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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이야기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2011년 6월 21일)

 

60년대 말이었던 것 같다.

내가 소년시절을 보낸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화전리(지금의 고양시) 마을에 가끔 가설극장이 들어왔었다. 가을 추수가 끝나 텅빈 논밭 공터에 커다란 천막이 쳐지고, 영화 포스터가 동네 담벼락에 붙었다.

 

영화는 보고싶고 돈은 없으니 부모님을 하루종일 조르다 안 되면 동네 개구장이들과 몰래 들어갈 궁리를 하기도 했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엄마 조르기에 성공해서 돈 내고 들어가 보았는지, 아니면 실패해서 몰래 텐트 한 귀퉁이를 들추고 들어가 보았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땅바닥에 펼쳐진 가마니 위에서도 세상 어느 누구 부럽지않게 행복하게 본 영화가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였다.

 

넓다랗게 펼쳐진 흰 천위에 대한뉴스가 나오기 시작하면 어린 가슴은 기대와 행복감으로 콩닥콩닥 뛰었다. 비가 오는 것처럼 세로로 혹은 가로로 스크래치가 난 스크린을 흥분 속에서 뚫어져라 쳐다보며 영화 속으로 빠져들었었다. 영화 한 편 보는 동안 두어 번은 필름이 끊어지는 바람에 상영이 중단되기도 했지만, 주인공인 '왕우'가 무수한 시련을 딛고 결국은 악당들을 칼로 베어 쓰러트리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모두 일어나 박수를 치며 뜨거운 감동을 표출시켰었다.

 

그렇게 해서 이어지는 속편 '돌아온 외팔이' 와 같은 외팔이 시리즈의 주연 왕우는 소년 시절의 영웅이 되었었다.

 

어제 자료를 찾느라고 토렌토 사이트를 뒤졌다가 1967년 작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영화 파일을 보고 어린 시절 행복했던 가설극장이 떠올라 다운받아 보았다. 내 소년시절의 영웅 외팔이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고, 만화보다도 치졸한 말도 안 되는 줄거리와 짙은 분장의 촌스런 배우들의 연기 만이 그곳에 있었다. 정의감에 도취되어 흥분과 격정으로 일어나서 박수를 치며 열광하게 만들었던 마지막 클라이막스 장면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가마니때기 위도 아닌 소파에서, 세로로 스크래치가 난 천막화면이 아닌 대형 LCD 화면이었다.

영화 외팔이를 보면서 나를 행복하게 한 것은 그 영화가 아니었다. 

외팔이 영화를 보고있는 한 남자 아이의 모습이었다.

 

꾀죄죄한 옷차림의 그 소년은 하얗게 버짐이 핀 얼굴 가득 행복에 겨운 순박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소년은 영화를 보는 동안 울분을 토하기도 하고 억울해 하기도 하고 인고의 세월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정의가 승리하는 감동에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열렬히 박수를 친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감동의 물결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아,  영화의 감동을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 영화를 못 본 동생과 동무들을 모아놓고 그 앞에서 열연을 한다.

그리고 그 아이는 며칠 동안이나 행복했다.

 

그 후로 수 십 년 동안 나는 그 소년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을 살았고, 그 소년의 모습은 완전히 지워졌었다가 이제 그 소년에 대한 기억이 50년 가까운 세월을 뛰어넘는다.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가 내 행복했던 기억을 되찾아 주었다.

 

앞으로 20년, 잘 하면 30년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남은 세월 동안, 멀어져왔던 그 소년에게 나는 얼마만큼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문득 의문이 든다.

 

평화로운 아침에 새소리를 들으며 제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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