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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나은 세상을 위하여

대화의 여운(餘韻) - 둘

현충일로 이어지는 긴 주말이 시작되는 지난 토요일은 새벽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덕분에 운동을 걸렀지만 들고 있는 우산이 쑥스럽게 느껴지는 그런 비였다. 내리는 듯 마는 듯 비는 안개처럼 뿌려졌다. 아침 10시가 채 되기 전에 제주문예회관 근처의 커피숍에 마주 앉았다. 스마트폰을 뒤지며 2011년에 메일을 주고받았다고 하는데,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뉴저지 출신이라는 것이 반가웠고, 15년 정도 차이가 나는 사람과의 대화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잠깐 생각했다.


한국과 미국에서의 직장인


우선 미국에서의 직장을 접고 한국으로 온 사연이 궁금했다.


“저는 미국에 살더라도 한국 사람은 한국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한국말을 못하는 거예요. 결혼할 때까지 와이프는 한국에서 살았던 사람인데 아이들과 의사소통이 잘 안되었어요. 게다가 혼자 계시는 어머니도 그렇고, 고민 중이던 차에 한국의 대기업에서 오퍼가 왔어요. 잘 됐다 싶었습니다. 덕분에 아이들은 이제 한국말을 잘합니다. 잘 왔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부끄러움이 찾아왔다. 연년생 그만그만한 10살 전후 아이들 셋이었던 나는, 아이들이 영어보다 한국말을 더 유창하게 하는 것이 항상 불만이었다. 큰 아이는 대학에 갈 때도 토익점수를 제출했다. 그만큼 걔들은 영어를 못했다. 아이들 덕을 보려고 아들에게 나와 대화할 때는 영어로 하라고 심하게 강요한 적이 있었다. 아빠에게 어떻게 반말로 말하느냐며 엉엉 울었다. 녀석에게 영어는 반말이고 경어가 있는 한국어는 존댓말이었다. 아이 덕을 보려는 생각을 접고 말았다. 19살에 건너가서 대학을 나온 사람을 어땠을까.


“영어를 못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처음 회사에 들어갔을 때 일입니다. 회의 말미에 서로의 아이디어를 교환하는 시간이 있는데 이곳저곳에서 말들이 섞이니까 잘 안 들리기도 하고 또 내성적인 성격이라 나서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하루는 매니저가 불러서 갔더니, 영어로 말하는데 문제가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충격으로 머리가 하얗게 변하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창피하던지 화장실에 가서 소리 죽여 한참 울었습니다.”


충분히 이해되는 상황이다. 10대에 간 사람도 그런데, 마흔 살에 간 나는 어떠했던가. 금요일 오전에 하는 회의 걱정에, 수요일 저녁부터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번 주에 일어난 일을 정리해서 보고하고 다음 주 계획을 설명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발표하는 사이에 다른 부서 매니저들이 업무협조나 조율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나 요구에는 적절한 대답에 버벅거리기 일쑤였다. 미리 질문을 예상하기 위해 다른 부서의 보고서까지 숙지해야만 했다. 미국에서 내성적인 것은 자랑이 못된다. ‘Shy’하다는 것은 치명적인 결점이다.


한국에서 시작한 나와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출발한 사람이 보는 한국과 미국의 직장은 어떻게 다를까. 매우 궁금했다.


“한국은 무척 빠릅니다. 제가 볼 때, 과장해서 말하면 백배쯤 차이가 난다고 할까요. 뭐든지 빨리 처리해야 합니다. 아침에 일을 주고 저녁에 어떻게 되었는지 결과를 물어보는 일도 흔합니다. 정신없이 돌아갑니다. 제가 보는 기준으로는 세 유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계형’, ‘엔조이형’ 그리고 ‘성취형’이라고 할까요. 생계형은 말 그대로 먹고살기 위해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이고, 즐기는 스타일은 회사생활을 하면서 인생을 즐기는 것 같아요. 성취형을 ‘자아실현’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해석이다! 대화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하며 점점 빠져들었다. 나는 어땠지? 생계형임에 분명했지만, 컴퓨터 구조를 공부하고 알아가는 게 재미있었으며, 시스템을 운영하면서 발생하는 고장이나 장애들을 해결하면서 성취감도 느꼈었다. 승진하고 관리자가 되면서 이런 재미와 성취감보다는 스트레스가 훨씬 심해졌지만. 그런데 백 배는 좀 심했다, 열 배라면 몰라도.


“재밌는 것은 생계형들은 회사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동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보스들도 꺼립니다. 왜냐고요? 이런 유형은 마음속에 뾰족한 게 있습니다. 응어리가 있다고 할까요? 항상 대들고 싸우려고 합니다. 왜 내게만 이런 궂은 일을 시키느냐? 왜 나만 못살게 구느냐? 자신의 출신이나 배경 탓에 불이익을 받는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 ‘금수저’와 ‘흙수저’ 이야긴가?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가장 큰 교훈은 분수에 맞게 살라는 것이었고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지금도 스스로를 위해 비싸고 좋은 물건을 사면 마음이 불편하다. 능력 있는 부모를 둔 친구들이 부럽기는 했을지언정, 대학을 마음대로 골라 가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고 무식한 부모를 원망한 적은 없었다. 아니 그랬기에 오히려, 부모님을 측은하게 생각했고 그분들에게 잘하겠다는 마음을 유지했다. 월급을 송두리째 갖다 드리고, 식비나 출장비를 아껴 용돈으로 사용했어도 불만이 없었다.


“제가 설명을 드리죠. 한국에 와서 크게 놀란 게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 돈이 전부고 최고라는 일반화된 생각입니다. 금권만능주의죠. 또 부동산 부자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땅만 있으면 억만장자입니다. ‘생계형’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아니 몇 번을 죽었다 깨어도 그들을 흉내 낼 수가 없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불가능합니다. 그런 불가능한 현실에 그들은 좌절하고 그런 좌절이 응어리가 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한국에는 웬 놈의 재테크 방법이 그리 많은지 정말 놀랐습니다. 모였다하면 재테크 이야기를 합니다. 미국에서도 2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했고 미국인 친구나 동료들도 많지만, 그런 것이 화제가 되었던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한국에 와서 끔찍했던 것 중의 하나가,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문구나 멘트였다. 부자 되라고 해서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겠지만, 어떻게 그런 낯간지러운 문구가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되는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백화점 VIP 회원이라는 게 그렇게 자랑거리가 되는지도 우습기만 했다. 나라면 창피할 것 같은데도 말이다.


한국의 부동산은 정말 큰일이다. 세상에 오르기만 하는 것은 없다. 풍선을 불기만 하면 언젠가는 터져버릴 것이다. 무너질 바벨탑을 쌓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땅만 가지고 있으면 준재벌이나 다름없다. 한국의 어려운 경제상황은 잘못된 부동산 정책에서 온다고 본다. 부동산이 올라가니 집값과 세가 따라서 올라 월급쟁이들은 씀씀이를 줄일 수밖에 없고, 자영업자들은 물건 값을 올릴 수밖에 없어 다시 또 씀씀이를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까. 


그런데도 정부에서 하는 정책은 부동산을 떠받치기에 급급하다. 전세금 대출제도로 좋아지는 사람은 누구일까. 혜택이 돌아가는 사람은 뻔하다. 대출받은 사람은 빚쟁이가 되어 이자를 갚느라 생활비를 더 줄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근본적인 정책을 도외시하고 정부는 소비를 진작시키겠다며 이자율을 낮추는 등, 엉뚱한 방법으로 방정식을 풀려고 한다. 낮춰진 이자율은 이자에 의지해 생활하는 은퇴자의 씀씀이를 축소시키고, 높은 수익을 주겠다며 접근하는 사기꾼들에 더 크게 노출될 것이다.


미국에서 월급쟁이가 재테크 하는 방법은 세 가지뿐이라고 들었고 그렇게 실천했었다. 첫째, ‘401K’는 최대로 들어라, 둘째, 자동차는 폐차할 때까지 써라, 셋째, 월 페이먼트를 최대한 줄여라. 아주 단순하다. 미국에서는 세금을 피해갈 방법이 없다. 401K도 지금 낼 세금을 나중에 낼 뿐이다. 은퇴 후 적은 금액을 빼내는 것이 세금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납세자가 직접 내는 직접세보다 사업자가 받아 대신 내주는 간접세 위주의 세금정책으로 절세의 방법도 많고 재테크의 방법도 많다. 돈이 돈을 벌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되는 길이 열려있다.


<후기>

대충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대화내용이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전반적인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려고 했으며 읽는 재미를 위해 제 상상력을 약간 곁들여 쓰고 있습니다.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듣는 것은 항상 흥미가 있습니다.


글이 길어지면 지루하기에 여기서 멈춥니다. 제가 보는 적당한 글의 기준은 워드프로세서에서 두 페이지 정도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미 조금 넘었습니다. 혹시 나와 대화를 나눈 분에게 누가 될까봐, 어제 샘플 글을 보내서 괜찮다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