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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칭찬과 격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다. 리더십과 인간경영의 전문가 '켄 블랜차드(Ken Blanchard)' 가 저술한 책의 제목으로 한국에서는 2천대에 꽤나 유명했던 책이다. 그 책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바다에서 가장 크고 무서운 동물인 범고래를 수면 위로 3미터나 뛰어오르게 한 것은, 조련사의 칭찬 한마디였다는 기사를 보았다. 믿거나 말거나!


칭찬과 격려에 인색한 시대를 살았다. 초·중·고 12년 동안 선생으로부터 격려나 칭찬을 받았던 기억보다는 비난과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더 많다. 몇 안 되는 것을 기억에서 찾아본다. 중학교 2학년 때 집에서 교과서 살 돈을 주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책값을 내지 못한 아이가 되었고, 담임선생님에게 불려갔다. 병환이 있었는지 혈색이 창백하고 큰 키에 비쩍 말라서 서양사람 같아 보이는 ‘박만복’ 선생님이었다. - 중학교까지에서 유일하게 기억하는 선생님 성함이다.


“그랬구나, 헌 책을 사려고. 진작 말하지 그랬어? 헌 교과서면 어떠냐? 너처럼 공부만 잘하면 되지. 알았다, 공부 열심히 하렴!” 그 말을 듣는 순간에 왜 그렇게 눈물이 터지는지 아이는 울음이 그치지 않았고, 선생님은 그런 아이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중간고사에서 점수 비중이 가장 작았던 음악시험에 유일하게 만점을 받은 적이 있었다. 시험성적을 발표하는 선생은 내 이름을 호명하여 일어나게 하고는 반 아이들에게 박수를 치게 했다. 수업시간 중에 다른 아이가 장난을 거는 바람에 걸려서 억울하게 뺨을 맞은 서운함은 순식간에 녹아버렸다.


반면에 작문시간에 망신을 주었던 통통한 중년의 여자 선생도 잊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숙제인 ‘관찰일기’를 안 한 아이들도 많은데, 숙제를 한 내게 읽으라고 시키고는 칭찬은 못할망정 ‘그것도 관찰일기라고 썼느냐!’며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었다. 그러지 않아도 물감이 빠져 까만색이 회색처럼 탈색된 채 입고다니는 교복이 부끄럽기만 했던 아이였다. 그 선생에 대해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안경 너머로 표독스럽게 보이는 작은 눈뿐이다.


기차 연착으로 지각해서 혼나고, 준비물을 안 가져와서 미술시간에 꾸중 맞고, 복도에서 놀다가 안경을 깨뜨린 것이 혼날까 두려워서 숨기고, 도시락 반찬이 군내 나는 김치뿐이어서 꺼내기가 부끄럽고, 노트와 볼펜이 떨어져서 쩔쩔 매고, 이런 저런 이유로 부모님으로부터도 혼나기 일쑤인, 그렇게 부정적인 기억들이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렇게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몇 년에 한 번 아주 간혹 있는 일이지만 엄마가 학교에 가서 담임을 만나고 돌아오면, 선생에게 들었다며 내 칭찬을 늘어놓았다.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모범생이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이유는 모르겠으나 내 기억 속에서 칭찬과 격려를 받았다는 느낌은 별로 없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조금 달라졌다. 인정을 많이 받았고 사무실에서는 중심 노릇을 했다. 매사에 자신이 붙었으며, 무슨 일이 벌어지든 주도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기억을 굳이 떠올리는 것은 변명이 하고 싶어져서다. 아이들이 품속에 있었을 때, 나는 아이들에게 칭찬과 격려에 인색했다. 속으로는 기특하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일부러 내색하지 않았고 자주 혼냈다. 물론 이유나 핑계가 없지는 않았다. 세 살 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릴 때 확실하게 버릇을 잡고 싶었다. 주변정리를 잘하고, 자기 전에는 칫솔질을 하고, TV는 가까이서 보면 안 되고, 학교에 갔다 오면 숙제부터 하고, 어른에게는 인사를 잘하고, 어디서든 예절과 예의를 지키며 까불지 않도록 버릇을 길러주고 싶었다.


그것이 얼마만큼 잘못되었는지 깨달은 것은 아이들이 내 품에서 떠난 후였다. 칭찬과 격려는 매일 하더라도 지나치지 않는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아니, 모르지는 않았을 거다. 철부지 중학생 시절부터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고린도 전서 13장’을 들어는 보았으니까.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데, 사랑하면서도 사랑이 없는 것처럼 가장했으니 세상에 그보다 바보천치 같은 짓이 또 있을까.


다음 주 7일이면 작은 놈이 만 서른 살이 된다. 아무리 후회해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때가 된 것이다. 녀석이 새 회사에 잘 다니는지 보려고 아이들 ‘페이스북’을 찾았다. 처음 보는 몇 장의 사진이 올려져있었다. 누나와 매형과 어울려 건강한 모습으로 체육관에서 운동하고, 남매가 함께 친구 결혼식에 참석한 사진이었다. 못난 애비를 둔 탓에 자라면서 칭찬과 격려는 별로 받지 못했어도, 이만큼 건강하고 밝게 커준 것에 감사할 뿐이다.


▼ 좌측부터 사위와 딸 부부, 그리고 아들과 또 다른 딸이다. 이렇듯 건강하게 살고 있으면 됐다. 남은 두 아이가 짝을 만났으면 하는 것과 손주가 생기는 것이 유일한 바램이다. 

▼ 친구 결혼식에 참석한 세 아이들. 가끔은 무척 보고싶기도 하지만, 이렇게나마 갈증을 달랜다. 계획을 세워 내년에는 한 번 다녀올 생각이다. 이 글로 서른 살이 되는 아들을 기념하고 싶다.


<후기>

솔직히 가끔 카페가 실증이 나기도 합니다. 특히, 불필요한 비난을 받을 때가 그렇습니다. 낫살이나 쳐먹고 내가 뭐하는 짓인가 하는 자괴감 때문입니다. 처음에 카페를 개설한 초기에는 회원들이 늘어나고 올라오는 게시글이나 달리는 댓글이 신기하고 즐거워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지내기도 했습니다만, 요즘은 글을 올리는 것도 무척 조심스럽고 댓글을 다는 것도 구설수에 말리는 것이 두려워 최대한 삼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도 여러분들로부터 격려와 응원을, 전화나 쪽지, 혹은 이메일을 통해서 받게 되면 글을 다시 쓰게 됩니다. 어제도 그런 하루였습니다. 미국의 동부와 중부에서 15년을 살고 오셨다는 61세 여성 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영주권자가 최대로 머물 수 있는 6개월 비행기 티켓을 끊고 오셨다는데, 막상 한국에 오니 마음이 바뀌어 돌아갈 생각이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영주권 포기 절차를 밟겠다는 그분은 한번의 댓글도 달아본 적은 없지만, 그동안 이 카페에서 많은 정보를 얻었고 이민생활이 힘들 때 큰 위로를 받았다며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특히, LA에서 에어컨을 고치러 다닌 이야기와 영어의 어려움에 대한 글이 인상적이었으며 어떤 때는 카페의 글을 읽느라 밤을 새우기도 했다는 말에 저로서는 자부심과 긍지를 새삼 느끼는 계기가 되어 더욱 글을 쓰겠다는 자극을 받습니다. 그런 연유로 낮인지 밤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장마비가 내리는 아침부터 선풍기 옆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격려와 응원을 주신 분에게 감사 드리며, 최근에 보내주신 글을 감사의 뜻으로 아래에 소개합니다. 자랑하려는 것보다는 비난보다는 격려와 응원을 주시는 분들이 훨씬 많다는 점을 공유하기 위한 것입니다.


듀크 선배님 안녕 하세요

누가 뭐라해도 선배님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알아 주세요. 저도 그중에 한사람이구요 

선배님이 카페를 개설하기전 처음 가졌던 타국땅에서 고생을 많이 하고 있는 한국으로 돌아오오고 싶어도 돌아 올수 없는 수 많은 그늘진 곳에서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민자들의 아픔을 보듬아 불수 있고 쉼터가 될수 있는 온라인상 공간을 제공한다는 취지만큼은 꼭 지켜 주셨음 감사하겠습니다. 


여기 멜본은 한겨울로 접어들고 있어서 날씨가 차갑습니다. 

아무쪼록 화이팅 하시구요 


멜본에서 OOO 올림


듀크님, 역이민 까페회원 XXX입니다. 갠적으로 듀크님의 글 넘넘 좋아하고 팬입니다. 블로그가 비공개로 하셔서 듀크님 글을 보고 싶지만 못 보고 있어요. 좀 자비를 베푸셔서 저에게도 듀크님의 문학의 세계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넘 감사하겠습니다. 너무 감사하고 화이팅 보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