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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이야기

한국, 믿지 마세요!

(2011년 6월 16일)

 

나무 몇 그루를 보고 숲을 판단할 수는 없다. 썩은 나무 몇 그루를 보고 숲 전체가 썩었다고 판단하는 것도 큰 잘못이지만, 역으로 보기좋은 숲을 보고 그 곳의 모든 나무가 건강하다고 믿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내가 썩거나 병든 나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곳에 병든 나무가 있는지, 햇빛이 잘 드는 곳이 어딘지 알 필요가 있다.

 

고달픈 이민생활을 끝내고 편안하고 고향 같은 고국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귀국했다가, 사기에 걸려 재산을 잃는다거나, 오랜 해외생활로 한국을 잘 모르고 타성에 젖어 실수를 하게 되면 더 큰 낭패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은 그래도 약자인 서민을 보호하는 법이 어느 정도 역할을 하는 곳이지만, 한국은 아직도 그렇지 못한 곳이다.

 

어제 방영된 PD수첩 ‘부동산 PF부실, 당신의 돈이 위험하다.’를 보면, 피해자들이 아우성치는 모습이 나온다.

 

- 이제는 은행도, 대기업도 정부도 안 믿는다. 이 나라에는 믿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방법이 무엇인가?

 

- 앞으로는 금을 사서 두고 조금씩 꺼내 써야 한다.

 

- 아이들에게 ‘아무 것도 믿지 말라’고 가르쳐야 한다.

 

보도에 따르면 PF 즉 'Project Financing' 대출이란 이런 것이다.

 

어떤 사업자가 부동산개발계획을 세운다. 어느 곳에 땅을 사서 어떻게 아파트나 상가를 짓고 분양하겠다는 프로젝트를 만든 뒤,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사업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이때 사업자에게 필요한 것은 약간의 돈과 파워포인트로 그럴 듯하게 작성된 프레젠테이션 파일뿐이다.

 

물론 이 프로젝트에는 건설회사가 동참한다. 일감이 필요한 건설회사가 참여하고, 수천억이라는 거액을 작은 규모의 사업자에게 대출하는 은행은 상대적으로 큰 회사인 건설회사의 지급보증을 요구한다. 일이 필요한 건설회사가 어렵지 않게 지급보증을 해줌으로써 사업자는 큰 돈 들이지 않고 은행대출로 땅을 산 뒤, 빌딩을 지으면서 분양을 하여 금융비용(이자와 원금)과 건설비용을 갚고, 이익을 챙기는 것이 사업의 개요다.

 

실제로 이런 사업이 부동산이 마구 오르던 IMF 직후 초기에는 15% 정도의 이익을 보았다고 한다. 엄청난 이익을 보장하는(?) 말도 되지 않는 이런 사업에 은행은 손쉬운 대출이자수입에 눈이 멀어 경쟁적으로 대출을 해주었고, 건설회사는 외형 늘리기에 좋은 사업일뿐만 아니라, 수완 좋은 사업자에게는 땅 짚고 헤엄치는 돈벌이였다.

 

정부도 한몫했다.

2008년 초 ‘경제대통령’이란 구호로 정권을 잡은 MB는,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도 경제성장률 7%라는 숫자놀음에만 집착하여 성장률에 결정적 기여를 하는 건설경기를 부양하는 정책을 펼친다. 그 결과 제2금융권인 저축은행의 ‘한 사업자 대출한도 80억’이라는 규제를 풀고, 양적팽창이라는 임시수혈을 위해 토건사업을 장려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부동산경기호황’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었다.

 

그러나 주택경기는 어찌 된 일인지 이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고, 이에 따른 부작용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가면서 다수의 선량한 민초들이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인데, 그 중심에는 저축은행과 대기업의 부도덕, 그리고 선량한 국민들 편에 서야 할 정부와 공무원의 무능과 부패가 있었던 것이다. 정부의 잘못으로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사태가 바야흐로 벌어지고 있다.

 

저를 포함해서 귀국을 생각하는 분들은 대부분 얼마만큼의 자금을 가지고 들어와 은행에 두고 이자를 받을 생각을 한다. 이때 은행에서 직원이 현재 정기예금금리는 4%인데, 대기업의 어음을 6개월 정도만 사두면 7%를 준다고 하면 대부분 귀가 솔깃해진다.

 

- LIG건설이라고 LG의 구씨일가에서 하는 그룹사입니다. 그런 큰 회사가 6개월 내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 그 회사가 지금 당장 어려워서 그런 이자를 주는 거지, 내일이라도 형편이 좋아지면 이런 기회 다시는 없습니다. 정말 어쩌다 있는 기회입니다. 고객님은 재수가 좋은 겁니다.

 

이런 유혹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분들이 있을까?

 

LIG 건설은 지난 3월 21일 법원에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다. 모그룹에서 지원을 중단하기로 결정한 그날로.

자금난으로 유동성 위기에 처하자 회사는 살아남기 위해 CP(기업어음)를 남발했고, 은행직원이나 증권회사 직원은 수수료를 위해 열심히 고객에게 팔았다. 무려 1,800억 원을. 물론 이중에는 대기업을 믿었고, 고객의 이익을 위해 판 사람도 있겠지만.

 

피해자들은 노후자금 1~2억을 맡기신 분, 사업자금이 몇 개월 여유가 생기자 맡기신 분, 가정주부, 조기 은퇴자 등 선량한 시민이 대부분이고 너무 억울하게 당하신 분들이 많았다.

 

LIG그룹은 LG그룹의 창업자인 고 구인회씨의 첫째 동생 고 구철회씨의 장남, 구자원씨가 회장으로 있으며, 그의 차남 구본엽씨가 LIG건설 부사장을 지냈었다. 국내 건설업계 40위권인 LIG건설은 옛날 건영건설을 인수하여 탄생했다.

 

한때 회사가 잘 나갈 때는 친족을 경영진에 앉히고 온갖 이익을 빼내갔지만, 경영부실로 회사가 어려워지자 가차 없이 버려버리는 대기업의 전형적인 부도덕 행태에 선량한 국민들이 큰 피해를 보는 것이다. - 한국은 경영자를 처벌하는 법이 없거나 있어도 아주 약하다. 재벌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아 선량한 국민들의 재산을 보전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한때, PF 사업은 금융회사, 건설회사의 사업전형이었다고 한다. 부동산 불패신화를 너무 믿었던 모양인데 그 밑바탕에는 정부의 역할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은행대출을 받아 땅만 사놓고, 분양이(한국에서는 땅만 있으면 모델하우스를 지어놓고 분양할 수 있음) 안 되니 건설은커녕, 땅값의 이자조차 감당치 못하게 되고, 지급보증을 선 건설회사는 부채를 대신 떠맡게 되어, 건설회사는 도산으로 대출을 한 은행은 부실로 이어지고 있다.

 

IMF 직전, 한국의 모든 대기업은 정보통신 자회사를 만드는 유행이 있었다. 과자를 만드는 해태는 해태정보통신, 소주를 만드는 진로는 진로정보통신, 맥주를 만드는 두산은 두산정보통신, 화약을 만드는 한화는 한화정보통신을 만들어 회사의 어려움을 초래하는데 일조를 하게 된다. ‘사촌이 땅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처럼, 누가 어디에서 돈 벌었다 하면 배가 아픈 한민족의 특성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다.

 

부동산 프로젝트 사업으로 돈을 번 사업자, 건설회사, 은행들이 생기자 모두 그 쪽에 뛰어들어, 지난 날 해태와 진로가 망한 것처럼 도산하는 건설회사 은행들이 생기고 있다.

 

7~8년 전, 뉴저지 모리스카운티 덴빌에 살 때, 0.1마일 정도의 거리에 6개의 네일가게가 있었다. 매니저나 종업원으로 일하던 사람들이 장사가 잘 되는 것을 보고 고객명단을 빼내 근처에 차리는 바람에 그렇게 많아졌다고 한다.

 

남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우리민족의 습성이 오늘날의 위대한 나라 한국을 만드는 순기능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가끔은 내가 한국인인 것을 초라하게 만들기도 한다.

 

<후기>

경제를 배우지 못한 것을 후회 할 때도 있습니다. 엔지니어링을 전공하여 평생 월급쟁이로 살며 정직을 모토로 버는 한도 내에서 소비하고 저축하며 곧이곧대로 살았는데, 이것이 후회가 되는 것입니다. 경제를 알았다면 부동산이나 주식이 호황이었을 때, 한 밑천 챙길 수 있지 않았나 하는 후회입니다.

 

시간이 많은 탓입니다. 직장생활 할 때는 꿈도 회사를 꾸었을 정도로 자나 깨나 회사생각만 했었습니다. 일이 많을 때는 일 때문에, 없을 때는 부하직원들 놀리지 않을 생각에 이 궁리 저 궁리 하느라고 다른 생각할 짬이 없었습니다. 짤리면 아무 것도 아닌 회사에서 그렇게 했으니 한 마디로 바보였지요.

 

이제 수입이 없어지고 시간이 많아지니, 경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기고 그 때문에 쓸데없는 생각과 걱정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모르는 게 약인데.

어떻게 하면 이자를 몇 푼 더 챙기고 은행이자보다는 좀 나은 방법이 없나 궁리를 하는 거지요.

 

그러다가 은행이나 증권회사에서 솔깃한 이야기를 듣게 되면 덜컥 미끼를 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지요.

잘못하면 좋은 감정으로 귀국하셨다가 낭패를 보는 분들도 생기겠구나 걱정이 되었습니다.

 

한국, 절대 믿으면 안 됩니다. 특히 금전과 관련해서는 그 누구도 믿지 마세요. 은행이든, 대기업이든, 정부든. 누가 더 높은 이자, 더 나은 수익률을 이야기 하면, ‘그렇게 좋은 거면 당신 가족이나 하세요.’ 하고 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집사람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낭떠러지에 비죽 나온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다. 손 만 놓으면 떨어져 죽는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그 나뭇가지는 얼마 안 되는 돈이랍니다.

 

그렇다고 나무 몇 그루를 보고 숲을 판단하시지도 마시고, 숲을 보고 나무까지 판단하시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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