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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사는 이야기

지리산둘레길 - 아홉

지리산둘레길을 끝내고 여수로


아무리 민박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좁은 방은 난생 처음이었다. 눕고 배낭을 풀어놓을 공간이 있는 것도 혼자이기에 가능할 정도였다. 게다가 화장실도 밖에 있으니 속옷 차림으로 나가기도 께름직했다. 깨끗하다는 것과 게스트하우스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실 같은 공간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가 들어올 때는 손님이 하나도 없었는데, 잠자리에 들려고 하니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젊은이들이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 몸은 솜처럼 피곤했지만 잠들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새벽은 왔다. 창문을 열어젖히고 지리산의 맑은 공기를 흠뻑 들이켰다. 생리작용을 해결하고 나니 시장기가 돌았다. 엊저녁에 컵라면 두 개나 먹었지만 밀가루 음식이라 효과가 별로였나 보다(?). 인터넷으로 버스 시간을 검색해보니 20분밖에 남지 않았다.


부지런히 여장을 꾸러 버스터미널로 가서 7시 15분발 덕산행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거리는 가까웠지만 중간에 연세가 많은 손님들을 승차시키느라 30분 가까이 되어서 덕산터미널에 도착했다. 지난번 노인용 지팡이를 샀던 철물점이 보였다. 바로 옆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한다는 사인이 보였다. 주저없이 들어가 허기를 달랬다.


지리산을 넘었을 뿐인데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바뀌었고 음식도 달랐다. 전라도에서는 반찬도 9가지나 되고 무엇이든 맛있었으나 경상도에서는 값도 천원이 비쌀 뿐만 아니라 반찬도 6가지뿐이었으며 맛도 별로였다. 물론 음식점 한두 군데를 보고 전체를 평가하는 것은 무리겠으나 내가 경험한 느낌은 그랬다.


이제 배도 채웠겠다 다시 걸었다. 8시였다. 어제 ‘경주애인’님과 덕산에서 출발하는 9코스의 종점인 위태에서 만나기로 잠정 약속을 해둔 터였다. 5일 전인 지난 월요일에 Y선생과 헤어진 지점에서 짧은 기간이나마 그분을 회상했다. 사업을 했다는 그분은 '운7기3'이 아니라, '운10기0'라고 했었다. 자신의 인생이나 주변사람들을 보면 그렇다고 했다. 거기에서 얼마나 지났을까? ‘경주애인’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조금 있다가 출발한다며 위태에 도착하면 GPS에 찍힐 장소를 알려달라는 내용의 요지를 전달받았다.


한국은 좁은 땅이지만 고장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덕산 주변은 보이는 곳마다 감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곳은 곶감의 주산지로 주민 대부분이 감으로 생계의 주 수단을 삼고 있는 듯했다. 그만큼 감나무가 많았다. 또 대나무 숲이 많이 보였다. 군데군데 대나무 군락지가 눈에 뜨였고 자주 대나무 숲 가운데를 질러갔다. 그런데 대나무의 굵기는 작년에 베트남 싸파에서 보았던 대나무에 비해서는 한참 가늘었다.


모든 ‘지리산둘레길’ 코스가 그렇듯 9코스도 재를 하나 넘어야했다. 지리산 천왕봉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지만, 어제 힘을 너무 뺀 탓인지는 몰라도 그것마저 힘들었다. 그 후부터는 탄탄대로였다. 11시도 못되어 9코스 10.3킬로의 종점인 위태에 도착했다. ‘경주애인’님을 만날 수 있는 랜드마크를 찾았지만, 가게 하나 보이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다. 겨우 마을 사람을 만나 길을 물어보았으나 너무 친절한 것도 때로는 부담이 되는 것처럼 이 양반이 그랬다. 자신이 직접 운전수와 통화해서 길을 자세히 알려주겠다고 고집했다. 미국에서 수십 년을 살다가 온 사람에게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알아들을 턱이 없다.


우여곡절 끝에 ‘경주애인’님을 만나 여수로 향했다. 난생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어차피 전라도 지방을 돌아보기로 한 것이니 계획에도 부합했다. 엄청난 크기의 공단도 보고 ‘이순신 대교’와 ‘돌산대교’, ‘거북선 대교’가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 여수항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근처에 있는 ‘은수’님의 사업장에 들려, 4년 만에 반갑게 은수님을 만나 담소하며 차를 얻어 마셨다. 저녁에는 ‘감사함’님 댁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일단 헤어졌다. '감사함'님이 댁에서 저녁을 준비하신다는 말을 들었다.


한국에서의 정착지를 여러 가지 고려한 끝에 ‘여수’로 마음을 굳힌 ‘경주애인’님을 따라 복덕방에 들려 가격이나 부동산 전망에 대해 여러 가지로 대화를 나눴다. - 이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글을 써야할 것 같다. - 역동적인 한국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감사함’님과의 약속시간인 5시를 이미 지나고 있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길도 많이 막혔다. 막히는 이유는 길이 머지(Merge)가 되면서 끼어드는 차들 때문이었다. 결국 1시간이나 늦은 6시에 겨우 도착하는 바람에 과일이나 꽃을 살 여유도 없었다. 입구에서 주차를 안내하려고 기다리고 계셨다. 작년 동남아 여행 직후 서울에서 있었던 오프라인 모임에서 로렌스님과 함께 해후했던 이후 두 번째 만남이었다. ‘감사함’님이 준비한 음식에 놀랐다. 정성스러운 비빔밥과 ‘LA갈비’부터 회까지, 그리고 술을 일절 하지 않는 분들이, 술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처음 술을 사보았다는 말씀에 몸 둘 바를 찾지 못할 정도로 송구했다. 이럴 때는 그저 맛있게 먹어주는 게 최선의 전략이라는 것은, 인생의 지난 세월을 통해 배운 교훈이다.


몬트리올에서 오신 '자수정'님 부부와, 광양에서 온 부부, 경주애인님 부부와 나중에 합류하신 ‘은수’님까지 십여 명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운 담소의 시간을 가졌다. 세상이 좁은 것이 몬트리올에서 오신 '자수정'님은 그곳에 사는 내 대학선배를 잘 알고 있었다. 이래서 언제 어디서든 나쁜 짓을 하면 안 된다.


‘감사함’님은 그 와중에도 이곳저곳에 전화하셔서 우리의 스케줄을 만들고 계셨다. 내일 일요일은 주일예배 참석 후에 ‘영치산 진달래 꽃 축제’, 월요일은 ‘여수 버스 투어’, 수요일은 ‘금오도’ 이런 식이었다. 그 덕분에 여수에 5일을 머무르게 되었고, 모텔에는 5일 숙박하겠다고 하고 5일치 숙박료를 한꺼번에 지불하는 것으로 길고도 길었던 하루, 아니 그동안의 ‘지리산둘레길’ 걷기를 10일 만에 끝내게 되었으며, 하루아침에 집도 절도 없는 나그네 신세가 목적과 스케줄이 있는 ‘VIP(?)’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후기>

지금 시간이 너무 늦어 현지 생방송(?)은 여기서 끝냅니다. 이렇게 늦은 시간이나마 글을 쓰는 것은,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은 송구스러움을 다소나마 더는 길이라는 염치없는 생각 때문입니다. 성의 없고 임기응변적인 글이지만 이해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지리산 둘레길’에 대한 여행기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못 다한 이야기는 집에 돌아간 다음 못 올린 사진과 사후 소감으로 계속하겠습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오늘 식사를 끝낸 후 디저트로 받은 상차림입니다. 'LA갈비'는 미국을 떠난 후 처음 보았습니다. 연로하신 선배님의 노고에 몸 둘 바를 몰라 맛있게 먹고 마시는 것으로 '감사함'님께 감사한 마음을 대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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