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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사망신고서

아이가 태어나면 출생신고를 하고, 사람이 죽으면 사망신고를 한다. 30년이 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동사무소에 비치된 출생신고서 양식에 아이의 이름과 생년월일, 부모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기입했던 것 같다. 병원에서 출생증명서를 받아 첨부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


반대로 사람이 죽어서 사망신고를 할 때는 반드시 사망진단서가 필요하다. 작년 장인 상을 당해 주민센터에서 사망신고를 할 때, 병원에서 받은 사망진단서를 첨부했다. 사망진단서는 사망신고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화장을 하거나 묘지에 매장을 할 때도 필요하며, 보험이 있을 경우에는 보험금 수령에도 필수다. 자식이 해야 할 일이고, 1촌 관계인 자식이 없다면, 2촌인 형제나 3촌인 조카가, 그것도 아니라면 정부가 할 일이다.


사람의 자연적인 삶은 죽음으로 끝난다 하더라도, 법적으로서의 존재는 사망진단서로 종결된다. 따라서 누구에게나 사망진단서는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받는 서류로, 수령 일자만 알 수 없을 뿐 누구도 피해갈 수 없음은 진리이고, 그 진리를 부인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굳이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모순과 부조리를 느낀다. 의식하지 않는 것은 옳은 일일까? 의식하고 산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재미있는 상상이 나래를 펼친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게 살다가 간 인물이 있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다. ‘죽음을 의식해라.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인생에서 커다란 선택을 할 때 도움을 준다.’ 그가 했다는 죽음에 대한 성찰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하루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라. 그러면 언젠가 의인의 길을 가고 있을 것이다.’ 그가 17세 때 읽었다는 글이다. 이에 감명을 받고, 50세가 될 때까지 매일 아침 거울 앞에 서서 ‘오늘이 내 인생에서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는 일을 계속할 것인가?’ 물으며 하루를 시작했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다.


일개 범부인 주제에 세계적 천재인 그를 부정할 수는 없으나,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무례를 저지른다. 물론 근거 없는 결례는 아니다. 그의 말대로 매일 죽음을 상기했다면 직원들에게 그렇게 가혹할 수는 없다는 게 근거다. “You’re fired right now!” 그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직원을 즉흥적으로 해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프레젠테이션에 뛰어난 것으로도 유명하다. 터틀넥 티셔츠와 청바지 복장부터 하나의 액션, 한 마디의 말까지 철저히 계산해서 연출했다. 그토록 치밀한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가식적으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이 던지는 의미는 심장하다. 죽음 앞에서는 수치심이나 자존심, 의심이나 두려움, 남의 시선 따위를 의식하여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다. 실패의 많은 경우 타인의 존재, 수치심을 너무 의식하거나 자존심을 지키려고 무리하다가 그르치는 일이 많다. 내가 미국에서 그런 실패의 과정을 그대로 따랐고, 결국은 귀국하여 제주에서 사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살아갈 날의 두려움으로 인한 그릇된 판단과 잘못된 결정을 했던 덕분(?)에 편안한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다.


글의 소재인 사망진단서로 돌아간다. 사망진단서를 남보다 일찍 받고 싶은 사람은 없다. 의료기계의 도움으로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이건희 씨도 그렇고, 천국에 가면 영원한 안식이 기다리고 있노라고 침을 튀기며 외치는 목사들도 그 좋은 천국에 남보다 조금이라도 늦게 가려고 애쓴다. 미국 일리노이 대학 연구팀은 ‘명백하고 뚜렷한 행복의 조건’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라고 했다. 병치레가 없어야 한다는 조건이 따른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1년 이상 남의 도움 없이 대소변조차 건사하지 못하다가 간다면 행복을 말할 팔자는 못 된다.


살아온 시간을 돌이켜보면 살아갈 날은 별로 안 남았다. 한국남자의 평균 수명대로 산다면 20년 남짓이 주어졌을 뿐이다. 죽음을 상기하지 않기에는 출생신고한 날로부터 너무 멀리 왔으며, 사망진단을 받을 날이 가까워진 것이다. 내가 받을 사망진단서에는 어떤 것들이 적힐까? 성명, 성별, 생년월일, 주소, 주민등록번호(미국이라면 소셜 시큐리티 번호)가 적힐 것이다. 지금이라도 적을 수 있는 내용이다. 사망일시와 원인, 장소만 빈칸으로 남는다. 하나 더 있다. 사망을 확인한 의사의 서명이다.


종이 한 장이면 충분하다. 평생 쌓아온 사랑과 증오, 재산과 빚, 즐거움과 괴로움, 우정과 번민을 내려놓는데, 필요한 것은 사망진단서 종이 한 장뿐이다. 그 종이 한 장만 있으면 관과 함께 불구덩이에 들어가 한 줌의 재가 되거나, (6 feet under) 땅 속에서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는 과정을 거쳐 사라질 수도 있다. 스티브 잡스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죽음은 인종, 성별, 빈부, 노소 등 모든 차별에서 인간을 해방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대한(?) 잡스가 그랬던 것처럼 죽음을 승화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그 반대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 “어차피 내일 모레 죽을 건데 뭐 하러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 대충대충 적당히 하고 넘어가자고!” 대부분 이럴 거다. 만약 그랬다면 스마트폰은 없더라도, 지금 같은 경쟁이 없는 세상에서 안락함과 평화를 더 누릴지 알 수 없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마음의 평화까지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 다르듯,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같을 수는 없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누구나 스피노자처럼 사과를 심지는 않는다. 스티브 잡스처럼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면, 사망진단을 받기 직전까지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게 훨씬 현명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연습 삼아, 오늘 내 사망진단서를 미리 작성해 보련다. 혹시 스티브 잡스처럼 세상을 바꿀 아이디어가 떠오를 지도 모르니까!


<후기>

‘시골농부’님이 올리신 글을 보고 글감을 떠올렸습니다. 원래는 ‘우리는 날마다 죽어간다’는 제목을 생각했다가 막히는 바람에 소재를 바꿨습니다. ‘반드시 죽는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사형수와 같다. 다만 집행방법과 집행일자만 모를 뿐이다’라는 내용의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우리 세대에게 알맞은 소재라고 생각했습니다.(관련글 보기)


아래 사망진단서 양식을 첨부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의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니까요, 하하하.


▼ 우리는 어디쯤에 위치할까요? 오른쪽에서 두 번째이거나, 술이나 담배를 끊고 많은 시간을 운동에 투자했다면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에 있을 겁니다. 어쨌든 왼쪽에서는 너무 멀리 온 것은 분명합니다. 사망진단서를 작성할 시간이 가까워졌습니다.


언젠가는 나 자신을 위해서 작성되어야 할 사망진단서입니다. 어떤 놈이 되었든 여기에 내 이름을 쓰고 서명할 겁니다.


 행복의 조건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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