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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잡담한설(雜談閑說) - 8

글쓰기를 멈추는 일도 쉽지가 않다. 항상 글감을 염두에 두고 살았던 지난 5년의 세월이 습관이 된 모양이다. 습관을 바꾼다는 게 만만치 않은 것이다. 오늘은 주룩주룩 내리는 비가 글감을 떠오르게 한다. 소위 '고사리 장마'라고 부르는 비다. 제주에서는 해마다 4월 말 무렵에 사나흘 청승맞게 비가 내린다. 이 비에 제주의 특산품인 고사리가 하루에 한 뼘씩 자란다고 한다. 엊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이 비는 내일 오후에나 그칠 거라는 일기예보다.


컴퓨터


미국에서부터 사용하다 가져온 컴퓨터 모니터가 말썽을 부리기 시작하더니 증세가 심해지는 바람에 바꾸게 되었다. 모니터를 켜면, 화면이 떨며 움직이는 증세는 처음에 겨울에만 나타났는데 5분쯤 지나면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마도 낮은 온도 때문에 콘덴서와 같은 부품의 특성이 나빠져서 그러려니 생각하며 작년 겨울과 금년 겨울에는 불편한대로 그냥 사용했지만,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에 증상이 더 악화되어 모니터의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켜기를 여러 번 반복해야 겨우 화면이 들어왔다.


10여 년 전에는 비교적 큰 사이즈로 취급받던 24인치의 LCD모니터를 살 즈음에는 내가 한국으로 돌아오리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Dell에서 세일 가격으로도 오백 불이었던 모니터를 살 때, 중국계 부하직원이 말렸던 것이 기억났다. 


- Duke, too expensive. Don’t buy it. The price will be much cheaper in next year.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검소한 내게 컴퓨터는 사치를 부리고 싶은 유일한 품목이었다.

나는 그에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었다.


- I know very well. Do you know when is the best time to buy an electronic appliance? It should be the day before when you die.


모니터를 분해해서 고쳐볼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나, 확신도 없을뿐더러 보이지 않는 눈으로 벌레 같은 작은 부품들을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아 포기하고 말았다. 몇 시간에 걸친 인터넷 검색 끝에 27인치 곡면을 가진 모니터를 선택했다. 택배비 포함 23만원이 약간 넘었다. 설치를 끝내고 나니 눈앞이 갑자기 시원해졌다. 인터넷을 하면서 안경을 바꿔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글씨가 크게 보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상위 모델에 비해 화질 차이가 없어, 십만 원 정도 싼 것을 샀더니 HDMI 연결포트가 하나 밖에 없었다. 컴퓨터에 TV를 함께 연결해서 쓰는 탓에 포트를 선택할 수 있어야 했다. 미국에서 올 때 사왔던 케이스가 요즘 비디오 카드에 맞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또 다시 인터넷으로 몇 시간 검색해서 주문한 케이스가 엊저녁 도착했다. 백수에게 오늘 온종일 할 일이 생겼다.


▼ 커진 화면 때문에 글쓰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고모로부터의 전화


내게 세 분의 고모가 있다. 선친과는 이종사촌관계인 고모지만 어릴 때는 방학 때마다, 유일한 아버지 쪽 친척이었던 그 집에서 살다시피 했기에 가깝게 지냈다. 막내는 비슷한 나이로 친구나 다름없는 사이지만, 그 위는 또 다르다. 특히 둘째 고모는 어릴 때의 내 이상이었다. 열세 살의 꼬맹이 재수생 시절, 그 고모는 고등학생이었다. 순백색 칼라에 까만 교복의 고모가 어린 내 손을 잡고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갔던 기억은 지금까지 고이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화다. 대여섯 살이 많은 고모는 어린 내게조차 그만큼 아름답고 지적(知的)이었다.


- 아유, 정말 오랜만이네, 고모. 건강해? 지난 번 x복이 딸 결혼식에서 만날 줄 알았는데!

- 그래, 야! 정말 오랜만이다. 그때는 내가 이식수술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못 갔어. 네가 제주에 산다는 이야기 들었어. 언제 한 번 제주에 가면 너희 집에 갈게. 다음 달에 딸이 결혼해. 이럴 때만 연락해서 미안한데, 시간되면 와라. 난, 마음대로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전보다는 많이 건강해졌어. 나도 이제 정년 했잖아.


이식? 무슨 장기를 이식했을까? ○○여대 식품영양학 교수였다. 그랬구나, 내가 환갑이 지났으니 고모는 65세가 이미 넘은 것이다. 못 본지가 25년도 훨씬 넘었다. 오래 전에 안식년을 맞아 시카고의 어느 대학에 교환교수로 갔다가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 생사를 넘나들었다는 사건이 떠올랐다. 바쁘다는 핑계로 그때 가보지 못했던 것이 오랫동안 죄책감으로 남았었다. 그 죄책감이 만나지 못하게 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고모의 이름을 구글링 해보았다. 많은 논문이 검색되었다. 공부밖에 몰랐던 사람이었다. 그랬는데도 나처럼 운이 따르지 않았는지 원하는 대학에 떨어졌고, 불합격의 소식에 눈이 벌게지도록 울었던 고모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쫓아다니던 남자와 결국 결혼한다고 했을 때는 내가 왜 안타깝고 억울했었을까.


내 기억 속의 고모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희디 흰 칼라 위에 양 갈래로 딴 머리를 곱게 묶은 아리따운 여고생이다. 고모의 옛 모습을 다시 만나러 다음 달에 서울에 가야할까 보다.


다르다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역이민 카페를 하면서 많은 분들을 만났다. 그런 분들 중에는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난 분도 있고, 지금까지 만남의 끈을 놓지 않고 이어가는 분도 있다. 인연을 이어가든 말든 공통점이 있다. 모든 분들은 나와 분명 다르다는 것이다. 다른 성장배경을 가졌고, 성격도 크게 다르며, 가치관과 살아가는 방법도 차이가 적지 않다.


그런데 만남을 이어가는 분들도 바로 그 다름 때문이요,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도 그 차이 때문이다. 다름을 존중하고 다르기에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고, 그 다름을 틀렸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기 때문이다.


가장 가깝게 지내는 분들로 ‘도치형님’과 ‘제주아톰’님을 들 수가 있다. 달라도 그렇게 다를 수가 없다. 그러나 다르기에 그분들로부터 배울 점이 참 많다. 나와 다른 배경을 가졌기에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을 들을 수 있으며 다른 세계를 배우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이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도치형님은 한국전쟁 때 부모님이 4명의 자식들을 모두 데리고 월남했으며, 아톰님의 부모님은 월남한 뒤 가정을 이루었던 반면, 내 부모님은 전쟁으로 한쪽을 잃고 재혼한 분들이었다. 달라도 그렇게 다를 수가 없다.


그러나 다르다는 것은 그만큼 배울 점이 많다는 뜻이지, 틀리다며 서로 배척할 사유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며 배척하는 이들을 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글에서 꼬투리를 찾아내어 비난하며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나이가 든 지성인이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당부를 해도 '쇠귀에 경읽기'다. 하는 수 없다.


- 2016년 4월 27일 비오는 아침, 제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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