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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이야기

초보 역이민자의 소일거리

(2011년 7월 6일)

 

- 앞으로 30년은 더 살아야 할 텐데 뭐하고 지낼려구?

 

- 야, 제주는 70이 넘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야. 거기는 할 일이 없어. 뭐하고 살려고 하니?

 

- 사람은 일이 있어야 살 수 있는 거 아냐? 돈이야 벌지 않는다고 해도 소일거리는 있어야지. 아무 것도 안 하고 어떻게 살려고 해.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국에 돌아와 제주에 살면서 가장 많이 듣고있는 이야기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아니, 다 맞는 이야기이어서 이 문제가 가장 심각하게 걸렸고, 아무 대책이 없다는 게 창피하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월은 흘러 6개월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고, 금년도 상반기를 끝내고 하반기로 넘어가서 7월이다.


'소일거리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걱정말고 오라'고 했던 동서의 말도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낚시같은 것은 취미에 맞지 않았고, 빌라에 사는 바람에 텃밭도 없으니 텃밭을 손보는 일도 없었다.

처음 몇 달은 급하게 결정해서 오느라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 몇 가지를 해결하느라고 보냈고, 그 이후에는 이 카페도 개설하고 인터넷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나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직업알선센터에 등록도 하고, 교차로 구인란을 보고 전화를 해보기도 하고 이력서를 보내보기도 했지만 헛수고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이도 큰 문제였지만, '괸당(먼 친척이라는 의미를 가진 제주도 사투리)사회'라는 제주도 문화에서 '알음'을 통하지 않고는 힘든 일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과 아이들이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성당에 다시 나가고 미국에서처럼 성가대에서의 활동도 다시 시작했다. 어느 사회에서나 사람들과 친분을 맺고 빨리 적응하기 위해서는 종교활동이 좋은 방법이라는 것은 이민생활에서 터득한 것이기도 했지만, 미국에서 사는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 기도라도 하고싶은 부모의 마음도 있었다.

 

아니, 셋이나 되는 자식들을 무책임하게 두고 온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지루하다는 느낌은 없다. 처음에는 마음이 불안하기도 했지만, 점차 편안하고 자유로움을 느낀다. 내일 회사에 가서 처리할 일 걱정때문에 잠을 설칠 일도 없다. 주간 보고서를 작성할 일도 없고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 모게지나 렌트비 낼 일도 없으니 금전적 압박감도 없으며, 따라서 살아 갈 걱정도 훨씬 덜하다. 철이 든 후 처음 느끼는 자유에 가끔씩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역이민 초보자로서 아직은 지루함을 느낄 시간이 없다.

카페에 올라온 글에 댓글을 달기도 하고, TV 바둑채널에서 바둑을 보는 것도 즐겁다. 이세돌이 신출귀몰하는 수읽기를 감상하다보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한국의 시사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를 보는 즐거움도 크다. 14~5년을 뛰어넘어 보는 한국의 문제점들이 내가 경험했던 미국사회와 비교되어 새로운 깨달음과 지적 만족감을 준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다큐멘터리를 보며 대리 만족감을 느낀다. 북극에서 벌어지는 일들 부터 아프리카, 남태평양의 섬들, 아프리카의 오지를 HD급 화질로 감상하며 삶의 다양함에 인간의 존엄을 배운다. 미국에 살면서 꽤 많이 돌아다녔던 나도 처음 접하는 미국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TV에서 다시 본다.


<후기>

Independence Day 인 7월 4일 낚시광인 분들을 쫓아 '섬 속의 섬'이라는 우도에 1박 2일로 다녀 왔습니다. 혹 낚시를 배워 취미를 가져볼까 하는 마음이 있었지요.

갯바위에서 파도를 맞아가며 하는 것을 보고 낚시에 대한 마음이 싹 가셨습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바위를 딛고 물가까지 가는 것도 그렇고, 잡아봐야 손바닥 보다 작은 것들 뿐이었습니다. 미국에서라면 잡았다가 걸리면 벌금을 내야하는 사이즈였습니다. 많이 잡히긴 했지만 그런 작은 물고기들을 잡으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파도까지 맞아가면서 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취미가 있는 분들은 손맛때문에 간다고는 하지만.


이곳에서도 취미생활은 다양합니다.

마라톤 동호회도 있고, 사이클 동호회, 축구, 야구, 인라인 스케이트 등 많은 활동들이 있습니다.

7~80이 넘은 현역 해녀들도 많고 밭에서 일하시는 농부들도 있으니 무언가 일은 해야겠지요.


음악학원에서 밴을 운전할 기사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오후 1시에서 6시 반까지 코흘리게 아이들을 한 두 명씩 학원으로 집으로 데려다 주는 일이었는데 한 달에 6십 만 원 준다고 하더군요. 하하하 돈이 문제가 아니라, 아직은 구속되는 게 싫어서 사양했지요.


집사람이 알아보더니, 가을부터 밀감일 하는 곳에서 같이 일하자고 합니다. 제주 밀감이 수확되고 출하되는 10월부터 내년 2월까지는 일손이 달린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살면서는 머리를 사용하는 일을 했었는데 앞으로는 손발을 쓰는 일을 해야하는가 봅니다.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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