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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왜냐고 묻지 않는 삶

- 굳이 말해 지금으로부터 5년 전, 내가 우연히 어떤 방송을 접하지 않았다면 오늘 사람을 ‘수리하는’ 이 대한민국의 ‘공장’ 7층에 와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날 그 라디오를 듣지 않았다면, 선(禪)을 이야기하는 그 신부님 말씀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면, 빅토린은 지금 이 순간 귀에 손을 갖다 대고 있지 않을 것이고, 우리 가족은 ‘왜냐고 묻지 않는 자들’ 속에 감히 끼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가끔 무디어진 정신과 위축되는 마음을 번쩍 깨어나게 하는 책을 읽을 때가 있다. 지난 며칠 동안 손에서 놓지 못한 책이 그랬다. ‘알렉상드르 졸리앙(Alexandre Jollien, 법명: 慧泉, 혜천)’은 프랑스와 유럽에서 저명한 철학자이자, 인간승리의 아이콘으로 통하는 밀리언셀러 작가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그가 2013년부터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이유가 특별하다. 프랑스에서 우연히 들었던 ‘라디오 프랑스(Radio France)’가 원인이 되었다.


▶ 로만칼라 대신 개량한복을 입은 신부님의 모습이 꽤 어울린다.(인터넷에서 가져왔다.신문기사 보기)


라디오에서 서강대 종교학과에서 한국불교를 가르치는 교수이자 예수회 소속 신부인 서명원신부의 인터뷰를 들었고, 혜천을 곧 서명원 신부가 제자가 되기로 자청한다. 1954년 프랑스 태생으로 본명이 베르나르 세네칼(법명: 천달, 天達)인 신부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성장했으며,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6년을 공부했으나 치료만 할 뿐, 생로병사의 원인을 밝히지 못하는 의학에 회의를 느껴 신부가 되었고, 1985년 수사로 찾은 한국에서 한국불교와 성철스님에게 매료되어 한국불교에 대해 석·박사 논문을 쓴 독특한 이력을 가진 분이다.


◀ 인터넷에서 가져온 졸리앙의 모습. 뇌성마비 장애로 말과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혜천의 이력 또한 이에 못지않다. 1975년 스위스의 트럭운전사 아버지와 가정부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그는 탯줄이 목에 감기는 바람에, 뇌에 산소가 부족해져 뇌성마비 장애인이 되었다. 


세살부터 스무 살까지 요양원에서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지낸 그는 존재와 인식에 대한 강렬한 갈증으로 철학과 고대희랍어를 공부하고, 1999년부터 저술을 시작하여 각종 문학상을 받았으며, 2012년 출판한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가 밀리언셀러가 되면서 유럽에서 일약 ‘인간승리의 아이콘’이 되었다.


단지 영적인 아버지이자 스승인 서명원 신부의 지근거리에 있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딘지도 모를 나라에 가기 싫다며 우는 세 아이들과 부인을 데리고 3년째 마포의 한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는 혜천이, 그동안 크고 복잡한 도시 서울에 살면서 소소한 일상에서 얻은 깨달음을 담담하게 엮어낸 이야기가 ‘왜냐고 묻지 않는 삶’이라는 제목의 책이 되었다. 첫 딸 ‘빅토린’-혜진, 아들 ‘오귀스탱’-혜민, 막내딸 ‘셀레스트’-혜선, 그리고 부인 ‘코린’-혜원과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나라 한국에서 그것도 장애인으로 살면서 그가 얻는 ‘깨달음’은 과연 어떤 것일까? 딸이 빗을 갖고 놀다가 귀를 찌르는 바람에 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게 되었다는, 책의 290 페이지, 에필로그에 있는 내용을 글의 첫 부분에 인용하였다.


▼ 인터넷에서 가져온 졸리앙 가족 사진. 서명원 신부님과 지인이 함께 했다. (작가 인터뷰 보기)



2년쯤 전에 ‘단순한 삶’이라는 제목의 글을 두 편 쓴 적이 있다. 단순한 삶이란 지나간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다가올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 즉 생각하지 않는 삶일 것이라는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다.(단순한 삶1, 단순한 삶2 읽기) 졸리앙의 책을 읽는 동안 그 글이 생각났으며, 단순한 삶의 실체가 보다 구체화되는 느낌을 가졌다. 


그가 말하는 ‘왜냐고 묻지 않는 삶’은 바로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단순한 삶’과 크게 다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가 서울에서 깨달은 ‘왜냐고 묻지 않는 삶’이 무엇인지 책에서 인용해본다.


- 왜냐고 묻지 않는 삶이라고 모든 생각을 저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다. 계획의 노예가 되지 말고, 목표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다가올 시간에 사로잡히지 말고, 현재에 조금 더 충실하라는 뜻이다. (P45)


- 몸뚱어리를 에워싸다시피 해온 의료진 없이도 한국 땅에서 비교적 잘 지내고 있다. 나를 치유해주는 것은 의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는 거다. 치유되려는 생각으로부터 조금씩 조금씩 치유되고 있다. (P44)


- 나를 물고 늘어지던 사납고 무시무시한 적들의 정체는 나 자신의 권태와 불안, 결핍, 불만족 등등일 터다. 지혜가 많아지면 걱정도 많고, 지식이 늘면 근심도 는다. 탐욕에 찌들어 기진맥진한 에고가 탈이다. 문제는 내가 위로와 안전, 즐거움을 함께 가져가려 한다는 점이다. (P47)


- 자신의 불행을 빌미로 세상을 탓하지 않은 것만 해도 얼마나 큰 발전인가! 위로받고자 하는 만족 불가능한 욕망을 버리는 것.(P43)


- 임제 선사의 말씀이다. “부처의 법에는 애씀이 없다. 일체가 범상(凡常)에 거함이오, 용무(用務) 일절 없음이다. 똥 싸고, 오줌 싸고, 옷 입고, 먹음이다.”


- 왜냐고 묻지 않는 삶,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우선 어떤 어려움에 직면할 때, 너무 많은 질문을 하지 않는 것, ‘내가 잘했어야 했는데’라든지, ‘아, 그때 이랬었다면!’ 따위의 말을 하지 않는 것. (P51)


- 우리는 결정권자가 아니다. 삶의 행로에 선 우리의 탐욕과 자만심이 행복을 방해한다. (P35)


철학자의 글이라 그런가. 단어나 문장이 어려운 것은 아니나,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쉽게 다가오지 않아서 여러 번 곱씹어야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고, 이해된 의미는 내 지난 잘못을 처절하게 응징하며 가슴을 할퀴었다. 아, 장애인으로 태어난 졸리앙에게는 장애가 보이지 않았고, 장애 없이 세상에 나온 난 장애인이었다. 단순한 삶에 대한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은, 나이를 먹을 대로 먹고 고달픈 이민생활에서 돌아온 후였지만, 졸리앙은 이제 겨우 마흔의 나이에 동양의 낯선 곳에 살면서 스스로의 사고로 깨친 것이었다.


그는 말한다. 욕심을 좇아 살수록 스트레스가 늘어가는 것은 ‘인간사회 불변의 법칙’이라고. 삶이 있는 그대로이게 내버려 두라고 한다. 판단하지 말고, 왜냐고 묻지 않으며, 아쉬워하지 말라고. 그냥 그대로 두라고.


순간 무엇을 잘못했는지 눈앞이 번쩍였다. 평생 왜냐고 묻고 살았다. 엔지니어로서 이유를 캐묻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것은 직업에 국한할 일이었다. 인생에서는, 가정에서는, 자식에게는 그래선 안 되었던 것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 자체를 따지지 말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했어야 했다. 고치려거나 내 마음대로 바꾸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졸리앙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여태껏 놀라 호들갑 떨고, 외부에 투사하고, 남과 비교하면서 스트레스 받는 법만 배우고 익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배운 것을 잊고, 습관을 버리고, 입은 옷을 던지는 것, 그것이 앞으로 도전할 과제라는 것이다.


졸리앙에 의하면, 내적위안만이 존재할 뿐, 외부로부터의 위안은 힘들다고 한다. 행복이란 무얼 더 얹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상태를 잘라내고 덜어내서 단순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저절로 이뤄지는 경지는 아니다. 고행하고 수련을 통해 변화를 꾀함으로써 세상의 불완전함과 화해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어찌 쉬울쏘냐.


<후기>

대학에서 불교를 가르치는 카톨릭 신부님도 특별하지만, 그 신부님과 인연을 맺고 인생과 신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자 한국에서 살고 있는 졸리앙은 특이함을 넘어 신기하고, 신과 인생의 참 의미와 깨침만을 위해 낯선 땅에서의 삶을 선택한 그 용기에 탄복할 따름입니다. 침대 머리맡에 두고 잠들기 전에 읽기에 참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에서 읽은, 프랑스의 시인이자 사상가인 '샤를 페기'의 글을 마지막으로 인용합니다.

“친구여, 간단한 문제다. 너희에게 괴로움으로 남은 그 모든 죄들, 그것은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을 때 저지르지 말았어야 한 죄들이다. 지금은 이미 끝났다. 그러니 어서 자라! 내일 되풀이하지 않으면 된다. 신은 말한다. 밤마다 잠자리에 들면서 다음 날 무얼 할까 계획 세우는 자를 나는 사랑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