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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잡담한설(雜談閑說) - 11

트럼프 현상으로 보는 미국


일과성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던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후보로 거의 확정되었다고 뉴스에서 전한다. 전당대회에서 지명되는 절차만 남았다는 거다. 그가 등장해서 막말을 일삼던 처음에는, 별 ‘또라이’가 후보로 다 나오는구나! 라고 생각했고, 저런 인간말종이 후보가 된다면 민주당이 다시 집권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고 확신까지 했으니 미국, 아니 미국인들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지난 1월에 쓴 글(글 보기)에 나오는 카펫클리너와 구레나룻 같은 인종주의자들의 수가 생각보다 엄청 많다는 의미이며, 유색인종인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인정하기 싫다 하더라도, 백인우월주의자나 인종주의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된다.


트럼프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맨해튼 센트럴파크 부근에 건축한 트럼프 타워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것이 시작일 것이다. 그런 기사를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 명성을 배경으로 도널드가 한국에서 ‘트럼프’라는 브랜드로 700만 불을 벌었다는 사실도 최근에 알았다.(출처: 5월 22일자 취재파일) 1999년 대우건설에서 건설하는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에 ‘트럼프’라는 브랜드를 사용하는 조건으로 자그마치 700만 불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지어진 건물 이름이 ‘대우트럼프월드’이다. 대우는 망해도 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의회의 견제 탓에 그의 공약이 실현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미국의 국익을 최우선시 하는 정책으로 이익이 없으면 세계의 경찰이라는 미국의 지위도 포기하고, 이민으로 이루어진 나라에서 이민도 제한하며, 보호무역으로 수입에도 빗장을 걸어 국내에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주된 공약이다. 백 여 년 전에 대공황으로 인한 빈부의 격차가 ‘히틀러’라는 인물을 등장시킨 것처럼, 일방적인 자본주의의 횡행으로 내몰린 경제적 양극화가 ‘트럼프’라는 극단주의자가 나올 수 있는 배경은 혹시 아닐까. 트럼프 주 지지층이 백인, 남성, 저학력자로 대표한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두려운 일이다.


▼ 트럼프가 당선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제 아무도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을 농담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배우 정진 선생님을 추모합니다


직·간접적으로 알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이철승 씨를 비롯한 한 세상을 주름잡던 낯익은 정치인들부터, 재벌과 같은 돈 많은 사람들, 친척 윗분들, 친구의 부모 장인 등의 부음 소식이 들려온다. 엊그제 배우 정진 씨가 75세의 나이에 담당암으로 사망했다는 기사가 떴다.(신문기사 보기) 이분은 TV 사극에서 '한명회' 역으로 유명세를 탔지만, 나와의 인연은 40년도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에 다닐 때 전혀 본의 아니게 연극활동을 했었다.(사연 읽기) 2학년 무렵 봄 축제 공연작으로 한국 연극계의 토종 고전이었던 박조열 선생의 '토끼와 포수'로 결정하고 나도 어떤 배역이 주어졌다. 이때 연출을 맡았던 분이 정진 선생이었다.


연극에 문외한이었던 내게 연극이 어떤 것인지, 연기가 무엇인지 가르쳐 준 분인 동시에, 연극에 미치면 어떤 또라이(?)가 되는지 알려준 분이었다. 한때는 그분을 따라다니며 연극에 미쳐볼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부모님을 비롯한 내 처지를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짓이라는 것을 자각하는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연극은 너무나 시간이 많이 걸리는 사치였고, 나는 주어진 현실을 순응하는 평범한 대학생으로 돌아갔다. 그 후로 이분을 다시 만난 적은 없다.


군대를 제대하고 취업을 한 뒤, 우연히 본 TV에서 이분의 모습을 발견하고 말없이 미소를 보냈을 뿐이었다. 우연이었을까? 사극을 보고 있던 엄마가 정진 선생과 같이 출연한 어떤 탤런트를 보고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기 나오는 저 사람은 어떻게 보면 네 신랑이랑 참 닮았구나, 그렇지 않니?"

그때 정진 선생의 제자가 되어 같이 미쳐버렸으면 어떻게 됐을까? 라는 부질없는 상상과 곧 닥칠 다음 차례는 우리 세대일 거라는 생각을 하며 고인의 명복을 기원한다.


소설가 한강 씨와 화가 조영남 씨


얼마 전에는 영국에서 맨부커 상을 수상한 한강 씨가 뉴스의 중심에 섰다. 노벨 문학 상, 프랑스 콩쿠르 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 상을 수상했다며 모든 언론에서 크게 다루었다. 반면에 조영남 씨가 가수가 아닌 화가로서 그린 '화투'라는 제목의 연작이 대작이라는 스캔달 또한 각종 언론에서 입방아를 찧었다. 이 두 상반된 뉴스에서 우리 한국인 특유의 유사성이 보였다. 


먼저 소설가 한강 씨의 작품, 채식주의자다. 아직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으나, 문학에 관심이 많은 나는 작품 평이나 작가에 대한 소개를 열심히 찾아보았다. 깊이가 있는 작품이라 그런지 이해가 쉽지 않은 어려운 내용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평이고, 작가의 작품 세계 또한 그렇다고 한다. 사실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대부분의 문학 작품은 내용도 지루하고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물론 통속적인 내 자질의 문제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단테, 까뮈, 지드,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니체 같은 세계적인 분들의 책을 끝까지 읽은 적이 거의 없다. 읽었더라도 이해도 못하면서 명작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억지로 읽어서 그런지 기억에 남은 것도 별로 없다. 독서광인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한 조각이나마 겨우 이해할 수 있었던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이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고전일 뿐이다.


그런데 수상 소식 이후, 한강 씨의 작품들이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 '썰전'에 의하면 맨부커 상이 세계 3대 문학 상에 드는지조차도 매우 불투명하다고 한다. '세계적'이라는 단어를 유난히 사랑하는 한국인들이 그렇게 해석할 뿐이라는 것이다. 한강 씨의 작품만이 아니고 다른 책들도 많이 팔린다고 하니 좋은 일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쉬 뜨거워지고 쉬 식는 냄비 같은 우리 민족의 좋지 않은 특성을 보는 것만 같아 찝찝한 것도 사실이다.


조영남 화투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자신이 그리지 않은 그림 앞에 서서 자신의 작품인 듯 위장하는 그의 마음이 행복했을지 의문이 든다.


이런 느낌은 조영남 씨의 대작 작품에서 보다 뚜렷해진다. 그의 화투 시리즈 연작은 4~5 점에 1억 원에 팔렸다고 전해진다. 조영남 씨는 대작화가에게 수고료로 10만원 정도를 지불했다고 하니, 2~300배 장사를 한 셈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예술성을 보고 그의 작품을 구입한 것이 아니라, 그의 명성을 보고 구매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자신이 좋아서 구입한 것이 아니라, 남들이 훌륭하다고 인정하니까 사는 것이다. 이것을 다시 바꿔 말하면, 내가 좋아서 무얼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의식해서 입고, 쓰고, 보고, 먹고, 마시며 남의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아무리 돈이 많고 호화롭게 살더라도, 자신은 없고 타인만 존재하는 인생이 행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조금은 이해가 되는 듯 싶다. 왜 그렇게 명품 핸드백에 집착하는지, 브랜드라는 헛된 가치에 비싼 대가를 지불하는지, 서울을 떠나지 못하는지, 흙수저라는 말이 왜 나오는지, 성형수술이 왜 그토록 일상화 되었는지, 스펙 쌓기가 중요한지, 제주의 부동산이 왜 뛰는지, 왜 결혼하지 못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지, '어떻게 그런 차를 갖고 다니세요?' 라고 물을 수 있는지를. 


모든 것은 남의 인생을 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2016년 6월 5일 아침에 제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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