 그랬겠어, 한국말 못하는 너도 마찬가지구나"라는 생각에 통쾌했다.


남대문 시장 쪽에서 남산을 올라 장충공원 방향으로 내려왔을 때는 점심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우리는 장충동 족발 집에 마주 앉았다. 대낮이지만 족발과 함께 술을 시켰다. 전날 친구를 만나 과음한 사위는 막걸리를 나는 소주를 시켰다. 빈말인지는 몰라도 맛있다는 감탄을 곁들이며 대화를 계속했다. 내 질문이 엉성할 때는 사위는 질문의 요지를 되물었다. 또 의견이 다를 때는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밝혔다. 꼭 내 젊은 시절을 마주하는 듯했다.


누군가에게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아버지를 가장 싫어했는데,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을 만나 살고 있다." 30년 전 내 친구는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너는 어떻게 네 엄마와 그렇게 닮은 사람과 결혼했냐?" 물론 사위는 나와 많이 다르다. 걷는 것부터 매사 느릿느릿하다. 자신의 생각이 아내와 다를 때는 아내의 의견을 좇았다. 그러나 비슷한 것도 많았다. 대화하는 투가 그랬고 나를 대하는 태도도 어디선가 많이 본 듯 낯익었다.


수북이 쌓인 족발 접시와 소주, 막걸리 한 병을 깨끗하게 비웠을 때는 식당에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만난 사위와 장인은 그렇게 온전히 하루를 보냈기에 한걸음은 아니더라도 한 뼘 정도는 가까워졌을지 모르겠다. 대낮에 마신 소주 탓이었을까, 아니면 가까워졌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던 탓이었을까. 족발 집을 나서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인생은 마라톤이다. 길고 긴 여정이라는 말이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고, 지쳐서 쓰러질 때도 분명히 있을 거다. 네 아내와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앞으로 나와 상의해라. 나는 네 편에 있을 테니까!"


<후기>

엊저녁에 제주로 돌아와서 오랜만에 글을 씁니다.

아이들이 결혼할 때 보고 3년 만에 본 아이들이었습니다. 출장으로 온 딸은 회사 스케줄에 묶여 있었고, 사위는 사위대로 친척과 지인들 만나느라 같이 하는 시간은 짧았지만, 허기진 부녀 간 정을 어느 정도 달랠 수는 있었습니다. 이민을 가지 않았다거나, 계속 미국에 살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겠지만, 모든 게 자업자득이고 인생이란 게 모든 걸 만족할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오늘도 플라톤의 '행복을 위한 다섯 가지 조건'을 되뇌며 위안을 삼습니다.


첫째, 먹고 입고 살기에 조금은 부족한 듯한 재산.

둘째,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엔 조금은 부족한 외모.

셋째, 자신이 생각하는 것의 절반밖에 인정받지 못하는 명예.

넷째, 남과 힘을 겨루었을 때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 사람에게는 질 정도의 체력.

다섯째, 연설했을 때 듣는 사람의 절반 정도가 박수를 칠 수 있는 말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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