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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잡담한설(雜談閑說) - 14

독일 짝사랑


한국으로 돌아와 살면서 새로 알게 된 것 중의 하나가 독일에 대한 것이다. 남해에 조성된 독일마을을 취재한 '다큐멘터리 3일'을 통해서 독일인과 결혼한 파독간호사들이 은퇴 후에, 독일 남편들이 한국인 부인을 위해 한국 지방정부 도움으로 조성된 마을에 모여 산다는 사실부터, 각종 시사와 교양프로그램에서 독일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또한 선거에서 낙선한 유명 정치인들이 공백기를 이용하여 선진정치 연구를 위해 찾는 나라도 독일이었다. 그들의 교육제도, 회사운영, 노조활동, 정치제도 등 모든 것을 배우고 모방하고 싶은 것은, 같은 분단국가로서 통일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먼저 성공한 나라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해 보였다. 게다가 같은 전범국가인 일본과는 다르게 독일은 총리가 이웃나라 폴란드를 찾아 진심어린 사죄를 하는 모습도 부러웠다. 그런 현상에 감동을 받아 한국의 롤모델은 미국이 아니라 독일이라는 글을 쓴 적도 있다.(관련글보기)


머세데즈와 BMW로 대표되는 독일 자동차부터 가전제품 밀레나 주방용 쌍둥이 칼에 이르기까지 독일제품은 완벽함과 동시에 최고의 성능이라는 믿음을 갖게 했다. 그런데 이것은 한국의 독일 사랑이 유별나서 그렇지, 전세계 모든 국민들에서 독일에 대한 국가 이미지가 가장 좋기는 했다. 2014년 영국 BBC에서 조사한 국가이미지 순위에 따르면 독일 다음으로 캐나다, 영국, 프랑스, 일본 순이었다.(관련기사보기) 한국은 중국과 인도 사이에 위치한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믿음에 손상이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폭스바겐 자동차의 조직적이고 비도덕적 연비조작이다. 특히 국내 소비자에 대한 폭스바겐의 태도는 한국인들을 더욱 분노케 만들었다. 강대국 미국의 소비자들에게는 천문학적 액수를 배상하면서도, 한국의 소비자들에게는 '배째라!'는 식으로 나온 것이다.


한국의 변방 제주에서도 가장 흔하게 보는 외제차는, 미국의 GM이나 포드도 아니고 일본의 토요다나 혼다도 아니다. 바로 머세데즈, BMW, 폭스바겐의 독일 차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미국의 웬만한 변두리보다 흔하게 보인다. 한국인들의 독일에 대한 무한 애정의 표시다. 그런데 폭스바겐은 그런 한국인들의 신뢰를 무참히 짓밟았다. 이제 폭스바겐은 한국에서 아무도 사지 않는 차로 전락했고, 독일에 대한 한국인의 짝사랑도 예전 같지는 않을 것 같다.


독일도 여느 나라와 같이 이익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이며 특출나게 도덕적이지도 않고 그들의 회사도 철저한 이익집단일 뿐이다. '롤프 마파엘' 주한 독일대사가 신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했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독일이 그리 대단한 나라인 줄 한국에 와서 알았다.”


법 없이도 살 사람


아버지를 회상하면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이 연상된다. "네 아버지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라는 말을 어릴 때 아버지에 대해 어른들로부터 듣곤 했다. 하물며 엄마도 어린 내게 곧잘 했던 이 말을 다시 언급하지 않게 된 것은, 아버지를 만나기 전에 낳은 유복자 아들 때문에 집안에 문제가 생기고 부모님이 다투게 되었던 탓일 거다.


어린 마음에도 이 말의 의미는 무능하다는 것을 에둘러 좋게 표현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법은 일종의 약속이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란,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될 사람이라는 뜻이다. 댓가를 주겠다고 일을 시킨 후에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바로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목수이었던 아버지가 딱 그랬다. 남의 일을 해주고도 '안 주는데 어떡해!'하면 그만이었다.


법이 강자에게도 필요할까? 천만의 말씀이고 만만의 콩떡이다. 그들에게는 법이나 규제 같은 것은 없을수록 좋다. 힘(돈) 없는 집단을 힘으로 눌러 개·돼지 취급할 수 있으니까. 법이나 규제가 필요한 이유는 약자를 위한 것이다. 힘 없는 자를 강자의 횡포나 부당한 대우나 범죄로부터 보호하고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다. 판사나 검사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한 것도 법을 지키라는 뜻이지, 권력으로 무장해서 사리사욕과 부정한 행사를 하라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법이 오·남용된다고 해서 그 기본정신이나 취지까지 폄하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법을 운용하는 자들의 잘못일 뿐이다.


우리 민족이 세운 최초의 나라인 고조선에는 오직 8법(法)만이 존재했다니, 그래도 될 만큼 태평성대이었음이 분명하다. 8법 중에서 지금까지 전해오는 3개 조항은 다음과 같다.


1. 사람을 죽인자는 그 즉시 죽음으로 갚는다(相殺以當時償殺) 

2.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배상한다(相傷以穀償)

3. 도둑질한 자는 남자의 경우에는 몰입하여 그 집 종(奴)이 되고 여자는 계집종을 만든다(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女子爲婢) 속전코자하는 자는 50만전을 낸다(欲自贖者人五十萬).


이렇듯 몇 개의 법조항만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사회가 그만큼 단순하기도 했지만, 법 없이도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였다는 반증이다. 옛날 6, 70년대에는 동네 아낙들이 하는 '계(契)'라는 것이 있었다. 내 모친도 열성적이었다. 계의 규정을 문서로 만들지 않아도 잘 지켜졌고, 몫돈이 당장 필요한 사람에게도, 몫돈을 마련하려는 사람에게도 큰 도움이 되는 서민들의 금융이었다. 하지만 규모가 커지고 조직화하고 문서화되면서 깨지고, '오야'가 곗돈을 들고 야반도주 하는 등 사기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8법만으로는 사회의 질서가 유지될 수 없는 이유는 자명하다. 강자가 약자를 약탈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될 수단이 훨씬 많아졌기 때문이다. 식사는 3만원, 선물은 5만원, 부조금은 10만원 이내로 한정하는 것은, 힘(돈) 있는 자들에 의해 정의가 약탈되지 않도록 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한국의 실정으로는 이 금액도 너무 많다고 본다. 법을 지키라고 준 권력을 엉뚱하게 이용하는 사람들이나 돈푼깨나 있다고 황당한 일을 저지르는 상식 밖의 일들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빈번하게 일어나는지 몇 가지만 살펴보자.


'사채왕-현직 판사 커넥션'

담뱃갑에 500만원 카드 3장 … 티슈통엔 현금 3000만원

여교사의 절규 "성추행 묵살… 학교도 아니다"

잊을 만 하면 터지는 재벌가의 '황당 사건'


최근에 벌어진 법조계 인사들의 파행은 어제 오늘 시작된 것이 아니다. 법을 지켜야 할 사람들도 이럴진대, 강자의 갑질이 횡행하는 사회에서, 구속력이 전혀 없는 양심과 정(情)에 의지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그들을 규제하고 제한하는 법이 필요하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Black lives matter!


black lives matter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미국에서 백인경찰이 흑인 피의자를 과잉 대응으로 살해하면서 흑백갈등이 경찰에 대한 보복 살인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아프리칸-아메리칸들이 'Black lives matter!'라는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모습이 날마다 뉴스를 장식한다.


그러나 사실 이 구호는 'All lives matter!'가 맞다. 피부색에 관계없이 모든 생명은 중요한 것 아닌가!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흑인에 대해서는 약자라는 점에서 막연한 동정심이 생기고, 백인 경찰의 인종편견에 대해서는 수치심으로 인해 강력하게 처벌해야한다는 쪽으로 기운다.


그러나 미국에서 살아본 경험에 의하면, 무조건 그렇게 흑백논리로만 판단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쳐든다. 미국에서 흑인들 거주지역을 밤중에 가본 분이 있다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것이다. 험악한 분위기가 정말이지 공포스럽다. 뉴저지 뉴왁이나 패터슨, 캠든 같은 곳에서는 살인사건이 빈번하고 총소리도 자주 들린다. 그런 곳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은 극도의 긴장 속에서 근무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에 D.C 지역에서 흑인판사가 맡긴 바지를 세탁소가 잃어버렸다며, 한인 주인에게 백만 달러를 배상하라는 황당한 소송을 낸 적이 있었다. 그런 소송에 피부색이 관련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힘없는 세탁소 주인은 한동안 공포 속에서 지내야 했을 거고 흑인이라면 평생 넌더리를 칠 거다. 오죽했으면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세탁소 보험이 다 생겼으니까.


흑인 청년에게 죽임을 당한 한인경찰도 있다. 만약에 그가 미주리 퍼거슨에서 백인 경찰이 18세 흑인청년 '마이클 브라운'에게 했던 것처럼, 공권력을 남용하거나 과잉대응을 했더라면 살아있을 수도 있었다. 한인 베테랑 경관 '안타까운 죽음'은 흑인사회의 책임이 분명하다. 


왜 그런 사태가 발생했는지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만이 정확한 진단을 통해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다. 백인경찰을 왜 풀어주었느냐고 비난만 하는 것도, 막연한 추측성 동정심도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데 도움이 안 되며, 'Black lives matter!' 또는 'All lives matter!'라는 구호를 외치며 서로에게 손가락질하고 목소리를 높인다고 해서 어떤 방책이 나올 수도 없다. 객관적인 기준에 근거한 냉정한 사고와 판단만이 적절한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다.


몇 그루의 나무만 보고 숲을 판단해서도 안 되지만, 숲을 보고 나무의 상태를 지레짐작하는 것도 위험하기는 같다.


<후기>

카페에 올라온 글이 없다는 핑계로 더위와 씨름을 해보았습니다. 법이 지켜야 할 약속이듯, 현대의 복잡한 삶은 서로 지켜야 할 약속으로 성립합니다. 제가 전공했던 통신도 규약(Protocol)이라는 약속이 기반이 됩니다. 조선시대의 봉화처럼 어떤 모양의 연기가 무슨 뜻을 가지는지 사전에 약속을 해둠으로써 의미를 갖는 것과 같습니다.


인터넷이나 컴퓨터도 알고보면 미리 정해둔 약속에 의한 것이고, 지금 보고 있는 웹페이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해둔 약속대로 코딩이 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표시되지 않습니다. 기계들 사이에서는 약속이 잘 지켜지지만, 인간사회에서는 약속을 피해가려고 할 뿐입니다. 기계들 사이에서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동작하지 않는 반면에, 인간들은 약속이 파괴되면 이익을 보는 집단이 존재하기 때문이겠지요. 특히 기득권들, 힘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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