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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20대 총선결과가 주는 교훈

30년 전 부친상을 당했을 때다. 낯선 사람이 와서 상주인 내게 귓속말을 전했다. "P국회의원께서 문상 오셨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국회의원이 왜 문상을 왔을까? 순간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문상 온 분을 돌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의아한 가운데 문상을 받았고 P의원은 의례적인 위로의 말과 함께 봉투를 놓고 갔다.


형이 사는 곳인 이웃 지역구 출신으로 야당 성향의 내가 좋아하는 의원이었으나, 당시 부모님이 사는 곳과는 지역구가 달랐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지역구 유권자인 형을 보고 찾아온 것이었다. 더군다나 형은 아버지와 성(姓)이 달랐다. - 부모님은 한국전쟁의 피해자로 재혼한 분들이었다.


그분이 왜 그랬는지 제주에 살면서 뒤늦게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부모상을 당한 지역구 주민을 문상 가는 일이라고 한다. 즉, 지역구 주민들의 경조사를 챙기는 일이야말로 국회의원이 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인 것이다. 정치 후진성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장 부장, 저 책상 위에 있는 서류더미가 뭔지 알아? 저게 다 인사 청탁 이력서들이야. 대부분 국회의원이나 정관계 유력인사들로부터 받은 거야. 하지만 나는 저런 것들은 쳐다보지도 않아. 그런데 이분의 부탁은 거절할 수가 없어서 이력서를 들여다봤어. 이력서가 괜찮아. 옛날 모회사 부사장이었던 분으로 내가 젊었을 때 부장으로 모시던 분의 아들이야. 미국 유학도 했으니까 영어 하나는 잘할 것이고, 자네가 하는 일은 영어가 필요한 일이잖아. 그래서 자네에게 말하는 것이니까 잘 생각해보고 괜찮으면 채용했으면 좋겠어."


이민을 떠나기 전에 있었던 회사의 사장에게 호출되어 들었던 말이다. 사장 책상 위에는 몇 백 장은 충분히 됨직한 종이더미가 쌓여 있었다. 국회의원이 되면 지역구 주민들의 취업청탁을 엄청 많이 받는다는 증거였다. 당연한 귀결이지만 나는 사장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70년대 초부터 고교야구의 팬이었다. 김재박, 장효조, 박노준, 김건우 등이 지금도 기억나는 이름들이다. 특히 군상상고와 선린상고, 대구상고를 응원했다. 그래서 지금도 프로야구 관전을 즐긴다. 강정호, 박병호 등 뛰어난 주전을 내주고도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넥센을 좋아한다.


볼카운트 2-3에서 분명히 볼로 보이는 공을 본 타석의 선수는 배트를 내던지며 1루로 향하는 순간, 심판의 '스트라이크' 선언이 뒤따르며 아웃이 판정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소위 '괘씸죄'의 일종이다. 심판의 판정을 기다리며 가만히 있었으면 포볼로 걸어 나갈 것을, 스스로 판단하여 구심을 우습게 만든 교만에 순간적으로 심기가 뒤틀려 엉뚱한 판정을 하게 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야구 중계를 본다.


이번 총선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이 나뿐인지는 모르겠다. 새누리당에서는 모처럼의 '1여다야' 선거 구도를 즐기는 모습이 역력했다. 자신이 제정한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180석 획득도 어렵지 않다는 듯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공천파동을 벌였고 지역구민을 무시했으며 선거의 심판자인 국민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과가 절묘하다. 여당은 과반석은커녕 제1당까지도 한 석 차이로 야당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야당에게 국회의장 자리까지 넘겨주게 생겼으니 여당 체면이 말이 아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야권연대를 성공시켜 '야권후보 단일화'로 임했던 4년 전 총선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야권에서는 심판자인 국민의 판정을 겸손하게 기다리지 않고 과반수 의석을 자신했던 것이다. 그 결과 선거 역사상 첫 연대를 이루고서도 야권은 패배하고 말았다. 오만과 교만보다 나쁜 것은 없다는 증거다.


스포츠에서나 선거에서나 인생에서나 교훈은 단순하다. 플레이어는 열심히 최선을 다해 자신의 역할만 하면 된다. 그것이 성공인지 실패인지 스스로 판단하는 것은 자신의 본분을 넘어선 교만이요, 오만일 뿐이다. 그 판단은 자신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겸손은 모든 일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다. 그러나 그 '겸손'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마음을 비우지 않는다면, 가난한 마음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도달하기 쉽지 않은 경지다.


<후기>

할일이 별로 없는 터라 정치에 관심을 갖는 저는 새벽 두 시에 일어나 TV를 켰습니다. 여당의 일방적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놀라운 결과를 보며 제 나름으로 분석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음이 왔습니다. 정치나 스포츠나 인생이나 어떤 일관된 진리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하하하, 오늘도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무지렁이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