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절친의 절교선언

참 많이 아팠다. 정말이지 요 며칠 동안 마음과 함께 심한 가슴앓이를 하며 지냈다. ‘개ㅅ끼 같으니라고, 씨x놈’ 같은 심한 욕설을 나도 모르게 순간순간 읊조리기도 했고, 그래도 지난 40년 넘게 가까운 친구로 지내며 고마웠다는 자조적인 고소(苦笑)가 지어지기도 했다. 


대학에서 처음 만난 이후 정말 좋은 친구로 지냈다. 우리가 다녔던 대학은 육성회비만 내고 수업료가 면제되던 국립대학으로 전교생이 장학금을 받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력이 없어 S대는 가지 못하고, 돈이 없어 K, Y대는 갈 수 없던 아이들이 많았다. 비슷비슷한 처지의 동창생들이었다.


친구가 2학년을 마치고 입대할 때까지 항상 붙어 다녔고, 학생들을 가르쳐 몇푼이라도 생기면 밤새 술을 마시며 개똥(?)철학을 논했었다. 통행금지에 걸리면 못 다한 이야기를 위해 소주병과 오징어를 사들고 여인숙을 찾았었다. 시험을 못 보았을 때는 같이 낙제를 걱정하며 학점이 짠 교수에게 애걸하러 집으로 찾아가기도 했었다. 군대에 가 있을 때는 수시로 면회를 갔었으니 내게는 가족만큼 소중한 사람이었다.


사회에 나와서도 변한 것은 없었다. 데이트 상대가 생기면 서로 소개하기 바빴고, 결혼할 때는 마치 자신이 결혼하는 것처럼 기뻐했다. 친구가 먼저 가정을 꾸렸고 내가 뒤를 따랐다. 친구의 처갓집에도 수시로 갔다. 서로의 집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었다. 아이들도 비슷비슷하게 태어나서 주말이나 여름휴가도 자주 어울렸다.


차이도 분명했다. 친구는 늘 논리가 분명하고 두뇌회전이 무척 빨라서, 아둔한 내게 멘토 역할을 했다. 친구의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충고를 소중하게 여겼다. 이재(理財)에도 밝아 맨몸으로 출발했던 친구들 중에서 가장 빨리 집도 장만했다. 친구는 누나와 형이 있는 막내였고, 나는 실질적인 장남이었다. 그는 부모형제에게도 잘했고, 처갓집 식구들이나 친구들에게도 잘 처신했다. 마음으로 항상 의지가 되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했으며 또 자랑하고픈 그런 친구였다.


- 이 자식아, 내가 왜 너하고 악수를 하냐?


40년이 넘는 추억을 다 읊으려면 몇 날 며칠 밤을 지새우더라도 부족할 친구는 이렇게 말하며 얼음장처럼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 토요일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던 길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출구로 걸어가던 중에 우연히 앞서가는 친구 부부를 만났다. 함께 결혼식에 가던 길이었으리라. 나도 일행이 있었다. 지하철 안에서 또 다른 친구 부부를 만나 같이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내민 손이 머쓱했을 뿐 아니라, 얼굴이 화끈거리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친구 와이프들이 보고 있어서 쪽팔리기도 한 나는 앞서 걸으며 ‘개x끼’라는 욕설이 저절로 튀어 나왔다. 친구와 껄끄러워지기 시작한 건 꽤 오래 되었으나, 그냥 친구도 아니고 죽마고우 사이니까 살다보면 풀어질 거라고 믿었다.


살다보면 쓸데없는 말을 해서 구설수에 오르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생긴다. 젊었을 때는 그런 일이 별로 기억나지 않는데, 나이가 들면서 어떤 자리에서 한 말에 대해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생활을 접어 위축된 마음 탓일까. 무심코 던지는 상대의 말에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옹졸한 마음은 쉽게 노여워지기도 한다.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원인이 되었던 실수는 나로부터 비롯되었다.


10년쯤 전이었다.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니 반가운 친구로부터 온 이메일이 보였다. 그러나 메일을 열어본 순간 가슴이 철컹 내려앉았다. 비난 일색이었다. ‘너, 우리 집에 왔을 때 내 딸에게 뭐라 그랬어?’, ‘뭐 이 새끼야, 내가 뭐 어쨌다고 나에 대한 비난을 용X이에게 했어?’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벌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렸다.


- 농담을 한 것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잘못했다. 미안하다. 네 와이프가 화가 많이 났겠구나. 대신 잘못했다고 전해줘라. 미안하다. 그리고 그날 네가 한 일을 이해하지 못해 화가 많이 났었거든. 그래서 내가 잠시 돌았었나 보다. 정말 미안하다.


이런 내용의 답장을 쳐서 즉시 보냈으나 마음은 안절부절못해서 며칠 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또 메일을 보낼 때 사건에 관련이 있는 다른 친구 몇에게 ‘BCC – Blind carbon copy’로 보내서 내 편이 되어줄 것을 간접적으로 부탁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답장은 없었다. 용서가 된 것으로 생각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졌다. 2008년 모친상을 당했을 때 친구는 와이프를 동반하고 문상을 왔고, 친구는 화장터까지 함께 하며 절친으로서 역할을 다했다. 


한국에 올 때마다 만사를 제쳐놓고 가장 먼저 친구를 찾았었다. 술 먹고 밤늦게 방문하면 친구 와이프는 아이들 방으로 가고 안방을 내주었다. 어떤 험한 말을 해도 친구니까 허용된다고 믿었지, 그게 문제가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부턴지는 모르지만 친구를 만나고 나면 마음이 언짢아지는 걸 느꼈다.


“야, 새꺄. 너는 그 더러운 성질이 문제야. 성격도 급하고 화도 잘 내잖아, 이 자식아!” “현대를 사는 사람들 치고 정신병자 아닌 사람 있냐?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정도가 문제일 뿐인데, 너는 중증이야, 임마! 중증 중에서도 중증이란 말야.”


내가 친구에게 듣고 싶었던 말은 ‘위로’였다. 세상에서 가장 나와 내 처지를 잘 이해하는 친구에게, ‘그래, 수고했다. 그동안 낯선 땅에서 고생 많았다. 이해한다.’ 이 한 마디가 듣고 싶어서 하소연도 하고 구걸도 해보았지만, 친구는 내 힘들었던 개인사에 대해 위로 대신 비난만 했다. 비참함을 느낄수록 조금씩 친구와 그렇게 멀어져갔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아마 이민이 원인이었을 거다. 사소한 일이라도 벌어지면 수시로 만났던 사이가 몇 년에 한 번씩 만나는 사이로 바뀌었으니 작은 오해나 잘못도 확대 재생산되지 않았을까. 그러다가 그러지 않아도 옹졸한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결정적 사건이 생겼다.


5년 전 늦가을 친구의 아들이 결혼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축하해주려고 서울에 갔다. 모처럼 많은 친구들을 만나 기분이 좋아진 탓인지는 몰라도 – 기억에 나지는 않지만 – 또 말실수를 했던 것 같다. 피로연 자리에서 갑자기 분위기가 썰렁해졌으니까. 그리고 3년 전에 내 아이가 결혼했다. 미국에서 하는 것이니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지만, 애비로서 친구에게만은 연락해서 축하받고 싶었다. 결국 미국으로 떠나기 전날에 연락을 취했고 친구는 내가 있는 곳으로 저녁 무렵에 찾아왔다. 소주를 마시며 또 비난을 들어야했다. 연락한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전철역에서 헤어져 돌아오는 내 손에는 양말이 가득한 쇼핑백이 들려있었고, 내 마음에는 비참함으로 가득했다. 정말 삭스(Socks – ‘형편없다’는 영어표현) 같았다. 양말 관련 일을 하는 친구가 양말은 얼마든지 줄 수 있다며 준 것이었다.


- 씨x, 이걸 부조금 대신 준 거야. 도대체 무슨 큰 잘못을 했다고 내게 이토록 모멸감을 주는 거야. ㅈ같은 새끼, 내가 앞으로 먼저 연락하면 사람새끼가 아니다.


2년 전이었다. 대학동기들 카톡방에 친구의 장인상 부고가 떴다. 나는 친구에게 직접 연락이 오길 기다렸다. 아무런 연락이 없다는 핑계로 모른 척 흘려버렸다. 내 옹졸함에 대해 죄책감이 없진 않았다. 몇 번이나 만난 적이 있는 분이었다. 그러다 작년이었다. 동남아 여행 중에 찍은 사진 몇 장을 같은 카톡방에 올렸다. 친구가 카톡방을 나가며 메시지를 남겼다. ‘듀크와 같이 있기 싫어서 나간다.’


그리고 지난 토요일 친구는 내가 내민 손을 야멸차게 거부했다. 참 많이 아팠다.


- 친구야,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을 하지 못했구나. 수 십 년이나 내 친구로 있어줘서 너무 고마웠고 많이 행복했다.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하자.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는 말아라. 내가 네 몫까지 아파할 테니까. 그동안 소원(疏遠)하는 바람에 네가 할아버지가 된 것도 축하해주지 못했구나. 이제나마 손주 본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언젠가 자네 마음이 풀어져서 내게 기회를 준다면, 내 옹졸하고 쪼잔한 소갈머리에 대해 사죄하고 싶다. 그리고 카톡방은 네가 있을 곳이다. 나는 나가서 다시 들어가지 않을 거다. 항상 건강하고 행복해라.


<후기>

이토록 치졸한 일을 이야기로 풀어낸 것도 아마 이기심의 발로일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라도 털어놓고 나면 다소나마 위안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인생사에 어떻게 훌륭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만 있겠습니까? 추하고 비루한 일들도 수시로 일어납니다. 헤르만 헷세가 일찍이 간파한 것처럼 위(僞)·악(惡)·추(醜)가 없으면 진·선·미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믿음에서 친구와 얽힌 형편없는 이야기를 풀어보았습니다. 사실 사람이 어우러져 사는 세상에서는 이런 일들이 더 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쓸데없는 가정이지만 제가 이민을 가지 않았다면 이 친구와도 여전히 절친한 사이로 유지되었을 겁니다. 이민이 참 많은 것을 앗아갔습니다.


“x희야, 너 정말 예뻐졌구나! 룸살롱에 온 것처럼 눈앞이 환하다!”

실수로 한 말이었습니다. 이민을 떠난 후 5년인가 만에 처음 한국을 방문해서 같이 술에 취해 친구네 집에 갔는데, 중학생이었던 아이가 현관에 나와 인사하는 것을 보고 예쁘다는 표현을 이렇게 해버린 것이지요. 내 아들과 동갑인 아이였습니다.


총각시절 선을 보거나 소개로 만난 여자들은 대부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예쁜 여자들은 온통 술집에서 보았던 경험 탓에, 예쁜 여자를 찾는 총각들을 보면 술집에 가서 찾으라는 농담을 하곤 했었습니다. 이게 버릇이 되었는지, 예뻐졌다는 표현을 한다는 게 ‘금지옥엽’ 딸을 룸살롱 아가씨에 비유했으니 아이 엄마는 충격이 컸을 겁니다. 또 당시에는 룸살롱에서의 ‘성 거래’가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었으니까, 그런 말을 한 것에 대해 비난을 받아도 반박할 말이 없었습니다.


지금 당장은 많이 아프지만, 이 아픔도 시간이 치료해준다는 것을 경험으로 압니다. 다른 상처들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엷어지다가 사라지겠지요. 이민으로 많은 친구들을 잃었지만 또 다른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작년 동남아 여행을 동행해준 아톰님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바로 다음날 일요일에는 망고님을 비롯해서 여러분들을 만나 시간가는 줄 모르고 담소를 나누었으니까요. 살아가면서 잃는 것만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비천하고 사소한 개인 잡사(雜事)를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잡담한설(雜談閑說) - 11  (0) 2016.06.12
단점은 뭐죠?  (0) 2016.06.02
이민자가 보는 자녀들의 결혼  (0) 2016.05.26
잡담한설(雜談閑說) - 10  (0) 2016.05.18
잡담한설(雜談閑說) - 9  (4) 2016.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