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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사는 이야기

두 개의 대륙에서 펼쳐지는 전쟁

글자 그대로 전쟁이다. 총칼이 아니라 발로 차고 머리로 받는 싸움이지만, 그 어느 싸움보다도 치열하게 전개된다. 각 나라를 대표하는 건장한 젊은이들이 조국의 명예와 국민들의 성원에 부응하기 위해 1파운드(450그램)도 안 되는 공을 전력으로 쫓아다니며 온몸을 던지기도 하고, 하늘로 솟구치기도 하며 승부를 겨루고, 그들의 몸동작 하나하나에 구름 같이 모인 관중들이 내지르는 환희의 함성은 다른 쪽의 낙담의 한숨으로 연결된다.


유럽축구대회 ‘UEFA 2016’을 주최한 프랑스와 ‘COPA 100’이 벌어지는 미국에서 6월 한 달 동안 매일같이 ‘축구’라는 전쟁을 하고 있다. 그곳에서는 국가경제파탄으로 국민들이 극심한 고통 속에 생활하고 있는 베네수엘라도, 세계최강국이자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등에 없고 있는 미국도 동등한 조건, 공정한 규칙과 공평한 판정 속에서, 오로지 육체의 능력만을 사용하여 승부를 겨루기도 하고, 역사적으로 오랜 세월동안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어 숙적 관계인 독일과 폴란드도 자국민에게 승리의 기쁨을 안겨주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유럽에서는 24개국,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16개국, 도합 40개국이 참가해서 경합을 벌이지만 FIFA 랭킹 50위 안에 드는 국가가 대부분으로, 월드컵을 제외한다면 명실상부한 세계최고 수준의 경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COPA 100’은 남미축구협회(CONMEBOL)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북중미축구협회(CONCACAF)와 합의하여 최초로 남미 밖에서 벌어지는 특별 기념대회라고 한다. 남미 10개국에 북중미 6개국이 참가했다. - 미국에 살 때는 이런 대회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반면에 UEFA는 모두 알다시피 월드컵 경기 중간에 벌어지며 세계에서 월드컵 다음으로 큰 축구 이벤트라고 한다. 축구라고는 월드컵과 올림픽 밖에 몰랐던 내게 UEFA에 대해 알게 된 것은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인 2004년, 포르투갈에서 벌어진 UEFA 대회에서 약체 그리스가 돌풍을 일으키며 우승하면서부터다. 그 그리스가 6년 후인 2010년 남아공 월드컵대회에서 한국에서 2대0으로 패한다.


요즘 한국에서는 케이블 TV에서 COPA와 UEFA 대회를 매일 중계하고 있다. 페루(FIFA 순위 48위)와 콜롬비아(3위)의 8강전이 조금 전에 끝났다. 득점 없이 비긴 후, 페널티킥 승부에서 내가 응원하는 약자 페루가 실축으로 지고 말았다. 공교롭게 경기를 한 장소가 뉴저지의 ‘이스트 러더포드(East Rutherford)’에 있는 ‘MetLife 스타디움’이었다. 박진감 넘치는 경기도 경기지만 꽉 들어찬 관중들의 일희일비도 충분한 구경거리가 되었는지, 아나운서와 해설자는 외국끼리 벌어지는 경기에 8만 관중석을 가득 메우고 응원하는 관중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발언으로 나를 웃게 만들었다.


이스트 러더포드는 뉴욕과 아주 가까운 곳이다. 기차를 타면 뉴욕 ‘펜스테이션’까지 몇 분 걸리지 않는다. ‘멧라이프 스타디움’은 미식축구 ‘뉴욕 자이언츠’의 홈구장이기도 하다. 메트로폴리탄 부근에 사는 페루나 콜롬비아 출신 히스패닉이 얼마나 많이 사는지, 그곳에서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축구가 생활이자 신앙이나 다름없는 그 나라 출신들은, 평생에 만나기 힘든 이 축제를 즐기기 위해 만사를 제쳐놓고 찾아왔을 것이다. 요즈음 뉴저지에서는 어느 공원이라도 휴일에는 축구를 하는 히스패닉 젊은이들을 쉽게 볼 수 있을 거다.


뉴저지에 있을 때 회사의 허드렛일 때문에 히스패닉 사람들을 일당을 주고 고용한 적이 있었다. 도버(Dover)나 모리스타운(Morristown) 같은 기차역 부근에 수십 명씩 모여 있다가 차를 갖다 대면 운전석에 서로 얼굴을 디밀었다. 그런 모습은 스페인 함대에 처참하게 학살당한 마야문명의 무력한 원주민을 생각나게 했었다. 하지만 운동장에서 그들은 더 이상 무력한 원주민이 아니라 찬란한 마야문명의 전사처럼 보였다. 자신들의 조상을 정복한 백인들과 당당하게 경쟁하며 게임에 몰두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전쟁은 전쟁이되 피비린내도 뒹구는 주검도 없는 건강한 싸움이다.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단단하고 건장한 체격을 지닌 젊은이들이 조국과 명예를 위해서 끊임없이 뛰고 점프하고 태클하는 모습보다 보기 좋은 것이 또 있을까. 축구의 나라 브라질(7위)은 페루에 패한 후,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수아레즈’와 ‘카바니’의 나라 우루과이(9위) 역시 조 예선에서 탈락했다. 브라질은 왜 ‘네이마르’를 출전시키지 않았는지, 우루과이는 왜 ‘수아레즈’를 경기 내내 벤치에 앉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들을 탈락했고 그런 업셋(Upset)이 없으면 경기를 보는 재미도 없을 거다.


조별리그를 끝내고 결선 토너먼트에 돌입한 ‘COPA’와는 달리 ‘UEFA’는 조별리그가 중반을 넘어서고 있다. 평소에는 독립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웨일즈’나 ‘북아일랜드’도 당당히 독립된 팀으로 참가하고 있다. 북아일랜드가 우크라이나에게 2대0으로 이기자 응원하던 사람들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34년 만에 국제대회 승리이기 때문이다. 직경 70센티에도 못 미치는 작은 공이 북아일랜드 사람들에게 도대체 어떤 감동을 주었을까.


오늘 밤부터 시작된다는 이번 여름장마는, 두 대륙에서 벌어지는 축구전쟁으로 지루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이민자로서 미국에 살 때는 알지 못했지만, 한국에서 은퇴자로 살면서 누리는 즐거움이다.


- 2016년 6월 18일 제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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