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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사는 이야기

6촌 형님을 찾아가다

친척이라면 보통 친가와 외가로 나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4 후퇴 때 부모형제와 처자식을 북에 두고 단신 월남했던 부친이었으니 제대로 된 친가는 있을 리 없다. 전쟁 전부터 서울에 살고 계시던 선친의 이모님이 가장 가까운 일가였다. 선친의 고종사촌이 되는 분도 계시고 나와는 6촌 관계인 형님도 있었지만 워낙 나이차가 커서 거의 왕래가 없었다. 빛바랜 그분의 결혼식 흑백사진 속에서 콧수건을 가슴에 단 꼬마가 나였다.


충남 부여가 고향인 엄마 쪽은 달랐다. 막내이었던 엄마의 언니인 이모님을 비롯해서, 오라버니인 외삼촌까지 있었으니 사촌들까지 포함하면 적지 않았다. 우리 집도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외가는 더했다. 모르긴 몰라도 서울에 사는 동생(내 모친)을 믿고 부여 ‘뒷떼기’라는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했던 것 같다. 어릴 때의 아스라한 기억으로 외삼촌 네는 동부 이촌동 한강변 천막촌이었다. 홍수로 한강이 범람하면 가재도구를 싸들고 용산 한강로에 있던 우리 집으로 왔었다.


외삼촌은 부친의 이모부님이 교수로 있던 학교에 수위로 취직해서 평생을 살았다. 그런 외가와 소식이 끊어진 것은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다. 엄마는 자신이 평생 마련한 전 재산을, 당신의 자식들보다 더 끔찍하게 생각했던 친정조카에게 다 털어 넣고 그 충격으로 치매가 온 후, 더 이상 비참할 수 없는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이며 한 많은 이승을 떠났다. 개신교 목사이었던 조카가 신도시에 짓는 교회에 빚보증을 섰던 것이, IMF가 터지면서 문제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20여 년 전, 이민을 위해 재산을 정리했고 적지 않은 현금을 챙길 수 있었다. 엄마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얘야, 돈 있으면 x철이가 교회를 짓느라 어려운데 좀 꿔주면 안되겠니? 걔가 큰 교회를 짓느라 힘든가 보더라. 하나님의 권능으로 하는 일이니 틀림없을 거다. 이자는 꼬박꼬박 줄 거다.” “얼마나 필요한데?” “한 2천 5백 정도가 필요하다고 하더라.” 이자 받으려고 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엄마의 마지막 부탁일 테니 들어주자는 마음이었다. 물론 IMF 이후로 이자는커녕 원금도 한 푼 돌려받지 못했다.


“아우, 잘 있었어? 집안은 다 무고(無故)하고? 외삼촌 돌아가신 것 알고 있어?” “예? 외삼촌이 돌아가셨어요? 아무런 소식 못 들었는데요.”


작년이었다. 잊어버릴 만하면 전화를 주시는 6촌 형님이다.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형님의 할아버님과 내 외할아버님이 형제인 사이다. 1939년생으로 나이 차이도 많지만, 외가를 생각하면 가까운 외사촌보다 항상 이 형님이 먼저 떠오른다. 왜일까? 귀국한 이후에도 일부러 형님 댁을 찾아 인사를 드렸고 그 이후부터 꾸준히 먼저 전화를 하신다.


답은 추억에 있다. 내가 ‘한강국민학교’에 입학해서 저학년일 때, 형님은 군인이었다. 어린 눈에도 훤칠한 키에 군복 입은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카추샤로 근무했던 형님은 동두천 부대에서 휴가를 받아 시골집에 가려면 용산에 있는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새벽에 기차 타러 나갔고, 그럴 때마다 나는 노란색의 미제연필을 한 타스 받았다. 그 미제연필은 하루나 이틀 만에 도둑맞을 만큼 학교에 가져가면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시절이었다.


“종오 형은 얼마나 고생하며 자랐는지 아니? 보릿고개에는 먹을 게 없어서 풀뿌리를 캐먹고 나무줄기를 벗겨 먹는 그런 집에서 자랐어. 이삼십 리 길을 걸어 다니며 겨우 소학교만 나왔어. 그것도 학교에 다녀오면 나무하러 가야했어. 소학교를 나와서는 나뭇짐을 해가며 남의 책을 빌려 공부해서 검정고시로 고등학교까지 나왔어. 종오 형에게 비하면 너는 호강하며 공부하는 거야. 그러니 아무 소리 말고 공부 열심히 해야 하는 거야!”


형님이 다녀갈 때마다 엄마가 내게 해주었던 말이다. 단칸 방바닥에 엎드려 숙제 따위를 하는 내 옆에 앉아 뜨개질을 하던 모습의 엄마는 그때 무척 젊었었고 내게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한 폭의 수채화로 남아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엄마는 형님을 칭찬했고 내게 귀감을 삼으라고 채근했다. 무엇이 없거나 모자라서 공부를 못하겠다고 떼를 쓸 때마다.


“아이고, 큰일 났다! 종오가 불쌍해서 어쩐다냐? 너 명동에 있다는 성모병원이 어딘지 알지! 빨리 가자, 얼른 가봐야겠다.”


70년대 어느 날이었다. 진즉에 외출준비를 끝내고 내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던 엄마가, 대학생이던 내가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성화를 해대며 나를 앞세웠다. 형님이 일터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거다. 전기가 차단된 줄 알고 작업하다가 고압에 감전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형님은 오른팔과 왼다리를 절단한 상태로 의식이 없었으며, 대부분 낯선 얼굴들의 먼 친척들이 엄마를 붙잡고 울었고 엄마도 크게 흐느꼈다.


“야, 아우가 기억력이 참 좋구나! 그런 걸 다 기억하고 있으니. 하하하, 그때는 내가 참 멋있었지! 암, 그렇구말구. 어딜 가나 인기가 많았어.”


지난 일요일 오전에 형님 댁을 두 번째로 찾았다. 열 몇 평이나 될까. 아주 좁은 아파트였다. 배달된 자장면을 먹으며 기억을 더듬어 옛날이야기를 했더니, 형님은 기분이 좋은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형님은 답답하다는 듯 의족과 의수를 벗으며 형수님에게 말했다. “참, 얘는 술이 있어야 해. 가서 소주 두어 병 사 와.”


팔순에 가까운 형님은 건강해보였다. 이런저런 소재로 담소를 나눈 서너 시간 동안, 형님은 매우 즐거워하고 유쾌해했다. 싫다고 손사래를 치는 형님께 주머니를 뒤져, 얼마 되지는 않지만 가지고 있던 지폐를 모두 꺼내 식사나 하시라고 억지로 서랍에 넣고 나왔다. 


지하철로 향하는 길에 어떤 낯익은 장면이 엄마에 대한 추억과 함께 떠올랐다. 박완서 선생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나오는 장면이었다. 선생의 서대문구 현저동 비탈길의 어린 시절에, 선생의 모친은 누구나 하찮게 생각하는 직업인 물장수를 극진하게 대접했다. 이유가 한가지 뿐이었다. 그렇게 힘든 일을 하면서도 자식을 전문학교에 보냈기 때문이었다. 아마, 형님은 엄마에게 ‘현저동 물장수’이었는지도 몰랐다.


엄마의 모습이 떠오르자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무척 청명한 하늘이었고 미세먼지도 없는 날이었다.


<후기>

형님을 찾은 것은 잘한 일이었습니다. 서울에 갈 때마다 잊고 그냥 돌아왔던 탓에, 형님이 안부전화를 할 때마다 죄스러웠지요. 외가를 생각하면 외할머니와 함께 항상 떠오르는 형님이었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흘러간 과거의 추억까지 살 수는 없습니다. 혈연적으로 가까운 친지나 친척보다 좋은 추억과 기억을 만들어준 분들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 비정상일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그렇습니다.


어제 쓴 글, ‘절친의 절교’에 많은 분들이 댓글을 주셨습니다. 그 오랜 세월의 일들을 다 기록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짧은 글로 갈등을 다 드러낼 수는 없을 겁니다. ‘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친구나 가족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관용’이 아닐까요. 인간이란 불완전한 존재는 늘 실수와 실패를 저지르며 살아가는 피조물입니다. 친구는 제가 내민 손을 거부함으로써 절교의 뜻을 분명하게 전했지만, 저는 그저 관용을 바랄 뿐이고 제가 죽는 순간까지 마음 속의 영원한 친구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한 번 친구로 인연을 맺었으면 영원히 친구인 것이지, 어찌 해병만이 그렇겠습니까.


저로 인해 큰 부부싸움도 했을 겁니다. 물론 죄책감과 함께 미안한 마음이 크지요. 그러나 한 번 내뱉은 말은 거둬드릴 수 없습니다. 글도 그렇습니다. 썼다가 거두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위로와 위안의 조언을 주신 분들의 뜻을 겸허히 간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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