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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부동산이 답이다

1.

“아버지가 아주 현명하신 분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후손들이 씨족사회를 이루어 적당히 부쳐 먹고 살았잖아요. 무슨 유서가 있던 것도 아니고, 땅 문서를 작성해 후손들에게 나눠준 것도 아니고. 그런데 마을 이장이었던 아버지는 생전에 조상의 땅을 자신의 자식과 조카들에게 합당하게 이유를 설명하고 땅문서를 공평하게 나눠주었던 겁니다. 아버님의 이유 있는 판단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했어요. 덕분에 우리 8남매와 일가들은 전부 수십 억 부자가 되었어요. 물론 전답을 팔지 않은 사람들만 그렇게 됐지만.


고향이 ‘과학도시’로 지정되면서 개발이 된 겁니다. 둘째 누님은 제사 때마다 아버지를 원망했었어요. 아버지는 왜 나만 시골로 시집보내서 ‘개’ 고생을 하게 했냐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8남매 중에서 제일 부자가 되었습니다. 200억대 재산가가 되었으니까, 하하하. 흔히 농 삼아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운십기제로(運十技 Zero)’입니다. 60년을 넘게 살면서 주위 사람들을 보거나, 제 인생을 되돌아봐도 그렇습니다. 장형은 운이 없었던 겁니다.”


1954년생인 Y선생은 ‘지리산둘레길’에서 걷다가 만난 분이다. 3일 동안 숙식을 같이 하고 같이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길에서 만난 사람이라 부담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처음 만나 서먹한 관계와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을까? 중년 아줌마들이 수다를 하며 남편을 흉보듯, Y선생은 돈을 쓰지 않는 자신의 부인을 흉보며 시작한 수다가 서로의 인생 이야기로까지 발전했고, 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장황하게 이렇게 말했다.


2.

“돈 많이 버셨겠어요?”

“하하하,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그런 소리를 합니다. 딱 두 배 올랐습니다.”

P선생은 우리 카페 회원이다. 아이들을 다 키우고 역이민을 몇 년 전부터 준비해왔다. 그 준비의 일환으로 인터넷을 통해 제주의 땅을 물색했고, 구글맵으로 결정하고는 재작년 말에 제주에 와서 600평 크기의 땅을 구입했다.


바람이 몹시 부는 추운 겨울 날,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잔금을 치루기 위해 와서 점심을 같이 했다. 평당 80으로 4억 8천을 주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문외한인 나는 그분이 실수한 거나 아닌지 솔직히 걱정이 앞섰다. 땅을 판 사람은 제주시 공무원으로 3~4년 전에 반값에 구입했다가, 두 배를 남기고 판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제주의 사정을 모르고 바가지 쓴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괜한 노파심이었다. 작년 한 해 동안 제주의 땅값은 엄청 올랐다.


KBS나 MBC 같은 TV나 신문에서 제주가 마치 천국 같은 곳이라는 식의 방송과 기사를 쏟아냈다. 지난 5년간 제주에 살고 있는 사람이 보기에도 너무 심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과장과 미사여구로 포장되었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제주의 부동산은 미친 듯이 뛰었다.


지난 3월 초, 건축허가 때문에 제주에 왔다며 연락을 해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직접 집을 지을 요량으로 ‘내손으로 집짓기 학교’에 다니고 있다며 환하게 웃었다.


“이민 가서 십 수 년 동안 번 것보다 더 많이 벌었습니다, 하하하. 땅값이 너무 올라서 그곳에 집을 지면 역이민해서 같이 살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만날 때마다 얻어먹어서 오늘 점심은 제가 사려고 했는데 안되겠습니다. 오늘도 얻어먹겠습니다. 대신 저는 차를 사겠습니다. 하하하.” 아이들이 사는 곳을 오가며 살 계획을 가진 이분은, 한국을 떠나있는 동안 서로의 집을 봐주고 텃밭을 가꾸며 살 역이민 이웃 서너 가구와 살 계획으로 땅을 구입한 분이었다. 가급적 거주를 마련하는 비용을 최소화하려고 집도 서로 힘을 합해 같이 지을 생각을 가진 분이었다. 뜻이 좋아서였을까, 운도 따라 주었다. 대신 비싼 땅값 때문에 역이민 이웃을 찾기 어려울까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다.


3.

“아들이 요즘은 변호사 일을 접고, 부동산 사업 쪽으로 돌았어. 변호사도 쉽지 않은가봐. 직업상 좋은 사람들 변호만 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변호하는 바람에 피해를 본 상대측 사람들이 생각나서, 보복을 당할까 무서워서 밤에 잘 나가지도 못한다는 거야. 그래서 변호사 일을 완전히 접고, 땅을 보러 다녀. 특히 시니어 주거단지가 생기는 곳을 찾아다니며 그 부근에 땅을 사서 건물을 지어서 파는데 변호사 때보다 수입도 훨씬 낫다는데.”


3년 전 가을 제주를 방문했던 P장로님에게 들었던 이야기의 일부다. 1960년대 후반 미국으로 가셨다는 그분의 아들은 한인으로서는 지역 최초의 하버드 출신 변호사라고 했다. 며느리가 1990년대 미스 코리아 ‘진(眞)’ 출신이라며 자랑 삼아, 수첩에 있는 아들 내외의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었다.


4.

LA에 살며 대학 동문회에 참석해서 알게 된 선배는 여유로운 은퇴생활을 하고 있었다. 동문회 모임에는 부부가 빠짐없이 참석하며 모임에 기부금도 내곤 했다. 답은 부동산에 있었다. 한창 일할 때, 변두리에 쓸모없는 땅 1에이커를 사둔 것이 효자가 된 것이었다.

도시가 팽창함에 따라 도로가 새로 생기고 주거지역이 되면서 땅이 커머셜이 되는 바람에 상가를 지었고, 임대 소득만 월 만 불이 넘었다.


5.

뉴저지 내가 살던 타운하우스 단지에 내 또래가 이사 왔다. 마흔 살이 다 되어 늦게 결혼했다는 그는 아이들이 어렸고, 미국에 이민 온지 얼마 되지 않았다. 와이프가 ‘파힐’이라는 부자동네에서 네일가게를 하고, 그 양반은 소위 ‘샷다맨’으로 불리는 한량이었으며 바둑이 나와 버금가는 실력이어서 가끔 바둑을 두었다.

잠실에서 13평짜리 주공아파트에 살다가 재개발되는 바람에 40평이 넘는 고급아파트를 갖게 되었다는 그는 자신의 ‘십억’이 넘는다는 ‘재산자랑’이 대단했다. 전세를 주고 그 전세돈을 들로 이민 와서 가게도 사고 집도 샀다는 그는 앞으로 그 아파트가 얼마나 더 오를지 모른다는 주장을 폈다.


나는 한국은 인구가 줄고 있기 때문에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무너지게 되어있는 한국의 부동산은 반드시 폭락하게 되어 있다는 ‘초(?) 치는’ 반대주장을 했었다.

10년쯤 흐른 지금 돌이켜보면 그가 맞았고, 내 예상은 정말 형편없는 엉터리였다. 그를 다시 만나게 되면 사과해야겠다.


“형님, 옛날 이웃에 살던 K 알지? 그분 부인이 췌장암으로 갑자기 사망했어. 고생만 엄청 했잖아. 아이들도 대학에 가고 살만해지니까 그렇게 된 거야. K형은 내가 생각해도 완전 건달이거든. 모르긴 몰라도 그 양반만 신나지 않았을까?”


그 부근에 살던 지인에게 한참 후에 들었던 말이다.


6.

“30년 동안 사업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돈깨나 번 줄 알지만, 아이들 교육시키며 빚 없이 겨우 먹고 살았던 것뿐입니다. 다만, 회사와 공장이 있는 부동산이 지난 30년간 많이 올랐어요. 그게 재산으로 남아 이제 이곳을 정리하고 은퇴해서 한국으로 돌아가도 될만큼의 여유가 되었습니다.”


작년 ‘아톰’님과 함께 동남아 배낭여행을 할 때, 카페회원으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KL)에서 사업을 하는 K사장으로부터 초대를 받고 염치불구하고 대접을 받았던 적이 있다. 지금은 사업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수도권에 터전을 마련했지만, 당시에는 사업체 매도계약으로 변호사를 만나는 등, 중요한 일로 바쁜 와중에도 두 여행객에게 세심한 배려와 시간을 써준 것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7.

“이제 이곳에는 10억 이하짜리 땅은 없어요. 돌멩이가 많아 밭도 지을 수 없는, 형편없는 비탈진 땅 천오백 평이 동네에 있는데 거기도 10억이 넘어. 땅주인이 70이 넘은 사람인데, 평생 승용차는 타본 적이 없이 트럭만 타고 다녔다는 거예요. 그런데 며칠 전에 에쿠스를 샀어. 이만한 재산을 가졌으면 이 정도 차는 사야한다고, 주변사람들이 했던 모양이야.”


지난 연말에 미국에 사는 자식과 형제들에게 다니러 가셨던 ‘도치’형님이 지리산을 여행하던 중에 서귀포 집으로 돌아오셨다. 형님을 만나러 엊그제 서귀포 안덕면에 들렸고, 오랜만에 만난 탓에 그동안 있었던 일을 화제로 대화를 나누다가 들었던 이야기다.


서귀포 안덕면은 제주의 서쪽 끝으로 제주에서도 외진 곳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10여 년 전만해도 그런 곳에서 어떻게 사느냐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길이 뚫리고 영어국제학교가 들어서면서 최근 3~4년 사이에 급격히 부상했다. 집을 1억 5천에 내놓아도 잘 팔리지 않던 동네가, 지금은 3억 이하짜리는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한다. 점심을 하러 가고 오는 차속에서 형님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이번에 미국에 갔더니 이제 일하는 친구들은 한 명도 없어요. 그런데 내가 보기에 제대로 괜찮게 사는 친구가 한 명도 없어. 다들 빌빌해. 내가 제일 괜찮은 것 같아요. 여기에 사는 게 얼마나 편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지내잖아. 친구들이 와서 며칠 바쁘게 보내다가 어제 돌아갔어.”


“이곳에서 산지가 벌써 12년이 됐어요. 처음 와서 구입한 오피스텔에서 12년 동안 매월 백만 원씩 받았으니까 이미 본전은 뽑고 남았지. 그런데 요즘 복덕방에서 팔라고 전화가 와. 팔면 두 배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런데 LA에 사는 내 매제는 내 말 안 듣고 월 백만 원씩 주면서 똑같은 오피스텔에 세를 사는 거야. 그 친구는 하는 사업으로 한국에 자주 오기 때문에 거주할 곳이 필요했거든.”


8.

“80이 넘은 노인네들이 더 이상 농사짓는 일이 힘에 부쳐 전답이나 집을 내놓으려고 해도, 외지에 나가 사는 자식들이 팔지 말라고 한답니다. 농사를 안 하더라도 그냥 내버려두라는 거지요. 그러나 평생 농사일만 하던 분들이 그냥 땅을 놀릴 수가 있나요. 힘들어도 계속 일을 하게 되는 겁니다.”


금오도에서 ‘금오도’님에게 들었던 이야기다. 섬 인구가 7~8천 명이었던 곳이 3~4천으로 줄었는데도 집이나 땅이 나오지 않는 이유를 묻는 내게 이렇게 설명했다. 연로해진 부모님들을 외지에 사는 자식이 모시거나, 모실 형편이 안 되면 재산을 정리해서 여생을 편하게 지내시도록 할 것이라는 것이 나 같은 보통 사람의 생각인데, 현실은 그게 아닌 모양이다.


전혀 이해하지 못할 듯하다가, 짐작이 가기도 한다. 그 짐작이 사실이 아니기만 바랄 뿐이다.


9.

“거기는 100만원이 넘는 땅이 없는 동네야. 더군다나 밭이면 아무리 비싸도 80만원이야. 그런데 평당 200만원을 주었다고? 아무 것도 모르는 외지사람이라고 바가지를 씌웠구먼!”


‘쉐 올리비에’의 주인인 버나드가 제주에서 집 지을 땅을 샀을 때, 도치형님이 했던 말이다. 이 말을 다시 꺼낸 것은 도저히 오를 이유가 없는 대한민국의 부동산이 오르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먹고 사는데 아무 문제가 없는데 왜 땅을 팔겠느냐는 거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버나드 처럼 땅이 필요한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하루에 100킬로씩 한 달을 돌아다녀 마음에 드는 매물을 겨우 찾았다. 다소 비싼 것 같긴 하지만, 어차피 남은 인생을 보낼 곳이니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파는 사람 입장에서는 굳이 팔지 않아도 되니까, 턱없이 비싸게 불렀는데 그게 성사되었다. 그날로부터 그 동네의 땅값은 새로 결정되었다. 다음에 내놓는 사람은 팔리거나 말거나 평당 3백을 부를 것이다. 겨우 4~5년 전의 일이다. 버나드는 그때 현명했다. 생각만 많고 멍청하기 만한 나는 절대 그렇게 못하는 사람이다.


10.

2009년 LA에서 처남 일을 돕고 있을 때, 같이 일하는 얌전한 친구가 있었다. 일하면서 잡담을 하다가 그 친구가 고등학교 한참 후배이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는 바람에 그 친구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되었다.


말로만 듣던 ‘서브프라임’ 모게지의 피해자이었다. 언더워터(융자액 이하로 집값이 떨어진 상태)가 되어 모게지 내는 것을 포기하고 버틸 때까지 버티며 살다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되어 이사할 아파트를 찾고 있었다. 이미 신용불량상태가 되어 렌트 승인을 받으려면 코사인을 구하거나 허위로 서류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가 되었다.


2010년 초, LA를 방문한 딸아이와 라스베가스를 갔다. ‘3 베드룸, 2½ 배쓰, 2 게라지 하우스’가 차압된 상태(Foreclosure)로 $99,000에 나와 있었다. 건축 일을 하는 사람이 건축비만 십만 불을 주고 똑같이 지으라고 해도 자기는 지을 수 없다고 했다. 몇 년 전 라스베가스에서 부동산 일을 하는 K선생을 제주에서 만나 물어보았더니, 지금은 부동산이 거의 다 회복되어 그런 집은 찾을 수 없다고 했다. 불과 2~3년의 시간차가 있었을 뿐이었다.


11.

“2006년 말이었어. 이상하게 그동안 갖고 있던 부동산을 처분하고 싶더라고. 그래서 그때 다 처분했어. 거의 650만 불이나 되었지. 지금 생각하면 그때 팔지 않았으면 나도 힘들었어. 그런데 실수했던 것이 그때 처분하고 빅토빌의 농장을 백만 불에 산거야. 그게 서브프라임 사태를 거치면서 40만 불까지 떨어지더라고. 그런데 괜찮아. 어차피 팔 것도 아니고 은퇴 후에 소일거리로 산 거니까!”


3년 전에 LA를 방문해서 만난 C선배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지리산에서 Y선생이 ‘운십기제로’라고 주장하는 말을 들었을 때, C선배님이 생각났던 것은 우연이었을까?


<후기>

혼자 길을 걸으며 이것저것 많은 생각을 했으며, 그런 상념의 일부를 글로 옮겨보았습니다. 제가 이민 중에 알게 된 많은 분들이 떠올랐습니다. 컴컴한 새벽에 일어나 세탁소에서 하루에 12시간씩 일하는 분들, 네일가게에서 온종일 손톱가루를 마시며 일하는 분들이 참 불쌍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돈이 인생의 전부도 아니고, 행복을 뜻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 놈의 돈 때문에 이 순간에도 한숨을 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많은 분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민을 가지 않았더라면, 가더라도 한국에 있는 전답이나 부동산을 남겨두었더라면 그렇게 고생하지도 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몇 푼 벌어보겠다며 이국땅에서 언어의 불편 때문에 기도 못 펴고 사는 분들이 자꾸 떠오르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제 글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얻은 정보'를 보고 여수 돌산읍 폐교에 관심 있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폐교 뿐만 아니라 '금오도'님이 보여준 금오도 땅도 참 좋아보였습니다. 관심이 있는 분들 몇 분이 모인다면 '협동조합' 형태로 자금을 마련해서 추진해볼 만하다도 생각합니다.


지난 글에 달린 댓글을 보고, 글을 쓴 의도가 왜곡되었다는 생각에 나머지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미국과 제주에서 살면서 겪은 사실을 기억 속에서 꺼내어 무미건조한 표현으로 기술한 것은 은퇴준비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부동산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 부럽다거나, 부동산에 투자하라고 권하는 것은 제 의도와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1980년대의 부동산 광풍이 1990년대 들어 거품이 꺼지면서 시작된 것이고, 한국의 부동산, 특히 제주의 부동산 거품도 시간이 문제일 뿐,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게지 사태처럼 꺼지게 될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장 필요하지 않은 자금이 있다면, 10년, 20년 후의 은퇴를 대비해서 부동산에 묻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는 판단일 수 있다는 것이 글을 쓰게 된 배경입니다. 예를 들어, 서귀포 안덕면은 십 수 년 전이면 몇 만원이면 충분했을 겁니다.


길지 않은 이민생활 중에 한국의 부동산을 처분하고 이민 와서, 한숨을 쉬며 후회하는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분들 중에 잠실의 장미아파트를 2~3억 좀 넘게 팔고 오신 분이 기억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미친 짓을 했다며 후회하더군요. 그 당시에도 20억이 넘는 아파트를 팔고 미국에 와서 좁은 아파트에서 렌트로 살고 있었으니 이해는 갔습니다.


저도 부동산 때문에 쉽게 만질 수 없는 큰돈을 번 기억이 있습니다. 분당의 30평대 아파트는 세 배를 받고 팔았고, 뉴저지의 덴빌의 집은 20만 불을 더 받았습니다. 제주에 왔을 때도 처음에는 전세를 살 생각이었습니다만, 전세가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집을 샀는데 그게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빌라가 아닌 단독주택이나 아파트를 샀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욕심이 큰가요? 다 지나간 이야깁니다, 하하하. 만족하며 살고 있으면 되지요. '운십기제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